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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40)화 (140/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40화

아라크단의 지배자(2)

시리듯 푸른 머릿결과 눈동자, 설산의 눈을 보는듯한 새하얀 피부, 날카롭게 솟아난 두 개의 뿔. 그리고 커다란 지팡이를 한 손에 쥐고 왕좌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설산 아래 고고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왕성을 보는 듯했다.

가녀린 몸이지만 그녀에게서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흘러나왔다. 그 강렬한 존재감은 커다란 알현실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 기세는 알현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야쿰의 신뢰’ 효과가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저항합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저항합니다.]

…….

머릿속에 알림들이 어지럽게 울렸다. 단지 마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경계 신호가 터져 나왔다.

-스윽…….

마왕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그녀의 무감각한 푸른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나를 압박해 오는 기운이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베짱이 생겨난 것인지,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

“…….”

그녀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분명히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순간 몇 시간이 흘러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마왕의 눈동자에 이채가 맴돌았다.

“시현 님! 시현 님!”

옆에 있던 리아네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아네와 안드라스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고 있었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건 나와 카네프 뿐이었다.

정렬해 있던 기사들의 눈초리가 굉장히 사나워져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행히 안드라스가 곧바로 입을 열어 시선을 끌어주었다.

“슈나르페 가문의 장남, ‘안드라스 리드넬 슈나르페’가 영원히 녹지 않는 왕좌의 수호자를 뵙습니다.”

“붉은 비늘 일족, 리아네가 아라크단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정중한 두 사람의 인사 덕분에 알현실의 분위기가 조금 잠잠해졌다. 하지만…….

“오랜만이야.”

이어진 카네프의 황당할 정도로 짧은 인사에 주변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검을 꺼낼 것 같은 험악한 기세를 내뿜었다.

카네프가 만들어준 날카로운 분위기에 인사말을 생각하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버렸다.

“어…… 음, 한국에서 온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설마 진짜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건 아니겠지?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그때.

하늘에서 들리는 것처럼, 높은 왕좌에서 마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위엄이 깃든 그녀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잘 와주었다. 이곳에서 그대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확인할 때마다 직접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내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굉장히 기쁘다.”

성과를 치하하는 말에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반면 카네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달싹거렸다. 아무래도 억지로 말을 참고 있는 듯했다.

마왕은 잠시 카네프를 바라보다가, 안드라스와 리아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드라스, 그리고 리아네. 두 사람은 처음 농장이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생하며 결국 성과를 이뤄냈다. 그대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마왕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 호수처럼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

“…….”

마왕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의 모습을 살폈다. 꼿꼿했던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여가면서까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그녀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이해할 수 없군. 아무리 봐도 그다지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어.”

“……?”

“여기 있는 호위 기사 한 명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마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 야쿰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야.”

마왕은 나를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안드라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호자시여.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의 특별함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강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농장의 야쿰을 안정시키는 일에 그의 능력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겁니다.”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야쿰의 젖을 마왕성에 안정적으로 보내준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은 충분히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마왕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이름이…… 임시현이라고 했던가?”

“네, 맞습니다.”

“괜찮다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야쿰들을 길들였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가 침착하게 대답을 꺼내놓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야쿰들을 길들인 게 아닙니다.”

“그럼……?”

“그들에게 신뢰를 얻었을 뿐입니다.”

“으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나는 처음 마계에 와서 야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이어나갔다.

예쁜이를 만나고.

큰뿔이를 설득하려 막무가내로 달려들기도 하고.

힘들고 위험했던 출산 끝에 아기 삼 남매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아롱이, 다롱이가 새로 식구가 된 이야기까지…….

그간 마계농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짧게 줄여 마왕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놀라운 감정이 생겨났다.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야쿰과 그런 식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거기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대의 행동은 충분히 칭송받을 만하다!”

“감사합니다.”

“……괜히 괴팍한 그의 믿음을 얻어낸 게 아니었어.”

“……?”

마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와 카네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왕성에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기로, 농장에 새로운 야쿰들이 태어났다고 들었다.”

“네, 맞습니다.”

“바쁘지 않을 때는 내가 직접 보고서를 읽어보기도 하는데. 최근 보고서에는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 ‘귀엽다’는 내용으로 가득하더군.”

으윽!

진짜로 마왕님이 내 보고서를 직접 읽으셨다고?!

나는 민망함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머지 농장 식구들 세 사람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야쿰을 귀엽다고 표현하는 그대의 보고서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이계에서 온 그대가 표현을 잘못 사용했다고 오해했을 정도였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성체인 야쿰은 본적이 있지만, 새끼 야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대가 귀엽다고 표현한 그 녀석들을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저…….”

