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1화
부화(3)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왔다는 남자 마족.
그는 대뜸 우리에게 새끼 그리핀들을 데려가겠다는 선언을 해왔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잠시 맡겨두었던 그리핀 새끼들을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그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내가 먼저 할 말을 잃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카네프가 대신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이, 네가 이름이 뭐라고?”
“저는 ‘로에딘 바르바토스’입니다.”
“가운데 이름이 없는 걸 봐서는 직계는 아니고. 그런데 저렇게 목이 뻣뻣한 걸 보니 본가에 소속된 놈인가 보네?”
“…….”
스스로를 ‘로에딘’이라 소개한 남자 마족은 카네프의 말에 침묵하며 긍정의 뜻을 밝혔다.
“나는 시현이 너희 가문에 꽤 좋은 일을 해줬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새끼 그리핀들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좀 무례한 행동 아닌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문에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조금만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뭔데? 무슨 문제길래 이렇게 급하게 저 녀석들을 데려가겠다는 거야?”
“가문의 일입니다. 외부인에게 내부 사정을 쉽게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참나…….”
로에딘은 가문 내부의 사정이라며 자세한 설명을 거부했다. 자신들에게 편한 변명을 가져다 대는 모습에 카네프는 노골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카네프의 뒤를 이어 안드라스가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아무리 가문 내부의 일이지만, 시현 님은 바르바토스 가문의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새끼 그리핀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외부인에게 가문의 일을 함부로 밝힐 수 없습니다. 대신 사죄의 의미로 추가적인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
로에딘은 한마디로 적당히 먹고 떨어지라는 듯한 태도로 우리에게 말했다.
완전히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에 차분함을 유지하던 안드라스의 표정이 일그러졌음은 물론이고, 리아네와 엘프리드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런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새끼 그리핀들의 주인은 바르바토스 가문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와 피니를 데려가는 건 막지 않을게요. 갑자기 보호자와 환경이 변하면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일 수 있도록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죄송합니다. 저는 곧바로 새끼 그리핀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뒤에 일은 바르바토스 가문에 맡기시지요.”
“…….”
부탁하는 태도로 제안을 해봤지만, 로에딘은 완곡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한창 민감한 시기인 새끼 그리핀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가문의 상징을 되살리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아무런 조심성 없이 새끼 그리핀들을 데려간다고?
그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던 화가 조금씩 가라앉고, 어느새 새끼 그리핀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리와 피니가 다른 곳에서 최대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건들을 챙길게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선심을 쓰듯 말하는 로에딘의 태도에 농장 식구들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종일관 냉정한 모습의 로에딘도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급하게 새끼 그리핀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보금자리에 사용하던 커다란 이불과 푹신한 쿠션, 한동안 넉넉하게 먹을 수 있도록 꿍유도 몇 병 챙겼다.
그리와 피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어느새 두 손 한가득 짐이 생겨났다.
“이건 아이들 먹일 때 사용하던 숟가락이에요. 여기에 적응했을 테니 여기에 이 꿍유를 조금씩 담아주면 돼고, 꿍유는 체온보다 조금 더 뜨겁게 데워서 식혀주면 돼요. 그리고 이 쿠션은......”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하며 알아낸 사소한 것이라도 전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대충 알겠습니다. 저희 가문에도 그리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렇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대충대충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전부 그리와 피니가 적응하는 데 필요한 것들인데…….
로에딘의 행동에 화가 나기보단.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적응에 더 고생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애가 타는 내 모습에 결국 참다못한 카네프가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나섰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카네프가 만들어낸 사슬은 로에딘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수행원들까지 순식간에 속박해 버렸다.
“으윽……?”
“야! 바르바토스에서 온 놈…….”
흉흉한 살기를 담은 압박에 로에딘은 냉정한 표정을 깨뜨리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방금 시현이 한 말 그대로 다시 말해봐.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네놈 살가죽에 직접 새겨서 바르바토스 정문 앞에 던져줄 테니까.”
“그…… 그게…… 제가 기억력이 좀 안 좋아서…….”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카네프의 입가에는 더욱 사악한 미소가 걸릴 뿐이었다.
“그래? 그러면 더더욱 잘 새겨놔야겠네. 안드라스! 당장 작업용 칼 하나만 꺼내. 오랜만에 글솜씨 자랑 좀 해볼까?”
“날이 큰 거로 꺼내드립니까? 아니면 작은 거로 꺼내드립니까?”
“기억력이 안 좋다고 하니. 많이 새기려면 작게 써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안드라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작은 날을 가진 작업용 칼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피 때문에 주변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저는 수건 가져올게요.”
엘프리드는 수건을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네는 옆에 있던 은율이의 눈과 귀를 가리며 품에 꼭 껴안았다.
착착 손발이 맞는 농장 식구들의 행동에 로에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억지로 쥐어짜 내듯 목소리를 냈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 가문을 대표해서 이곳에…….”
