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33화
명예 결투(6)
“저 자세는?!”
깜짝 놀란 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글라디온에게 시선을 둔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각들에 집중했다.
사념체 구슬을 통해 얻은 벨리온의 기억인데도,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고 실감 나게 느껴졌다.
마왕을 쓰러뜨린 벨리온의 일격.
그때 벨리온이 취했던 자세, 호흡,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나의 몸이 자연스럽게 벨리온의 움직임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누군가 내 몸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무우우! 무우우!
-힘내라, 뾰!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 야쿰의 울음소리, 그리고 내 주변을 반짝이는 요정의 가루까지.
겨우 검을 들고 있었던 나에게 기적처럼 힘이 샘솟았다. 눈앞의 상대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호흡은 빠르게 안정됐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글라디온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겨났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심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으니, 약간의 불안함과 초조함이 얼굴로 드러났다.
더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글라디온은 자세를 잡으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눈동자에서 승부를 빠르게 결정지으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모든 힘을 검에 집중해라. 뒤는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쏟아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머릿속을 울리는 벨리온의 외침에 따라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위해!
글라디온과 나 사이에 무거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주변의 공간이 단절되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길게 느껴졌던 대치가 끝나고…….
글라디온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나도 땅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더니. 글라디온의 검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의 검도 흐릿해지며 섬광을 일으켰다.
-파앗!!
빠르게 교차하는 두 사람의 공격.
주변에는 잠시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크흑!”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불로 지진 것 같은 화끈한 느낌 뒤에 찌르는듯한 통증이 퍼져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날카로운 통증이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조금이나마 붙잡아줬다.
숙이고 있는 머리 위쪽에서 글라디온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제가…… 이겼습니다.”
“아니!”
곧바로 카엘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
“셀베르크 가의 소영주. 이번 결투는 자네의 패배라네.”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분명히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잖습니까?”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든 대신, 자네는 더욱 소중한 걸 잃은 것 같은데?”
“……헉?!”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글라디온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저 녀석 표정 좀 봐라. 내 속이 다 뚫리는 것 같네.
벨리온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 제자야. 약간 엉성하긴 했어도 꽤 멋진 일격이었어.
제가…… 이긴 건가요?
-물론이지. 네 앞에 그 증거가 떡하니 놓여 있잖아.
살짝 고개를 들어 땅바닥에 떨어진 승리의 증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글라디온의 머리에 있었던 뿔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큭큭, 뿔이 잘린다는 건 마족에게는 목이 잘리는 것보다 치욕적인 일이지. 그러니 결투는 당연히 너의 승리다.
벨리온의 말을 들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게 잘린 뿔을 바라봤다. 방금 내가 했던 마지막 일격도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방금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또 한 명의 마족도 눈앞의 현실에 혼란스러워했다.
“내, 내가 졌다고?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소영주, 설마 결투에서 뿔을 잘려놓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자네의 아버지라 해도 이 결과를 뒤집을 순 없을 거라네.”
카엘은 냉정하게 결투의 승부가 결정됐음을 강조했다.
글라디온은 계속해서 뭔가 잘못됐다고 중얼거리더니, 돌연 옆에 떨어져 있던 검을 쥐어 들고 휘두를 준비를 했다.
“인정 못 해…… 인정 못 한다고!”
“시현 님!”
“선배!”
뒤쪽에서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앞쪽에서 글라디온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머릿속에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울렸지만, 이미 모든 힘을 쏟아낸 나에게 눈앞의 습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쯧쯧…….”
카엘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주변에 아주 살벌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어떤 버러지 새끼가 내 농장의 우수 직원을 건든 거야?”
“커헉?!”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불안함과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끄윽…… 끅, 끅!!”
“소영주님!”
“아∼ 동작 그만! 지금 나한테 잡힌 버러지가 네놈들이 모시는 놈인 것 같은데,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물러터진 누구랑은 달라서 뿔이 아니라 바로 목을 뽑아버릴 거니까.”
카네프의 협박에 셀베르크의 병력이 어쩌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다행히 카네프를 말리려는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만두거라.”
“지독한 영감탱이는 빠져! 감히 내가 농장을 비운 사이에 이런 개수작을 부려?”
“그 요란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시끄러워! 한 번씩 X랄을 해줘야 이놈들이 기어오르지 않지. 오늘 누구를 화나게 했는지 똑똑히 보여주겠어.”
“끄으…….”
카네프의 흉포한 기세에 사슬에 붙잡힌 글라디온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주인의 모습에 셀베르크 가의 인원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네놈이 계속 그렇게 멋대로 군다면. 나는 결과와 관계없이 이 결투를 무효로 할 수밖에 없다. 시현이 어렵게 얻어낸 승리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
화산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카네프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죽어가던 글라디온의 숨소리도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촤르르르륵.
사슬이 거칠게 움직이더니 잡고 있던 글라디온을 휙 던져 버렸다.
“어…… 어? 어엇!”
“자, 잡았습니다!”