“……?”

“보고 싶으시면 지금 보여드릴까요?”

* * *

이미 농장 식구들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아기 야쿰들의 사진을 정말 많이 찍는다.

그냥 자고 있어도 찍고, 젖을 먹는 모습도 찍고, 뛰어노는 모습도 찍는다.

거기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사진만 찍으려면 이상한 모습만 보여줘, 더 악을 쓰고 예쁜 모습을 찍으려고 했다.

그러다 정말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게 됐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과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는 항상 말 못 할 아쉬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어도 자랑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

흔히 하는 프로필 사진에 올리는 것도 안 되고, 당연히 SNS에도 올릴 수도 없다. 가끔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는 것 정도…….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아기 야쿰의 귀여움을 이해해 주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게 처음 태어났을 때 찍은 사진이에요.”

“오오…….”

“지금은 이렇게 컸는데 제일 큰 아기가 첫째, 작은뿔이에요. 그 옆에는 둘째 얌꿍이, 제일 작은 아기가 아꿍이.”

“다 자란 야쿰과는 달리, 새끼일 때는 이렇게 작은 모습이구나.”

“이건 제가 제일로 아끼는 사진인데.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머리에 빨간 리본을 묶고 찍은 최고로 귀여운 사진을 마왕에게 보여줬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감정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단순히 아기 야쿰의 사진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었는데. 마왕이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가까이서 보기를 원했다.

한 장씩 사진을 보여주다 보니, 수백 장에 달하는 사진을 마왕에게 모두 보여주게 됐다.

“흠흠, 다른 사진은 더 없느냐?”

“이것 말고 동영상도 있는데. 동영상으로 보여드릴까요?”

“동영상?”

“최근에 태어난 아롱이, 다롱이 영상을 보여드릴게요. 잠시만요.”

신나서 동영상을 재생시키는 나.

그리고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는 마왕.

알현실 속 두 사람의 주변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퍼져 나왔다. 반면에 나머지 마족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결국.

참다못한 카네프가 왕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억센 손길로 내 목덜미 부분을 잡아챘다.

“으억!”

“적당히 해라, 이 녀석아! 야쿰 이야기만 나오면 신나서 정신을 못 차리네.”

나는 억센 손아귀에 이끌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카네프의 거침없는 행동에 이번에는 기사들이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다.

마왕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 있던 기사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하자, 원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알현실에는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를 지나. 다시 엄숙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흠흠…… 잠시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아무튼, 그대들이 이뤄낸 성과에 경의를 표하며. 각자의 공로에 걸맞은 상을 내리려 한다.”

마왕의 위엄 넘치는 선언에 카네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방금 귀여운 아기 야쿰 사진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중! 농장의 안정화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고, 꾸준한 꿍유 생산을 달성했으며, 최근에는 ‘딸기’라는 매력적인 과일 재배에도 성공한 임시현! 왕좌 앞으로 나오도록 해라.”

나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섰다.

마왕은 왕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나 사이로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사 한 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계에서 온 인간, 임시현은 다시 예를 표하시오!”

나는 기사의 명에 따라 다시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땅바닥으로 향한 내 시선 끝에 마왕의 옷자락이 보였다.

“비록 이계에서 온 이방인이지만, 그대는 나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혹한의 쐐기마석’ 교역권을 보상으로 주었음에도 이뤄낸 성과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오늘 그대에게 다시 한번 성과에 걸맞은 보상을 내리겠노라.”

그녀의 몸에서 엄청나게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임시현은 준비된 검을 꺼내, 그분에게 바치시오.”

갑자기 검?

잠시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몸은 이미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채앵!

나는 양 손바닥으로 검을 받쳐 들어 마왕에게 바치는 자세를 취했다. 차가운 기운이 내 양손을 감싸더니, 검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왕은 자신의 눈높이까지 떠오른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좋은 검이구나…….”

이윽고 마왕의 주변에 휘몰아치던 차가운 기운이 쉴 새 없이 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우우우우웅!!!

거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검을 감쌌고, 그 중심부에서는 진동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아앗!!!

모든 기운을 받아들인 검이 푸른 섬광과 함께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허공에 있던 검이 천천히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신에 없던 문양이 생겨났다. 바로 마왕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임시현! 아라크단의 수호자로서 그대에게 귀족의 지위를 수여하겠다. 눈앞에 있는 검이 그 징표가 될 것이며, 검에 깃든 문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왕좌’의 명예와 영광이 그대와 함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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