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41화
아라크단의 지배자(3)
귀족…….
내가 귀족?
생각지도 못한 마왕의 선언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이런 상태와는 관계없이 알현실의 상황은 계속 진행됐다.
그 뒤에도 마왕은 몇 마디 말을 더 이어나갔지만, 멍한 정신 상태로 인해서 대부분을 흘려듣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절차가 끝나고 알현실 밖으로 나온 뒤였다.
“축하드립니다, 시현 님.”
“축하해요.”
알현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드라스와 리아네가 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에 대답했다.
“아…… 예, 고맙습니다.”
“대단한 보상을 받게 되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귀족의 지위를 받게 되실 줄 몰랐습니다.”
“저도 뒤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으음…… 일단 좋은 일인 거겠죠?”
지금의 상황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는 어리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마왕님께서 직접 인정한 귀족의 지위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거기다 당대의 마왕님께서 처음으로 내리신 귀족 지위이기에 뜻하는 의미가 아주 큽니다.”
안드라스는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흥분한 표정으로 그 대단함에 관해 설명하려 애썼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네프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앞으로 어지간한 놈들은 허튼 짓거리 못 벌이는 게 중요한 거야. 지난번에 그 멍청한 놈같이 명예 결투를 걸어오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오오. 그건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네요.”
“아마 명예 결투 사건 때문에 마왕성에서도 골머리를 좀 앓았을 거다. 설마 그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올 줄 몰랐을 테니까.”
“저도 카네프 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시현 님에게 귀족 지위를 내린 것은 시현 님이 그만큼 대단한 성과를 내신 것도 있지만, 결투 때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도 있을 겁니다.”
안드라스의 설명을 통해 주어진 귀족 지위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한마디로 나와 농장에 귀찮은 벌레들이 함부로 달라붙지 못하도록 해주는 장치인 것 같았다.
명예 결투 때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을 생각해 보면, 보상의 명목으로 필요한 것을 내려준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알현실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마를렌이 다가왔다.
“마왕님과의 알현이 잘 마무리됐나 보군요. 그리고 시현 님, 좋은 소식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만남을 기다리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그분께 모셔다드릴 테니 따라와 주시지요.”
“잠시만요!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은율이를 먼저 데리러 가고 싶은데. 안될까요?”
“은월족 아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펠린츠 공자님과 먼저 그곳에 가 계시니까요.”
“……?”
“따라오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행은 다시 마를렌의 안내에 따라 마왕성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 *
마를렌을 따라 도착한 곳은 기사와 병사들에 의해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느낌상 마왕을 만났던 알현실보다 훨씬 더 빡빡한 느낌이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가 마를렌에게 다가와 뭔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한 명 한 명 확인하더니, 절도있는 동작과 함께 길을 열어주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기사의 지시를 받아 지키고 있던 문을 열었다. 카네프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문을 통과했고 나머지 일행도 그의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가구들이 가득했고, 곳곳에는 귀여운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 안쪽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공주님 침대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회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 마족이 침대에 기대듯 앉아 있었고, 그녀의 곁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아빠!”
“은율아!”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은율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내가 은율이를 안아 드는 사이 카네프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꼬맹이, 잘 지냈어?”
“숙부님!”
침대 위의 여자가 카네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카네프는 여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히잉……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다 컸다고요.”
“큭큭, 다 컸다는 녀석이 앙탈은.”
카네프의 말과 행동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지만, 눈에서는 따스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안드라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드라스 씨, 저 여자분은……?”
“프레이야 아가씨입니다. 마왕님 쌍둥이 여동생이십니다.”
“마왕님의 쌍둥이 여동생…… 잠깐! 방금 저분이 사장님한테 숙부라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맞습니다. 카네프 님과 프레이야 아가씨는 숙부와 조카 관계입니다.”
친척이라는 사실을 듣고 나니, 두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사장님과 저 여자 마족이 숙부, 조카 관계라면…… 자연스럽게 사장님은 마왕님의 삼촌?!
“흐음…… 그래서 사장님이 알현실에서 그렇게 뻣뻣하게 행동하신 거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카네프 님의 성격이 원래 좀…….”
“…….”
전혀 몰랐던 세 사람의 놀라운 관계에 대해 듣던 중, 카네프와 인사를 마친 여자 마족이 우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드라스 님과 리아네도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프레이야 아가씨.”
“많이 건강해지신 것 같아 보기 좋아요.”
두 사람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여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계에서 온 시현 님 맞으시죠? 엄청 무서운 야쿰들을 길들여서 꿍유를 짜내시는 분!”
“네, 맞습니다. 이계에서 여기로 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임시현입니다.”