“시끄럽고, 빨리 시현이 말했던 내용 그대로 말해봐. 틀린 부분이 나올 때마다 내가 직접 몸에 새겨줄 테니까.”
“흐으윽?!”
“에휴…… 그만두세요. 그쯤 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알아듣긴 뭘 알아들어. 방금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기억력이 안 좋다잖아?”
“한 번 더 말씀해 드리면 충분히 외우실 거에요. 그렇죠?”
“마, 맞습니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전부 외울 수 있습니다.”
“……쳇!”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카네프의 사슬이 다시 사라지고, 풀려난 로에딘과 그의 수행원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씀드릴 테니까 잘 기억해 주세요.”
“넵. 경청하겠습니다.”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카네프의 도움으로 새끼 그리핀들을 위한 정보들을 로에딘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그리와 피니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두 녀석은 오랜만에 바깥 구경에 신나서 울음소리를 냈다.
로에딘이 가져온 나무 상자에 평소 사용하던 쿠션과 수건을 깔아주고, 조심스럽게 그리와 피니를 올려주었다.
-삐이익?
-삐익! 삐익!
새끼 그리핀들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나를 바라보며 다급한 울음소리를 냈다. 불안해하는 둘의 눈동자를 쳐다보기 괴로울 정도였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끼 그리핀은 앞으로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잘 보살피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가문의 일이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로 가문의 일이 바쁜 것인지, 아니면 카네프가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로에딘과 그의 수행원들은 황급히 새끼 그리핀과 짐을 챙겨 들고 농장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농장 건물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 그리와 피니의 불안한 울음소리가 계속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빠…… 정말 그리랑 피니 가버리는 거야?”
“…….”
“히잉…… 이제 겨우 친해졌는데…… 조금만 더 크면 밖에서 같이 놀고 싶었는데…….”
은율이의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안쓰러운 마음에 꼬옥 껴안아서 달래주려 했다.
하지만 서러운 마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은율이는 내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은율이의 울음소리가 농장에 울려 퍼졌다.
리아네는 눈이 빨개져서 은율이의 등을 쓰다듬었고, 엘프리드도 그 곁을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드라스는 상대적으로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다. 바르바토스 가문의 사람들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며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젠장! 그 녀석들을 이렇게 쉽게 보내주는 게 아니었는데…….”
카네프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은율이를 바라볼 때는 얼굴에 안타까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언젠가 새끼 그리핀들이 떠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찍 떠났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 정을 줬나보다.
솜털 인형 같던 녀석들의 흔적을 지워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 * *
새끼 그리핀.
그리와 피니가 떠나가고 며칠이 지났다.
농장은 금방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새끼 그리핀과 지냈던 시간이 짧았던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농장 식구들과 달리 은율이는 아직도 침울한 상태였다. 농장도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알게 모르게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약간 멍한 느낌으로 일을 하고 있던 도중, 주위를 맴도는 날갯짓 소리에 정신을 차리렷다.
-부우우웅!!
“아∼! 달콩이구나!”
꿀벌 한 마리가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내 손바닥 위에 착! 내려앉았다.
달콩이는 통통한 꿀벌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손바닥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달콩이의 귀여운 인사에 메말랐던 얼굴에 미소가 살짝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깨 쪽에서 또 다른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기분 좋은 향기에 금방 정체를 눈치챘다.
“규리도 왔구나?”
「오랜만이다, 뾰!」
“그러게…… 둘 다 어쩐 일로 이렇게 동시에 찾아왔어?”
내 물음에 규리는 약간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멍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어서, 너무 걱정돼서 찾아왔다, 뾰!」
-부우우웅!
아무래도 규리와 달콩이 모두 나의 상태가 이상해 보여서 찾아온 것 같았다. 괜히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정말이야, 뾰?」
“응, 정말이지.”
「은율이도 기운이 없어서 걱정된다, 뾰! 요즘에는 밖에 잘 나오지도 않는다, 뾰!」
“규리가 계속 은율이한테 말을 걸어줘. 그럼 금방 힘을 내서 신나게 놀 수 있을 거야.”
「알았다, 뾰! 내가 은율이를 힘내게 만들어 줄거다, 뾰!」
-부우웅! 부우웅!
착한 달콩이도 날개짓으로 규리에게 응원을 보냈다. 오랜만에 미소를 짓게 해준 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한 번씩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달콩이의 엉덩이와 등부분의 털을 쓰다듬다가, 문득 뽀송뽀송했던 새끼 그리핀들의 털이 떠올랐다.
둘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니까,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그리와 피니를 떠올리고 있던 그때.
멀리서 안드라스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깜짝 놀란 달콩이와 규리가 휙 날아올라서 금방 모습을 감췄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드라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이요? 그리랑 피니는 잘 지내고 있데요?”
“그게…… 아무래도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급히 시현 님을 모셔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불길함에 규리와 달콩이가 선물해 준 미소가 다시 흐려졌다.
차라리 계속 무소식이었다면 좋았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