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42화
사장님이 뿔났다(1)
-쓰윽……. 쓰윽……. 쓱!
커다란 브러쉬로 털을 빗는 소리, 거기에 편안한 숨소리까지 더해져 주변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시원해? 오랜만에 빗질이라 그런지, 기분 좋아 보인다?”
-부우우…….
땅바닥에 배를 깔고 자세를 낮춘 큰뿔이가 살짝 힘 빠진 울음소리를 냈다.
평소의 위압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덩치만 커진 아기 야쿰 느낌이라고나 할까?
평소에는 무리를 지키는 리더로서 완고하고 과격하게 행동할 때가 많지만, 가끔 늘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이 모습이 본래의 모습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무리 무리의 리더라고 해도 힘들고 불편한 일을 하고 싶은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뛰어넘는 책임감으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거겠지.
처음엔 큰뿔이의 커다란 덩치가 두렵게만 느껴졌는데, 녀석의 진짜 성격과 생각을 안 뒤로는 커다란 덩치만큼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아……. 물론 빗질을 해줄 때는 그 덩치 때문에 엄청 힘들다는 단점이…….
“나 마왕성에 다녀오는 동안에 별일 없었어?”
-부우우…….
“대답이 왜 그래?”
-…….
“끄응……. 이 녀석 자기 기분 좋다고 질문에 대답도 안 해주네. 확 그만둬 버릴까 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브러쉬를 움직이는 양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내 질문을 무시한 건 살짝 얄미웠지만, 그만큼 내 빗질이 기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마왕성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으나, 농장에는 딱히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귀족의 지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바쁘게 농장 일을 처리했고. 다른 농장 식구들도 묵묵히 농장에서 각자 할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가끔은 내가 마왕에게 귀족의 지위를 받은 게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주라……. 큰뿔아, 내가 이곳에 영주가 된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부우우?
“내가 이 땅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야.”
-부우…….
걱정 섞인 중얼거림에 큰뿔이는 잠시 관심을 보였다가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야박한 놈!
듣는 척이라도 해주지.
괜히 심술이 나서 빗질에 감정을 담아 꽉꽉 눌러줬다.
하지만 큰뿔이는 오히려 기분이 더 좋은지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한 시간 넘게 계속된 빗질 끝에 큰뿔이의 털 정리가 끝났다.
-부우우우!
녀석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이 쭉 빠지는 노곤함과 끝냈다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스으윽.
큰뿔이는 빗질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얼굴을 들이밀며 나에게 애교를 부렸다.
“어이쿠! 이 녀석아, 저리로 가! 자기 기분 좋다고 대답도 안 해주던 놈이…….”
-부우우.
몸에 힘이 빠져서 큰뿔이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녀석은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칠게 애교를 부린 뒤, 다른 야쿰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큰뿔이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웃으며 바라보다가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건해진 땀을 씻어내기 위해 농장 건물로 향하던 중, 마구간의 청소를 마친 엘프리드와 마주쳤다.
“빗질 다 끝나셨나 보네요, 선배.”
“응. 봤어?”
“네, 산만 한 큰뿔이를 붙잡고 끙끙대시던데요?”
“선배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걸 봤으면, 후배로서 좀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 안 들더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 커다란 야쿰 곁으로 다가가다니……. 으윽!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요.”
엘프리드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이제 아기 야쿰은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하지만, 아직 몸집이 큰 야쿰은 근처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따지고 보면 큰뿔이 근처에 다가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후배의 실감 나는 반응을 재미있게 바라보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카엘 어르신은 잘 도착하셨대?”
“네, 가문에 잘 도착했다고 어제 연락이 왔어요. 선배가 귀족의 지위를 얻은 것도 축하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
“맥주 정말 맛있게 잘 마셨다고…… 카네프 님의 화가 누그러질 때쯤 다시 찾아오시겠데요.”
“아…….”
우리가 마왕성에 간 사이, 엘프리드와 함께 농장을 지켰던 카엘. 그는 우리가 돌아오기 직전에 농장을 떠나 가문으로 돌아갔다.
내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농장 일은 깔끔하게 해뒀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를 남겼다.
“설마 농장에 있는 맥주를 전부 마셔 버리실 줄이야.”
“으윽! 죄송합니다. 저도 말려보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네 잘못이겠어? 마음껏 꺼내 마시라고 했던 내 잘못이지.”
마왕성으로 떠날 때, 나는 카엘에게 미안한 마음에 농장에 보관하고 있던 맥주를 마음껏 꺼내 마시라고 했었다.
카네프가 맥주를 워낙 좋아하던 탓에 꽤 많은 양을 비축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농장에 돌아왔을 때는 맥주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히 카네프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이 망할 영감탱이!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진짜 화가 난 그의 모습에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공포에 질렸다.
