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28화
명예 결투(1)
“이게 그 딸기잼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만 실제로 먹어보는 건 처음이구나.”
식탁의 가장 상석에 앉아 여유롭게 빵과 딸기잼을 맛보는 남자아이.
‘카엘 스켈드 베르딕’
베르딕 가문의 전대 가주이자.
엘프리드의 할아버지.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은율이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은 남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혹시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굉장히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나는 그나마 덜 긴장한 것으로 보이는 리아네에게 슬쩍 속삭였다.
“저기 리아네 씨.”
“네?”
“혹시 마족은 늙으면 다시 젊어지고 그런 건가요?”
“그럴 리가요. 마족도 계속 늙기만 할 뿐이죠.”
“그런데 저분은 왜…….”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는데. 아주 오래전 마계에 있었던 차원 전쟁 중에 크게 다치신 부작용이라고……”
어려지는 부작용이라니……
언뜻 보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에스테르여. 궁금한 점이 있으면 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떤가? 꽤 만족스러운 식사 중인데 귀가 아주 간지럽거든.”
속닥거리던 나와 리아네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혹시나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괜찮네. 마침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것도 많았는데, 이리 와서 가까이 앉아보게나.”
“…….”
나는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애늙은이 말투와 상반되는 겉모습은 아직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새로운 에스테르여, 이 딸기잼이라고 하는 걸 그대가 직접 만든 것인가?”
“네, 딸기밭에서 직접 재배한 딸기와 벌꿀을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굉장히 마음에 든다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짓던 카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엘프리드를 바라봤다.
“문제를 일으켜 쫓겨난 놈이 나도 먹어보지 못한 귀한 음식을 혼자 맛보며 호강을 누리고 있었구나.”
“죄,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됐다. 잠시 농을 친 것뿐이니라. 생각한 것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카엘의 농담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엘프리드.
저렇게 긴장한 모습은 농장에 온 뒤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남자아이가 정말로 베르딕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라는 게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젊은 에스테르여…….”
“어르신, 제 이름은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시현이라고 불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임시현? 이계에서 넘어왔다더니, 확실히 이름도 특이하구나.”
그는 임시현이라는 이름을 몇 번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 시현. 듣자 하니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하더구나.”
“네. 어쩌다 보니 명예 결투를 신청받게 돼서…….”
“셀베르크 가문이라고 했던가? 꽤 치졸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직접 딸기잼을 맛보니 생각이 좀 바뀌는구나. 확실히 딸기밭을 욕심낼 만하겠어.”
카엘은 식사를 마무리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리아네가 빠르게 접시를 정리하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그는 여유롭게 차 향을 즐기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마왕님께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신 모양이더구나. 발레리안을 통해 셀베르크 가문과 원만한 해결을 지시했다고 들었다.”
“아…… 그렇습니까?”
괜히 발레리안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셀베르크 가문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게다. 허무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공들여서 교묘한 함정을 준비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
“나도 원래라면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았겠지만. 오랜만에 가문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한 손자 녀석도 있고, 마왕님의 체면도 있으니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베르딕 가문의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나 개인으로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와줄 생각이니라.”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지금같이 답답한 상황에서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미 명예 결투의 빌미를 제공한 순간부터 불리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너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예…….”
결투에 응하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이미 명예 결투 조건이 성립돼 버린 순간 나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안전한 선택을 원한다면 결투는 피하는 게 좋을 거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로 여러 가지 불이익은 받겠지만. 마왕님께서 중재에 힘을 실어준다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는 잠시 차를 홀짝이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셀베르크 가문은 아마 너의 약점을 계속 흔들면서 원하는 걸 뺏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한번 싸움에 피하게 되면 집요하게 노려지는 게 아주 당연한 순서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농장 식구들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확실히 카엘이 말한 것처럼 셀베르크 가문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결투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명예 결투라는 건 결국에 양쪽 모두 위험을 안고 벌이는 승부다. 만약에 네가 이긴다면 셀베르크 가문은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벌일 수 없지 않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결투에 나가서 이길 수 있을지가…….”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느니라. 겨우 검술의 기초만 다진 수준에 강화마법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고?”
