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32화
명예 결투(5)
명예 결투의 신청은 셀베르크 가문에서 했으므로, 결투가 이뤄지는 장소는 내가 결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편한 농장 근처에서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은율이가 불안해할 것 같았고, 또 야쿰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커서 그만뒀다.
그래서 선택한 장소는 바로 딸기밭 근처의 공터.
원래는 수확을 끝낸 딸기들을 모아뒀다가 마차에 싣기 위한 장소였는데, 오늘은 결투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번 결투에 딸기밭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우리는 공터 근처에서 먼저 도착해있던 셀베르크 가문의 일행을 발견했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많은 기사와 병사들에 가문의 깃발을 든 기수까지 있었다. 5명도 안 되는 우리 쪽이 많이 소박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시점에 그들도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셀베르크 가문의 소영주 글라디온과 휘하의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차원 전쟁의 영웅이신 베르딕 가문의 전대 가주님을 뵙습니다.”
“자네가 셀베르크 가의 소영주 인가?”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글라디온을 살펴보던 카엘이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래전에 자네의 아버지를 봤던 기억이 나는군.”
“아마 베르딕 가의 새로운 가주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였을 겁니다. 어렸을 적에 아버님께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 그때 자네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젊었었는데, 벌써 이렇게 장성한 아들을 두게 되다니……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
두 사람은 오랜 친척 어른을 만난듯한 분위기를 잠시 연출했다. 하지만 적당한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분위기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글라디온이었다.
“차원 전쟁의 영웅이신 카엘 님께서 오늘 결투의 참관인을 맡아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베르딕 가문의 엘프리드 공자께서 오늘 저와 결투를 벌일 상대와 굉장히 가까운 관계라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
글라디온은 카엘에게 나와 엘프리드의 관계를 들먹였다. 노골적으로 참관인의 공정성 문제를 따졌다.
“저 건방진…….”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흥분한 엘프리드를 안드라스가 재빨리 막아섰다. 물론 말리는 안드라스도 기분이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카엘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정성의 문제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이제 과거의 영광과 명예밖에 남지 않은 늙은이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
“하하,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맞아, 괜한 걱정이지. 자네가 지금 해야 할 걱정은 그게 아니라네.”
“그게 무슨……?”
글라디온을 바라보는 카엘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카엘의 주변으로 저항할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해 버렸다.
“과거에 나를 만났던 자네의 아버지가 지금 자네처럼 행동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냈을 거라네.”
“…….”
글라디온은 물론이고 뒤에 기사와 병사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지금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뿐이야. 하지만 젊은 소영주여. 항상 명심하게나.”
“…….”
“과거의 영광과 명예밖에 남지 않은 늙은이는 언제든 사소한 이유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주변을 뒤덮었던 무거운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셀베르크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공포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약속된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니 각자의 위치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시간이 되면 내가 신호를 보내주도록 하겠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글라디온과 그 휘하의 사람들은 황급히 반대쪽으로 물러섰다.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카엘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들을 물러나게 만든 카엘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적당히 몸이나 풀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어르신.”
“내가 조언했던 건 잊지 않고 있겠지?”
“네. 결투를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감각을 되살릴 것, 그리고 체력이 남아 있는 한 최대한 상대를 몰아붙일 것!”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슬슬 준비하거라.”
잠시 후, 예정된 시간이 됐다.
넓은 공터 가운데 나와 글라디온이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카엘이 자리를 잡았다.
농장의 식구들과 셀베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각자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응원했다.
“시현 님, 힘내십시오!”
“저 재수 없는 놈을 박살 내버려요, 선배!”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셀베르크 가문 쪽에서도 시끌벅적하게 응원이 이어졌다.
하지만 눈앞의 글라디온에게 모든 의식을 집중한 탓인지, 그 응원의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당신에게 조금 놀랐습니다.”
“……?”
“명예 결투는 피하고, 적당히 마왕성의 힘을 빌려 협상을 시도해 올 줄 알았거든요.”
“…….”
글라디온은 자신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듯, 굉장히 재수 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의 용기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칭찬해 주고 싶지만, 결국에는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적당히 협상했다면 딸기밭 전체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건 결투가 끝나봐야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죠. 희망을 품는 건 자유니까요.”
나는 천천히 검을 꺼내 들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이긴다면 딸기밭은 물론이고, 엘든 마을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겁니다.”
“당신이 저를 이긴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글라디온도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와 글라디온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양쪽의 준비가 끝나자 가운데 서 있던 카엘이 큰 목소리로 선언했다.
“셀베르크 가문의 소영주와 에스테르 임시현의 명예를 건 결투를 시작하겠다. 한쪽이 더는 싸울 수 없거나, 참관인이 승부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할 시 결투는 종료된다. 그럼…….”
카엘이 손을 내리며 신호를 보냈고 그에 맞춰 결투가 시작됐다.
시작 신호에 맞춰 먼저 움직임을 보인 쪽은 바로 나였다.
-타앗!
힘차게 땅을 박차며 상대방에게 검을 휘둘렀다.
