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48화
바르바토스의 의뢰(3)
귓가에 울리는 속삭임.
나는 일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에 있던 은율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조금 전의 속삭임은 은율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속삭임이 들려왔다.
-추워…….
-추워…….
속삭임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속삭임이 들려온 곳을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시선이 그리핀의 알 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거둬들였던 손을 다시 알 표면에 갖다 댔다. 그러자 희미했던 속삭임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추워…… 추워!
-추워…….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알들의 애처로운 속삭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차원적이긴 하지만, 일단 급한 대로 알들을 안아 들어 품 안에 넣고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최대한 온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몸을 밀착시켰다.
은율이는 내 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으응, 이 알들이 춥다고 그래서 안아주는 중이야.”
“정말? 그럼 나도 안아줄래!”
은율이는 팔을 활짝 벌려 두 개의 알을 껴안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알의 크기가 워낙 커서, 작은 여우 소녀의 몸으로는 겨우 알의 한쪽만 품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와 은율이의 노력 덕분인지, 알에서 들려오던 춥다는 속삭임이 점차 줄어들었다. 알을 감싸 안기 위해 낑낑대던 은율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알들은 괜찮은 거야?”
“응, 이제는 별로 안 추운가 봐.”
“헤헤, 다행이다.”
은율이는 배시시 웃으며 알들을 손으로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나와 은율이는 계속 온기를 나눠주기 위해 알을 껴안고 있었다.
…….
…….
으음, 그런데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알을 껴안는 일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편안히 앉아 알을 품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오늘도 농장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은율이도 의욕적이던 처음과는 달리 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작은 몸집으로 알들을 감싸 안으려 했으니, 아마도 나만큼 편안하지는 못했을 거다.
“은율아, 힘들면 조금만 쉬어도 돼.”
나는 힘들어하는 은율이를 쉬도록 해주고, 두 개의 알을 잠시 품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런데…….
-추워…… 추워!
-추워…… 안아줘!
“……?”
두 개의 알에서 곧바로 춥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다시 알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알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꼼짝없이 그리핀의 알에 붙잡힌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은율아. 밑에 내려가서 여기 도움이 좀 필요하다고, 다른 농장 식구들 좀 불러줄래?”
* * *
“그러니까 이 그리핀의 알들이 추워해서 품고 있는 걸 그만두실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예.”
“허허…… 이래서야 다른 일은 전혀 할 수도 없겠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안드라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함께 상황을 전해 들은 리아네가 그리핀의 알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시현 님, 힘드시면 제가 이 알들을 안아봐도 될까요?”
“그래 보실래요?”
나는 안고 있던 알들을 침대 위에 놓고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리아네는 내가 있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알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가 품자마자 알들에서 곧바로 반응이 흘러나왔다.
-싫어! 싫어!
-저리 가!
“리아네 씨, 죄송한데 그냥 나오셔야겠는데요.”
“예?”
“알들이 너무 싫어해서…….”
리아네는 내 말에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침울해진 표정으로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실망한 그녀의 모습에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드라스는 뭔가를 생각해냈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금방 네모난 모양의 아티팩트를 완성해왔다.
“이건 간단한 원리로 만든 주변에 열을 내뿜는 아티팩트입니다. 모양은 좀 허술해 보여도 열을 조절하는 기능도 있으니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한 안드라스는 아티팩트를 알들 가까이 놓고 작동시켰다. 그가 말했던 대로 아티팩트 주변으로 온기가 흘러나와 알들을 감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알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못했다.
-싫어…… 안아줘…….
-안아줘…….
“안드라스 씨, 죄송하지만 이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끄응…… 그렇습니까?”
안드라스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티팩트를 거둬들였다.
그 뒤로 그리핀의 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이어졌다.
농장 식구들이 차례로 알들을 안아보기도 하고, 편안한 쿠션으로 품에 안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나도록 해주기도 했다.
약간의 반응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결국에 그리핀의 알들이 만족할 만한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내가 알들을 끌어안자, 그제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편안한 반응을 보였다.
이 모습을 본 카네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아무래도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제대로 적임자를 찾은 것 같은데? 당분간 고생 좀 해야겠어.”
“시현 님의 능력은 매번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군요.”
“그러게요. 아직 알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들도 시현 님을 따를 정도라니…….”
“선배는 마수들에게 완전 마성의 남자네요.”
“우웅? 마성의 남자가 무슨 뜻이야?”
농장 식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던지며 나의 신비한 능력에 감탄을 표했다.
반면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커다란 그리핀 알들을 내려다봤다.
“끄응…… 이러면 어떻게 하죠? 이렇게 계속 얘네들을 안고 있으면 농장일을 할 수가 없는데…….”