“소영주님, 소영주님!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기사들이 재빨리 움직인 덕에 그들의 주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버러지 새끼 데리고 당장 꺼져! 다시 한번 이 근처에서 셀베르크의 문양이 보이면, 그때는 정말로 뿔이 아니라 목을 뽑아버릴 거야.”
카네프는 신경질이 가득한 목소리로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셀베르크가의 사람들은 허겁지겁 축 늘어진 글라디온을 챙겨 언덕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됐지?”
“허허허! 그 못된 성질을 단번에 죽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시현을 아끼는 모양이구나.”
“영감탱이가 노망이 들었나? 아끼긴 뭘 아껴. 그냥 이 녀석 없으면 농장이 안 돌아가니까 그렇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엘프리드와 안드라스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선배! 괜찮아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시현 님. 제가 금방 마왕성에서 가져온 포션을…….”
안드라스는 곧바로 내 어깨 쪽의 옷을 뜯어내고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약간 손만 대도 날카로운 통증 때문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카엘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직접 상처 부위를 살폈다.
“흐음, 다행히 뼈와 신경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구나. 아마 일, 이 주 동안은 좀 고생을 해야 할 거야.”
“끄응…….”
“그래도 정말 수고 많았구나.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해줬어.”
“모두…… 어르신 덕분이죠.”
카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리를 비키고 이번에는 카네프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카네프는 내 상태를 잠시 살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너는 내가 자리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를 치냐?”
“제가 사고를 친 게 아니에요.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건 거지.”
“그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지, 결투는 무슨 결투야? 물러터진 녀석이…….”
“사장님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을 부탁한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나름대로는 열심히 농장을 지킨 거라고요.”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카네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잘했다. 이 녀석아.”
그리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렸다.
적절한 응급처치로 어깨의 심했던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다. 통증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리면서, 쌓여 있던 피로감과 졸음이 쏟아지듯이 몰려들었다.
결국,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농장 건물의 천장이었다.
눈동자만 조금씩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목이 까끌까끌한 느낌에 갈증이 느껴져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어깨 쪽에서 엄청나게 뻐근한 느낌이 몰려왔다.
맞다…….
나 결투를 벌이다가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었었지.
“으으윽…….”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반대편 팔을 이용해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더니,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빠!”
“시현 님!”
은율이와 리아네가 후다닥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침대 곁으로 다가온 은율이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빠…… 괜찮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에 어깨의 통증은 사라지고, 은율이를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오른쪽 팔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응, 괜찮아. 조금 다쳤을 뿐이야.”
“정말……?”
“그럼! 아빠가 왜 은율이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한쪽 팔로 은율이를 침대 위로 올려 껴안아 주었다.
안심을 시켜주려 한 행동이었는데, 오히려 은율이는 내 가슴 쪽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리아네를 바라봤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은율이와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
“저도 은율이가 걱정할까 봐 결투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시현 님이 위험하다면서 불안해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그리고 자기 대신에 시현 님을 도와줄 할아버지를 불러야 한다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집중하기도 했어요.”
“아…….”
리아네의 말에 결투 때 있었던 일이 번뜩 떠올랐다.
-으음,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떤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저 마족과 싸우고 있더라고.
벨리온은 분명 어떤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에게 왔다고 했다.
그때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리아네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소녀가 은율이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은월족의 능력인가?
나는 은율이를 쓰다듬으며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은율이가 아빠한테 벨리온 님을 보내준 거야?”
“훌쩍, 매일 그 할아버지가 아빠를 도와줬잖아. 그래서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어.”
“그랬구나. 고마워, 은율아! 덕분에 아빠가 결투에서 이길 수 있었어.”
고맙다는 말에 은율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아빠가 나쁜 사람을 이긴 거야?”
“응! 다시는 나쁜 사람이 여기에 못 오도록, 아빠가 제대로 혼내줬어.”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결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자랑했다. 그러자 은율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헤헤, 아빠가 이길 줄 알았어.”
“나쁜 사람은 아빠가 혼내줬으니까, 은율이는 하나도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지?”
“응!”
은율이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방긋 웃어 보였다. 결투에 이기고, 이 귀여운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네도 살짝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생 많으셨어요, 시현 님.”
“고마워요, 리아네 씨.”
내 손으로 농장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고 침대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email protected]#!$#?!?!”
“!%@$#?!!”
그러나 곧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말다툼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리아네 씨? 이건 무슨 소리죠?”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카엘 님과 카네프 님이 계속 말싸움을 하셔서…… 안드라스 님이랑 엘린 님이 말리고 계시긴 한데…….”
“에휴…… 리아네 씨, 저 좀 일으켜 주실래요?”
“네? 조금 더 쉬셔야 하는데.”
“제가 안 가면 지금 두 분을 아무도 못 말릴 거 아니에요.”
내 말에 리아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일으켜줬다. 한 손에는 은율이의 손을 잡고, 리아네의 부축을 받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말싸움 중인 카엘과 카네프, 그리고 두 사람을 말리느라 쩔쩔매는 안드라스와 엘프리드.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