-까아앙!!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 소리.
그것을 시작으로 공터에는 계속해서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감각…… 최대한 빨리 감각을 되살려야 해!
카엘이 해줬던 조언에 따라, 며칠 동안 힘겹게 수련하며 갈고닦았던 감각을 되살리는 데에 집중했다. 수련의 효과가 있었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날카로운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초반에 밀어붙이라는 조언에 따라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카엘, 벨리온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고. 평소에 자주 상대해 던 엘프리드 보다도 글라디온의 검은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해볼 만해.
정말로 이길 수 있겠어.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주도권을 놓지 않으며 공세를 계속 이어나갔다.
* * *
결투를 지켜보던 카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흐으음…….’
임시현이 빠르게 실전 감각을 되찾는 것까지는 아주 좋은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카엘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글라디온은 임시현을 상대로 방어적인 움직임만 보였다. 얼핏 보면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공격을 흘려내면서 상대의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이런 전략을 가지고 나올 줄이야…….’
임시현이 글라디온에 비해 약자인 승부였다.
그래서 수련으로 실전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만들고, 상대방이 흐름을 찾기 전에 몰아붙이는 방향으로 조언했다.
그런데 글라디온은 마치 임시현이 전략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상대적 강자의 입장인데도 처음부터 소극적인 자세로 결투에 임했다.
덕분에 임시현의 빠른 공세에도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치밀한 계획으로 명예 결투를 끌어내는 일부터, 완벽하게 상대의 전략을 예상해 결투에 임하는 모습까지.
글라디온의 주도면밀한 모습에 카엘도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반부터 계속됐던 임시현의 공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글라디온은 수비적인 모습을 버리고, 점차 과감한 움직임으로 주도권을 되찾아왔다.
공세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는 글라디온이 주도권을 가지고 공세를 이어나갔고, 임시현이 수비만 이어나갈 뿐이었다.
차이라고 한다면.
여유롭게 수비를 해내던 글라디온의 모습과는 달리, 임시현은 버거운 모습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초반 공세에 많은 체력을 소모한 탓에 수비만으로도 금방 한계에 도달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임시현의 실전 감각과 검술 실력은 최대한 끌어올렸지만, 이렇게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싸움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지켜보는 카엘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쉽지 않겠군…… 아니,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하나.’
여유로운 표정의 글라디온이 공격을 멈추고 임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이만 포기하시죠.”
“허억…… 헉…….”
글라디온도 살짝 숨소리가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임시현은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제가 생각보다 꽤 잘 버티셨습니다. 하지만 승부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헉…… 아직…… 안 끝났어…….”
임시현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결투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글라디온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카엘 쪽을 바라봤다. 참관인인 그에게 판정을 내려달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카엘은 임시현에게 시선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아직 그의 눈동자에는 싸우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카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표정을 굳히고 글라디온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승패를 선언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글라디온은 눈썹 사이의 미간을 좁히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좋습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끝을 내야겠죠. 나중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헉…….”
임시현은 대답할 힘도 아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글라디온의 눈동자에 강렬한 살기가 잠시 맴돌았다. 지금껏 보지 못한 강렬한 기운이 그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카엘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자칫 임시현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
“하아앗!!”
글라디온은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일격이 임시현에게 뻗으려는 순간!
-부우우우우웃!!!!
-부우우우웃!!!
마치 사방에 천둥이 터지는 것 같이 엄청나게 커다란 울음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 * *
아…….
힘들어 죽겠네.
체력은 이미 바닥이고, 계속된 충격에 손목과 팔은 뻐근함을 넘어서 끊어질 것같이 아팠다. 정말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포기할까 하는 약한 마음이 잠시 들다가도.
응원하는 농장 식구들과 수인 마을 사람들, 그리고 딸기를 좋아하는 은율이를 생각하니, 절대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혼자 뭔가를 지껄이던 글라디온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위험한 공격이 덮쳐올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버티자!
입술을 꽉 깨물고 공격에 대비하려던 순간.
-부우우우우웃!!!!
-부우우우웃!!!
야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내 주변으로 반짝이는 요정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우우! 무우우!
-쓰러지면 안 된다, 뾰!
아꿍이…… 규리?
귀여운 아기 야쿰과 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기 힘든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무려 벨리온의 제자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되지. 암!
벨리온 님?!
도대체 어떻게…….
-으음,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저 마족과 싸우고 있더라고.
소녀의 목소리?
-멍청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상대가 다시 공격을 준비하잖아!
벨리온의 호통에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면을 응시했다. 야쿰의 울음소리 때문에 주춤했던 글라디온이 다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제자가 저 재수 없게 생긴 마족 놈한테 쓰러지는 꼴은 못 보지. 준비해라.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지.
저기…… 뭘 준비하라는 건지?
-뭐긴 뭐야? 당연히 필살기지.
죄송한데 저는 필살기 같은 걸 배운 적이…….
-큭큭, 배운 적은 없어도 직접 본 적은 있잖아.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
마왕의 뿔을 잘라내는 벨리온의 기억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기억 속의 벨리온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