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30화
명예 결투(3)
“뭐야? 왜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 찾아온 거야?”
걸쭉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았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농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다시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주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얼굴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고, 안드라스보다 더 우람한 덩치에 허리춤에는 커다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마족의 뿔이 없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일단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중년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누, 누구세요?”
“나? 설마 너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온 거냐?”
“네, 카엘 어르신이 강제로 구슬을 입 안에 넣으셔서…… 정신을 차리니까 여기에…….”
“푸핫! 카엘 녀석 막무가내인 성격은 여전하구먼.”
그는 카엘과 친분이 있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 미안, 미안. 그보다 카엘 그 녀석은 벌써 어르신이라고 불릴 나이가 된 건가? 바깥의 세상은 시간이 꽤 많이 흘렀나 보군.”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가 어디인지, 또 당신은 누구인지.”
“그걸 설명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 내 이름은 벨리온! 그리고 여기는 아마도 네 의식 깊은 곳일 거다.”
벨리온……?
그리고 여기가 내 의식 깊은 곳이라고?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벨리온이라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카엘 그 자식은 대충 설명이라도 해주고 보낼 것이지…… 잘 들어 친구. 네가 입 안에 넣었다는 구슬은 나의 사념체가 깃들어 있는 구슬이야.”
“사념체…… 왜 그런 사념체 구슬을 만든 거죠?”
“일종의 계약이었지. 카엘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에 원했던 게 바로 이 사념체의 구슬이거든.”
“그럼 카엘 어르신은 왜 저에게 그 구슬을…….”
“너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스르릉…….
벨리온은 다짜고짜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어 나를 향해 겨눴다.
“어…… 벨리온…… 님?”
“내가 만족하는 실력이 나올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는 거다.”
“예에?!”
“어서 검을 들어라. 어물쩍거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
“자, 잠깐만요! 저는 검도 없는데…….”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내 오른손에는 평소에 사용하던 엘프리드의 검이 스륵 생겨났다. 갑자기 일어난 마법 같은 상황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큭큭, 아까 내가 이곳은 의식의 세계라고 했잖아. 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지.”
“아…….”
“그럼 간단히 실력 좀 확인해 볼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벨리온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민첩한 움직임으로 내게 접근했다.
수비를 위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탓인지, 제대로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했다.
-까아앙!
“크윽!”
심하게 상체가 흔들린 탓에 나는 벨리온의 추가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의 커다란 검이 가차 없이 내 몸을 꿰뚫고 들어왔다.
“헉?!”
배가 꿰뚫리는 섬뜩한 기분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꿰뚫리는 감각은 무척 생생했지만, 다행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벨리온이 다시 검을 뽑아 들자 꿰뚫린 부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의식 세계 속 현상을 신기해하고 있을 때, 벨리온이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생각보다 너무 실력이 실망스러운데? 정말 카엘이 보낸 거 맞아?”
“끄응…… 맞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명예 결투부터 카엘을 만나 수련을 한 이야기를 벨리온에게 전부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에이씨, 뭐야! 그러면 카엘 그 녀석이 나한테 엄청 귀찮은 일을 맡긴 거잖아.”
“…….”
벨리온은 한참을 투덜거리더니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어쩔 수 없구먼. 거기 너!”
“네?”
“아까 말했듯이 이곳에서 나가고 싶으면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야 해. 지금 너의 실력에 맞춰서 기준을 낮춰 줄 테니까 다시 준비해.”
그는 터덜터덜 걸어가 아까와 비슷한 위치에서 자세를 취했다. 나도 다시 검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기준을 낮추긴 했어도 쉽지 않을 거다. 준비됐어?”
“네!”
“좋아! 그럼 다시 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벨리온은 먼저 나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스피드나 위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서 살짝 버겁긴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카아앙! 카앙!!
-깡!!
“뭐야? 그렇게 굼뜨게 검을 휘두르면 누가 와서 맞아줄 것 같아?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한 번, 한 번에 온 힘을 다하란 말이야!”
“크흑!”
카엘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공격을 가하는 느낌이었다면, 벨리온은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묵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감각을 빨리 끌어내지 못한다면 절대 결투에서 이길 수 없다.
정신없이 공격을 막아내던 와중에 카엘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 늦었지만, 3일 동안 갈고닦았던 날카로운 감각을 끌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고생하면서 수련한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카엘과 수련하면서 체득했던 감각을 되살리자, 벨리온의 공세를 한결 수월하게 버텨낼 수 있었다.
변화한 내 모습에 벨리온이 감탄을 터뜨렸다.