“…….”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에 나서는 소영주의 실력을 정확히는 몰라도 절대 네가 쉽게 이길 만한 상대는 아니겠지. 상대도 그걸 알고 있기에 부담 없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 걸 테고.”
“그럼 어떻게…….”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게 아니겠느냐?”
“……?”
“확실히 결투에서 이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무승부에 근접할 만한 실력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느냐? 너는 먼저 결투를 피할지, 말지 정하도록 해라. 그 뒤에는 내 방식대로 어떻게든 도와주도록 할 테니…….”
말을 끝낸 카엘은 이제 조금 식어버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잠시 다른 농장 식구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언제나 그랬듯. 농장의 식구들은 나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결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균열에 몇 번 들어가 직접 전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아직 내세울 만한 수준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졌을 때, 내가 부담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컸다. 정말 힘들게 가꿔온 딸기밭인데…….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과감하게 나가야 하지 않을까?
거기다 음모를 꾸미고, 마을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괴롭힌 것에 대한 대가로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꽤 길었던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정말로 승산이 있는 거겠죠?”
“말하지 않았느냐? 무승부까지는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네 노력 여하에 따라서 결과는 충분히 변할 수 있다.”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는 노력은 최대한 다해서 그 재수 없는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습니다.”
나의 결심을 들은 카엘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생겨났다.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나도 약속했던 것처럼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겠느니라.”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할 일 없는 뒷방 늙은이가 나섰을 뿐인데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그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흠흠…… 뭐, 꼭 은혜를 갚고 싶다면,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식사 정도만 잘 챙겨주면 되지 않겠느냐?”
나는 금방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새로운 경험을 최대한 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물론 딸기잼도 원하시면 언제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카엘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새로운 에스테르는 눈치가 빨라서 마음에 드는구나.”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밖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모두 멍하게 바라봤다.
걸음을 멈춘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내 쪽을 바라봤다.
“뭐 하고 있느냐? 얼른 따라오지 않고!”
“네?”
“결투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지.”
“아…… 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곧바로 농장 밖으로 향했다. 다른 농장 식구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의 뒤를 따랐다.
* * *
엘프리드와 매번 검술 대련을 벌이는 공터에 도착했다.
나는 평소에 검술 수련을 할 때처럼, 편안한 옷차림에 검을 들고 섰다. 반면에 카엘은 옷차림도 그대로에 손에는 평범한 나무 막대기 하나만 들려 있을 뿐이었다.
겉모습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막상 어린아이를 두고 검을 들려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준비는 끝난 것이냐?”
“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자, 잠깐만요. 어르신? 뭔가 설명도 없이 바로 시작하시는 건가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급하게 질문했다. 내 반응에 카엘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또 필요한 게 있느냐?”
“지금 하려는 수련의 목적이라든가…… 가르쳐 주시려는 내용에 대한 해설이라든가…….”
내 대답을 들은 카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시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너에게 새로운 뭔가를 가르쳐 줄 생각이 없느니라.”
“……예?”
“결투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 겨우 기초만 닦은 너에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
“혹시 내가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준다든가, 한방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필살기 같은 걸 전해줄 줄 알았느냐?”
…….
…….
솔직히 말하면 그럴 줄 알았다.
아니면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에 상대와 근접한 실력을 갖춘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상대도 많은 게 걸려 있는 결투다. 겨우 일주일 동안 배운 기술에 당할 상대였다면, 애초에 내가 나설 이유도 없었겠지.”
논리적인 그의 설명에 찔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알려주려는 건 아주 간단해. 나는 너에게 ‘죽음을 피하는 법’을 알려줄 생각이니라.”
“죽음을 피하는 법?”
마음속에서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네가 결투에 나가기 직전까지 본능적인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줄 거다. 너의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수련이지.”
“음…… 그건 어떻게 하는 거죠?”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잠재된 능력을 꺼내기 마련이야. 그럼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 아니겠느냐?”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지…….
카엘은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너에게 죽음을 보여주고, 너는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치 지옥의 사신이 내뱉는 말처럼 섬뜩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