내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자 안드라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으음, 시현 님이 조금 고생스럽겠지만, 일단 단순한 방법으로 대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 * *
나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그리핀의 알들을 위해, 안드라스가 제시한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그리핀 알 전용 가방을 만들어 내가 등에 메고 다니는 것.
아주 단순한 해결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알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고, 녀석들의 편안한 상태도 계속 유지됐다.
문제는 내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달걀보다 몇십 배는 더 큰 그리핀의 알, 그것도 두 개씩이나 등에 달고 일상생활을 하려고 하니 굉장한 고역이었다.
흔히 ‘내가 너를 업어 키웠어!’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실제로 내가 직접 그리핀의 알을 업어 키우게 될 줄이야…….
나중에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보내준 그리핀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암컷 그리핀이 알을 낳으면 부부가 번갈아 가며 알의 곁을 지킨다고 한다.
한 명이 알을 지키면 나머지는 대신 사냥을 해오는 협력을 유지하는데, 사냥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알을 지키는 그리핀은 일주일 넘게 굶는 일도 있다고…….
인간, 야쿰, 그리핀 할 것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힘들게 그리핀의 알을 돌보는 사이.
나에게 알을 맡긴 베베토는 본격적으로 농장에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축사의 확장이었다.
건물의 구조도 간단하고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 가장 어렵지 않은 공사였다. 문제는 그 주변을 지키고 있는 야쿰들이었다.
처음 보는 수많은 마족이 축사 근처에서 소란스럽게 건축 작업을 하니, 야쿰 입장에서는 당연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큰뿔이가 일꾼들에게 적대적인 기세를 내뿜는 바람에 일하던 마족 몇 명이 도망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내가 나서서 불안해하는 야쿰들을 달래주었고, 다행히 축사 확장 공사는 큰 문제 없이 끝낼 수 있었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확장 공사가 끝나고 난 뒤, 나를 바라보는 베베토와 일꾼들의 눈빛에 존경심이 생겨난 것 정도?
다음으로 진행된 공사는 딸기밭 시설 확장과 딸기잼 공방 건설이었다.
카네프가 중간에 맥주 양조장을 만들어야 한다며 억지를 부리기도 했지만, 아주 당연하게 무시됐다.
딸기잼 공방 건설은 아무래도 축사 확장보다 어려운 공사였다. 딸기잼 생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복잡한 기계 장치도 설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공사 환경은 훨씬 좋았다.
엘든 마을 사람들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딸기잼 공방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공사 현장에 찾아와 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수인들은 무거운 건설 자재를 손수 날라주기도 하고, 일꾼들의 식사와 새참을 챙겨주기도 했다.
일꾼 중 몇몇 마족들은 처음에 이런 수인들의 도움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공사 일정이 계속될수록 그들의 호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일꾼들에게는 큰뿔이 옆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수인들과 함께 일하는 게 더 행복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바르바토스 가문의 일꾼들과 수인, 그리고 안드라스까지 딸기잼 공방에 노력을 쏟은 결과. 우리는 놀랄 만큼 멋진 딸기잼 공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딸기잼 공방이 완성되는 날.
함께 고생한 베베토와 일꾼들, 엘든 마을 사람, 그리고 농장 식구들까지 함께 모여 축하의 잔치를 벌였다.
황금시계 상단의 에르긴이 잔치에 필요한 음식 재료와 술을 넉넉히 보내준 덕에 모두가 풍족한 잔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리핀의 알을 맡은 지 몇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이른 아침.
나는 새롭게 확장된 축사로 들어갔다. 이미 깨어나 있던 아롱이, 다롱이가 나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무우우!
-무우우!
“아롱아, 다롱아! 잘 잤어?”
내 품에 안기며 애교를 부리는 두 녀석을 흐뭇 지었다. 쑥쑥 자란 두 자매에게서 어느덧 묵직함이 느껴졌다.
자매의 엄마인 초롱이는 아직도 잠을 자는 중이었다. 아침잠이 별로 없었던 예쁜이와 다르게 초롱이는 이렇게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가 또 늦잠을 자네. 너희들 배고파서 어떻게 하니?”
-무우우?
-무우. 무우.
자고 있는 초롱이에게서 억지로 젖을 짤 수 없어서, 아이들에게 젖을 주는 일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다시 축사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농장 건물의 2층으로 향했다. 내방 침대에는 은율이가 그리핀의 알들을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항상 편하게 자도 된다고 말해줘도, 은율이는 이렇게 알들을 소중하게 껴안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부모를 잃고 힘들었던 일 때문에 이 알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안쓰러움과 기특함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은율이의 이마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잠시 후, 은율이에게서 그리핀의 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핀의 알들은 처음 베베토가 가져다줬을 때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알들을 업고 다니느라 힘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애착이 생겨서 그런지 알들의 모습에 더 눈이 갔다.
손을 뻗어 알의 맨들맨들한 감촉을 즐기려는 순간.
안쪽에서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