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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31)화 (131/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31화

명예 결투(4)

의식의 세계 깊은 곳.

나는 다시 벨리온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카앙…… 깡!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꽤나 능숙하게 공격과 수비를 이어나갔다.

벨리온은 크게 검을 한 번 떨쳐내고 슬쩍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많이 좋아졌는걸?”

“그렇습니까?”

“뭐, 카엘 녀석과 나에게 가르침을 받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기본이지.”

“저도 두 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런데 카엘 그 녀석이 세 번이나 구슬을 사용할 줄은 몰랐네. 밖의 상황이 아주 급한 모양이야…….”

나는 벨리온의 사념체가 담겨 있는 구슬을 3일 연속으로 사용했다. 꽤 인상적인 작별인사를 나눴던 우리는 다시 만났을 때 꽤 뻘쭘한 표정을 지었었다.

의식 세계 안에서의 수련은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약이 없어서, 짧은 기간 안에 효율적으로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벨리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 명예 결투인가 뭔가 하는 게 내일이라고 했지?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아?”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

“사념체 구슬을 먹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처음 보는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요.”

첫 구슬 때는 그런 증상이 없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구슬을 먹을 때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기억들 속에 생생한 감각이나 감정들이 너무나도 실감 나서, 혼란스럽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떤 장면들인데?”

나는 벨리온에게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 중에서 가장 강렬한 느낌을 줬던 장면 하나를 설명했다.

아주 강력해 보이는 어떤 마족과 기억의 주인공이 치열하게 싸우는 내용이었다.

“끄응……. 내 기억들 중 일부가 너에게 스며든 모양이다. 사념체 구슬을 연속으로 사용한 부작용 같은 걸 거다.”

“이게 벨리온 님의 기억이라고요?”

“그래. 아마도 그 장면은 내가 마왕과 일대일로 싸웠을 때의 기억일 거다. 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하고 처절한 싸움이었지.”

벨리온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조용히 잠겼다. 반면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에 따르면, 기억의 주인공은 치열한 싸움 끝에 상대했던 마족의 한쪽 뿔을 잘라내며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멋있고 가슴을 들끓게 했다.

“대단해요. 설마 마왕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신 분이었을 줄이야.”

“흠흠, 마계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도 마왕의 뿔을 잘라낸 인간은 나밖에 없을 거다.”

그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유일무이한 업적을 자랑했다. 마왕의 뿔을 잘라낸 업적이라면 나라도 저렇게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다.

벨리온을 대단하다고 느끼는 한편.

그가 왜 마왕과 싸웠으며, 또 왜 이런 사념체 구슬을 카엘에게 남기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궁금증을 해결하기도 전에 의식의 세계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벨리온은 주변을 살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구슬의 힘이 다했나 보군.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인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와 마주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고생했다.”

“아닙니다. 모자란 놈을 가르치신다고 벨리온 님이 고생이 많으셨죠.”

“확실히 처음에는 실망스럽긴 했지.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 생각보다 가르치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생전에 제자라도 한 명 둘 걸 그랬어.”

주변의 뒤틀림이 심해지면서 벨리온의 허무한 표정이 점점 흐릿해졌다. 의식이 아득해지기 직전 마지막 한마디를 있는 힘껏 외쳤다.

“벨리온 님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꼭 결투에서 이겨서 소중한 가르침이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내 마지막 말에 벨리온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생겨났다. 그의 입이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끝끝내 무슨 말인지는 전해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의식의 세계 깊은 곳에서 빠져나왔다.

* * *

오늘 아침의 메뉴는 감자 샐러드와 모닝빵을 이용한 샌드위치!

감자와 계란을 잘 삶아서 으깨주고. 물기를 제거한 채소와 마요네즈, 설탕을 넣고 잘 섞어주면 쉽게 감자 샐러드 완성.

살짝 데워 부드러운 모닝빵에 감자 샐러드를 듬뿍 넣어주면 든든한 아침 식사가 완성된다.