“오! 카엘 녀석이 쓸데없는 걸 가르치지는 않았나 보네.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 있잖아?”
그의 칭찬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결국, 벨리온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가슴에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
검으로 몸을 꿰뚫리는 기분은 두 번째로 경험하는데 굉장히 불쾌했다.
“쓰읍! 감각은 날카로운데 검술, 특히 수 싸움에는 완전 젬병이구먼. 수비적인 움직임은 나름 쓸 만해도 거기서 생기는 이점을 공격으로 챙겨가지를 못하니 원…….”
벨리온의 평가는 정확했다.
상대적으로 강한 상대와 대련을 하면서 항상 수비적인 입장만 취하다 보니, 공격에 대한 움직임이나 수 싸움은 너무나도 빈약했다.
“딱 봐도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해결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이봐, 젊은 친구!”
“네?”
“지금부터 내가 공격하는 모습을 잘 봐둬.”
다시 벨리온은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간결하고 직선적인 공격들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의 공격을 수비해냈다.
“방금 내가 한 공격들 기억했어?”
“기억했습니다.”
“그럼 똑같이 나한테 공격해 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조금 전에 봤던 공격을 그대로 벨리온에게 시도했다.
그는 나와 똑같은 자세로 공격을 방어했다. 그러나 자세만 비슷했을 뿐 그의 수비가 더 부드럽고 견고했다.
“자! 방금 공격과 수비 동작 전부 확인했지? 이제 우리는 이 동작들만 이용해서 싸우는 거야.”
“이 동작들만 이용해서요?”
“그래, 이 동작들만 사용해도 충분해. 그럼 다시 간다!”
벨리온은 방금 말했던 대로 아주 단순한 공격과 방어를 가지고 나와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조건이 익숙지 않아서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는데, 단순한 동작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금방 익숙해졌다.
거기다 벨리온의 동작을 거울처럼 따라하다 보니, 전체적인 움직임도 점점 매끄러워졌다.
이런 특이한 방식의 대결을 이어나가는 동안 벨리온이 의도했던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한 동작들로 공방을 이어나가면서 아주 기초적인 수 싸움을 깨닫게 해주려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나갔다.
거의 기계처럼 공방을 주고받던 중, 벨리온이 약속되지 않은 동작으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금방 적응해서 나도 똑같이 그 공격을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새로운 동작이 추가되더니, 나중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공방을 주고받게 됐다.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방이 순식간에 살 떨리는 칼부림으로 변해갔다.
눈으로 좇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오가는 칼날.
카엘이 강조했던 감각의 유지를 떠올리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무아지경으로 검을 주고받다 보니. 벨리온의 검과 내 검이 헷갈리는 상태에까지 도달했다.
“으윽…….”
점점 매서워지는 벨리온의 압박에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는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손에서 검을 놓치려는 순간.
벨리온이 허리춤에 검을 집어넣으며 뒤로 물러났다. 멍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는 빙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정도면 합격.”
“……네?”
“합격이라고. 아마 이 정도면 카엘도 만족해할 거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벨리온 님!”
“인사는 됐어. 어차피 카엘과 계약 때문에 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하하, 당연하지. 천하의 벨리온이 직접 가르치는 데 도움이 안 될 리가 없지!”
그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갈 시간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젊은 친구. 밖으로 나가면 늙어버린 카엘에게 안부나 전해줘. 뭐, 사념체의 인사 따위는 의미 없겠지만…….”
“알겠습니다. 꼭 전하겠습니다.”
“어떤 놈이랑 결투를 벌이는지는 몰라도 꼭 이겨야 해! 벨리온 님의 비공식적인 제자니까 말이야.”
벨리온의 응원을 마지막으로.
처음 구슬을 먹었을 때처럼 의식이 아득해졌다.
* * *
눈을 뜨자 어둑어둑해진 농장 주변의 풍경이 보였다.
의식 속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는데,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으음…… 어르신?”
“혹시나 그 친구가 심술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그 녀석의 시험을 일찍 통과했나 보구나.”
“네, 엄청 열심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카엘 어르신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카엘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씁쓸해하는 것 같으면서,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구슬을 사용할 때면 그 친구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감정이 한동안 그의 눈동자에 가득해졌다.
“아무튼, 수고 많았다. 이제 좀 자신감이 생기느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조금씩 강해지는 것 같네요.”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구나. 앞으로 남아 있는 기간에 더 채워나가면 될테니…….”
나는 힘들 거라 생각했던 결투에 희망을 품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명예 결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