카엘의 행동을 막지 못했던 엘프리드도 어찌할 줄 몰라 온몸을 떨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기 전에 내가 나서서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카엘에게 마음껏 맥주를 마시라고 했던 게 나였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잘못을 빌었다.
-…….
카네프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때의 분위기는 진짜로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진심으로 한 대 맞았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지 못했겠지만…….
화를 억누른 카네프는 쌩하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 * *
-똑, 똑, 똑!
“사장님! 식사 준비 다 끝났는데. 안 나오실 거예요?”
-…….
“다른 분들 모두 다 사장님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은율이도 사장님이랑 같이 밥 먹고 싶데요.”
-…….
“제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식사만 하러 나와주세요. 모두 사장님 걱정하고 있어요.”
-…….
오늘도 카네프는 방 안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나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표정을 어둡게 했다.
“오늘도 카네프 님은 안 나오시는 거예요?”
“네……. 아예 대답도 안 하세요.”
걱정스러운 리아네의 물음에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나중에 따로 식사를 챙겨서 방으로 가져가 볼게요.”
“번거롭겠지만 부탁드릴게요, 리아네 씨.”
안드라스도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카네프 님께서 이번에 제대로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조금 괴팍하시긴 해도, 이렇게 꿍해 계실 성격은 아닌데…….”
“맥주가 모두 없어져 버린 게 생각보다 충격이 크셨나 봐요.”
“원래 맥주를 좋아하시기도 했고. 특히 시현 님이 가져온 것들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까요.”
이번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나와 엘프리드는 불편한 마음에 고개를 떨궜다.
“아빠…….”
“응?”
“사장님이 많이 화난 거야?”
“으응. 아빠가 어르신한테 맥주를 마시게 해드려서 사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나 봐.”
내 대답에 은율이는 뭔가를 고민하더니, 의자에서 내려와 주방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푸딩 간식을 가져왔다.
“내가 아껴놨던 제일 맛있는 푸딩이야. 이걸 사장님한테 가져다주면 화가 풀리지 않을까?”
은율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푸딩을 건넸다.
제일 좋아하는 푸딩을 포기하려는 기특한 마음씨에 미소가 지어졌다.
“알았어. 나중에 사장님한테 한번 드려볼게. 그러니까 은율이는 더 걱정하지 말고 더 식기 전에 밥 먹자.”
“응.”
나는 은율이를 안심시켜 주며 식사를 챙겨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카네프가 없는 점심 식사가 끝난 뒤.
리아네와 은율이는 빨래를 널기 위해 집 밖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나와 안드라스, 엘프리드가 남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떻게 하면 사장님의 화를 풀어드릴 수 있을까요?”
“으음……. 선배가 새로 가져온 맥주도 안 드시는 거죠?”
“응. 그렇게 화내신 다음 날 바로 가져와 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으셨어.”
저쪽 세계에서 한가득 맥주를 사서 농장에 채워 넣었으나, 카네프는 방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식도 일부러 카네프가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어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안드라스 씨, 뭔가 사장님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이 없을까요? 여기서 사장님이랑 가장 오래 알고 지내셨잖아요?”
“글쎄요. 그냥 화를 내시는 경우는 많아도, 이렇게 틀어박히시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서…… 저도 생각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안드라스도 쓸 만한 방법을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세 사람은 계속 끙끙대며 머리를 맞댔다.
이런저런 의견을 내던 중, 엘프리드가 아주 단순한 해결 방법을 이야기했다.
“맥주 때문에 화가 나신 거니까. 결국, 맥주로 풀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맥주를 잔뜩 사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었잖아.”
“평소에 마시던 맥주 말고. 뭔가 특별한 맥주를 준비해 보는 거예요.”
“특별한 맥주?”
흐음…….
정성을 담아 수제 맥주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나…….
엘프리드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드라스가 뭔가를 생각해 내고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겁니다.”
“……?”
“……?”
“예전에 카네프 님께서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던 맥주가 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조금 흐릿하지만, 굉장히 기분이 안 좋으셨는데 맥주를 마시고 웃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오!”
“안드라스 씨, 도대체 어떤 맥주였는데요?”
“으으……. 아마 벌꿀 맥주였던 것 같습니다.”
벌꿀 맥주?
나와 엘프리드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맥주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맥주도 있나요?”
“분명 벌꿀 맥주라고 했습니다. 귀하게 구한 술이라 저는 마셔보지는 못하고, 카네프 님과 몇몇 분들이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된 것 아닌가요? 당장 벌꿀 맥주를 구해보죠.”
엘프리드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드라스는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벌꿀 자체가 워낙 귀한 재료인 데다가. 그걸 가지고 술로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아주 적은 양의 벌꿀 맥주를 귀하게 받아 왔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요?”
“저도 나름대로 노력은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드라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뭔가 실마리가 보이던 일이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수제 맥주라도 만들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