내 요리에 완전 길들여진 농장 식구들은 물론이고, 비어 있던 상석에 자리 잡은 카엘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아빠가 만든 요리는 전부 맛있다고 했던 은율이는 오늘도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혹시나 체할까 봐 옆에 우유를 잔에 따라줬다. 은율이는 양손으로 야무지게 유리잔을 들어 우유를 마셨다.

입가에 묻은 우유를 손으로 닦아주자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빠.”

“응?”

“아빠는 왜 안 먹어?”

“어…… 그게…….”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은율이의 식사를 챙기느라 식사를 늦게 시작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내 앞에 샌드위치를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가 가끔 이렇게 날카롭게 질문을 해올 때면, 은율이가 얼마나 나를 살펴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계속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던 와중, 상석에 앉아 있던 카엘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혹시 긴장돼서 식사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느냐?”

“…….”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식사를 거르는 건 좋지 않아. 억지로라도 먹어보도록 하여라. 그래야 나중에 힘이 부족하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 말이 맞아. 할머니도 아침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했어.”

“은율이는 아주 똑똑하구나.”

“헤헤.”

카엘의 칭찬에 은율이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 차가 별로 없어 보이는 두 사람, 그런데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눌 법한 대화가 이어지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특이하게 은율이는 카엘의 어려 보이는 외모에도 할아버지라 부르는 데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신기해서 따로 물어봤었는데…….

-할머니랑 비슷한 것 같아.

……라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은율이는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카엘에게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카엘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식사는 챙겨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선배. 나중에 괜히 힘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긴장을 조금 풀 수 있도록 제가 빨리 차라도 끓여올까요?”

걱정스럽게 한마디씩 건네는 농장 식구들.

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막상 결투 당일이 되니 긴장감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어제 잠을 설치지 않았다는 게 아주 많이 다행인 부분이었다.

나는 걱정하는 농장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접시를 비워냈다.

아침 시간이 끝난 뒤.

은율이는 리아네에게 맡겨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농장을 나설 준비를 했다.

나의 긴장감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됐는지. 카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해졌다.

현관문을 나서는 길에 은율이가 리아네와 함께 마중을 나왔다. 은율이는 오늘 있을 결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에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은율아, 아빠 다녀올게. 리아네 언니랑 잘 놀고 있어.”

인사에 은율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아달라는 듯 양손을 쫙 뻗어 보였다. 나는 은율이를 안아 들며 오랜만에 긴장감을 잊어버리고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어리광을 부릴 줄 알았던 은율이가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빠.”

“…….”

“힘내! 은율이도 응원하고 있을게.”

“……!”

예상치도 못한 응원에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팔을 벌려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건 평소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슬퍼하거나 울고 있을 때, 내가 안아줘서 마음을 진정시켜줬던 것처럼. 은율이도 안아서 나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너무나 뜻밖이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을 느끼고,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 작은 생명체의 포옹만으로 안정을 되찾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리고 뒤이어 은율이에 대한 고마움과 기특함으로 코끝이 살짝 시큰해졌다.

은율이는 오늘 명예 결투가 있다는 사실은 몰라도, 나에게 중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카엘, 벨리온과 수련을 하느라 잘 놀아주지 못해도, 투정 부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면 기특하면서도 불쑥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혹시 내가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은율이가 억지로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은율이 강하게 껴안으며 얼굴로 부드러운 볼살을 느꼈다.

“알았어, 은율아. 아빠 꼭 힘내서 잘 마무리하고 올게.”

“응.”

“다 끝나면 아빠랑 실컷 놀자, 알았지?”

내 마지막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은율이는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리아네와 은율이를 뒤로하고 우리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농장의 두 사람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려 농장 건물을 바라보던 카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껏 손자들만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아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

“은율이를 보고 있으니…… 예쁜 손녀가 하나 있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구나.”

항상 허허롭고 여유로운 모습의 카엘이 처음으로 아쉬움이란 감정을 드러냈다. 조금 전의 은율이의 모습을 다 같이 지켜봐서 그런지, 그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의 반응에 나는 왠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엘프리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꿎은 엘프리드는 괜히 죄스러운 표정으로 푹 고개를 숙였다.

은율이 덕분에 여러 가지 의미로 긴장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결투가 예정된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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