“저는 프레이야라고 해요. 이렇게 은인을 직접 만나 뵙게 돼서 정말 기뻐요.”
은인?
나를 왜 은인이라고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품에 안겨 있던 은율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빠가 만든 꿍유 덕분에 저 언니가 건강해졌대. 그래서 아까 나한테도 고맙다면서 맛있는 과자를 잔뜩 줬어.”
발레리안이 거기에 덧붙여 부족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프레이야 아가씨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몸이 굉장히 약해져 계셨습니다. 마땅한 치료약을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야쿰의 젖’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네, 맞습니다. 마왕님께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을 구하기 위해 그 농장을 만드신 겁니다.”
왜 마왕성에서 그렇게 ‘야쿰의 젖’을 만드는 일에 집착하는지, 그 의문에 대한 정답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농장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무서웠어요. 혹시 저 때문에 무리해서 야쿰을 상대하려다 다치시는 분이 나올까 봐…… 그런데 이계에서 온 시현 님이 야쿰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어요. 숙부님이 직접 보내신 보고서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믿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당연한 반응이야. 매일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도 가끔 안 믿기는데…….”
카네프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히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 뒤로 보내주신 꿍유 덕분에 건강을 많이 되찾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시현 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저도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뭘…….”
‘생명의 은인’이라는 거창한 호칭에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이미 자기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듯, 더욱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못 이겨 재빨리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럼 이제 건강은 괜찮아지신 건가요?”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는데,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래요. 완전히 몸이 회복될 때까지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프레이야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말 속에 담긴 슬픔과 아쉬움을 완전히 지워낼 순 없었다.
그런 심정을 잘 안다는 듯. 카네프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다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나중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면 이 답답한 곳을 떠나 어디든 데려다줄 테니까.”
“정말이요?”
“그래. 약속할게.”
“사실은 최근에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거든요.”
“……?”
“숙부님이랑 여기 계신 분들이 일하는 농장에 한번 꼭 가보고 싶어요. 시현 님이 야쿰들을 다루는 모습도 꼭 구경하고 싶어요.”
아주 거창한 꿈인 것처럼 말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에 카네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건강해지기만 하면 아예 농장의 일꾼으로 고용해 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열심히 치료받아.”
프레이야는 카네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프레이야는 차가운 분위기의 마왕과는 달리, 아주 명랑하고 꿈 많은 소녀였다.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프레이야와 함께 편안히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녀가 많은 관심을 가지는 농장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휴대폰으로 야쿰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마왕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쌍둥이 자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레이야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좋지 않은 건강 때문인지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는 프레이야를 뒤로하고, 쫓겨나다시피 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은율이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언니 많이 아픈 거야?”
“…….”
당황하는 나를 대신해서 카네프가 질문에 대답해 줬다.
“아픈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금방 피곤해졌을 뿐이야. 은율이 너도 놀다 보면 금방 피곤해지잖아?”
“그런 거야?”
“그래.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응!”
다행히 은율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카네프도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를렌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뭐?”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당신의 모습은 절대 아이를 달래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시비거는 거야?”
“아뇨, 칭찬해드리는 겁니다. 역시 삐뚤어진 성격은 변하지 않는군요.”
“이 마귀할멈이 진짜…….”
“지, 진성하세요, 카네프 님.”
“아직 마왕성 안입니다. 제발…….”
험악한 기세를 내뿜는 카네프를 안드라스와 발레리안이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마를렌은 그런 카네프의 반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임시현 님. 마왕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요?”
“아직 확정된 내용은 아니지만, 그분께서는 최대한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일을 진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를렌이 건넨 편지를 받아들었다. 안고 있던 은율이를 잠시 리아네에게 맡기고,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오랜 경험으로 편지의 앞부분이 쓸데없이 화려한 인사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대충 본론이 나올 것 같은 부분부터 떠듬떠듬 읽어나갔다.
-이계에서 온 인간 ‘임시현’이 가진 ‘카디스’의 칭호를 이제 귀족의 칭호로 인정한다.
-‘임시현’에게 귀족의 지위가 인정됨에 따라 그에 걸맞은 영지가 내려질 것이며, 영지의 이름은 ‘카디스 영지’로 명명될 것이다.
-영지의 위치는 야쿰 농장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가 될 것이며. 필요에 따라 셀베르크 가문 영지 일부를 카디스 영지로 편입한다.
-‘임시현’은 ‘카디스 영지’의 영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지위는 ‘아라크단의 지배자’의 권한 아래에 그 누구도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편지를 읽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농장 식구들은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 카네프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뭐래? 무슨 내용이길래 그런 표정이야?”
“그게…….”
“……?”
“제가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된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