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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3)화 (153/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3화

그리핀과 후계자(2)

머리가 희끗희끗한 귀부인이 방문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등장에 로에딘과 병사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부인 마님…….”

잠시 방 안을 둘러본 귀부인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에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손님으로 온 자들이 멋대로 행동하려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통제하려던 중이었습니다.”

로에딘의 변명에 그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 판단은 누가 내리는 거죠? 로에딘, 당신이 판단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가문 내에서 그대의 직책이 그만한 권리를 가지고 있던가요? 가문에 손님으로 온 자들을 멋대로 억압하고 위협할 만한 권리 말이에요.”

“…….”

귀부인의 말에 로에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병사들도 슬금슬금 무기 손잡이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당장 병사들과 함께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이 따르는 주인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녀의 서슬 퍼런 경고에 로에딘과 병사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귀부인에게 간단한 인사만 남긴 채, 쏜살같이 이곳을 빠져나갔다.

로에딘 무리가 모습을 감추고 난 뒤, 귀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잠시 손님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예, 대부인 마님.”

“예, 대부인 마님.”

원래 방 안에 있었던 사용인들과 귀부인을 수행하던 이들은 썰물 빠지듯 방 밖으로 나섰다.

우리 옆에 있던 베베토는 몸을 움찔거리며 자신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고민을 눈치챈 귀부인에게 손짓으로 남아 있으라는 신호를 받고 나서야 베베토는 떨리던 몸을 진정시켰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방안을 가득 메웠던 살 떨리는 긴장감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잠시 우리를 살피던 귀부인은 굳어있던 얼굴을 풀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바로 전에 로에딘을 내쫓던 냉랭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금방 주변으로 퍼져 나왔다.

화려한 드레스나 장식품을 두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자연스럽게 귀족의 품격이 느껴졌다.

미소를 지을 때 도드라지는 잔주름들이 그녀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더 배가시켰다. 곱게 늙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귀부인이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바르바투스 가문의 다이애나라고 해요. 가문의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것 같아 면목이 없네요.”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밝힌 그녀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사죄하며 고개를 숙였다.

딱 봐도 신분이 낮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진심 어린 사죄에 나와 엘프리드는 당황해서 몸이 얼어붙었다.

그나마 경험이 많은 안드라스가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서 대응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뻔했지만, 대부인께서 적절히 대처해 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사죄는 대부인께서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드라스는 로에딘이 벌인 일과 대부인을 딱 잘라 구분하면서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했다. 대부인도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조용히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베베토, 제가 아직 손님들의 소개를 받지 못했는데…… 수고를 해주시겠어요?”

“무, 물론입니다. 대부인 마님!”

베베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제르무어 마법사단의 부단장 직책을 맡고 있는 슈나르페 가문의 안드라스 님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대부인.”

“저도 반가워요. 예전에 마왕성에서 행사가 있었을 때 만난 적이 있었죠?”

“예, 아버님과 함께 인사를 드렸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호호호, 안드라스 님도 그때보다 레이디를 상대하는 기술이 많이 느셨네요.”

그 뒤에는 엘프리드와도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둘 다 5대 귀족 가문 출신이어서 그런지, 다이애나 대부인과 약간은 친분이 있는 듯했다.

아주 가끔 소식을 듣는 먼 친척을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을 지나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분은 마왕님께 에스테르 지위와 최근에는 귀족의 지위까지 인정받으신 임시현 님이십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최대한 무난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그 유명한 ‘카디스 딸기잼’도 시현 님이 만드신 거죠?”

“예. 최근에 딸기잼 공방을 만들어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어렵게 한 통을 구해서 맛봤는데 너무 맛있었답니다. 금방 다 먹어버려서 아쉬울 정도로요. 혹시 ‘카디스 딸기잼’은 언제 또 얻을 수 있을까요?”

“일반 딸기잼이랑 달리 많은 수량을 만들 수 없어서, 아마 조금은 더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아아…… 그건 굉장히 아쉬운 이야기네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에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손님들을 너무 세워뒀었군요. 이리로 오세요! 우리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더 나누도록 해요.”

그녀는 우리를 손수 안내하며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끌었다. 일행 모두가 따라가던 도중, 나는 불쑥 자리에 멈춰 서서 외쳤다.

“저기! 잠시만요!”

모두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몰려들었다. 다이애나 대부인이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시현 님?”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한데…… 이 아이들 밥을 먼저 챙겨주고 싶은데요.”

* * *

-꿀꺽, 꿀꺽!

-삐이익. 삐이익.

그리와 피니는 내가 주는 꿍유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조금이나마 기력을 되찾았는지 전보다 울음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물론 잠시 기력을 되찾은 것일 뿐이지, 아직 두 새끼 그리핀의 상태는 굉장히 좋지 않았다.

배를 채운 두 새끼 그리핀은 내 품 안에서 금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까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 같았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 그리와 피니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감싸줬다.

새끼 그리핀들이 편안히 잠드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르바토스 가문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나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시현 님이 오자마자 이렇게 금방 상태가 좋아지다니!”

“상태가 좋아진 게 아니에요! 그전에 아이들의 상태가 너무 최악이라서 조금 기운을 회복한 게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아까 쌓아뒀던 감정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해 버렸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순간 나도 아차! 싶었지만, 일부러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솔직히 아이들을 봤을 때 느꼈던 참담한 심정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안드라스와 베베토가 중간에 나서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찰나, 대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끼 그리핀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시현 님이 계신 농장에서 데려올 때만 해도 정말 건강한 아이들이었는데…….”

“단순히 적응의 문제로 이렇게까지 허약해질 리가 없어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이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인 만큼, 나는 강경한 태도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진실을 요구했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대, 대부인 마님?!”

베베토가 화들짝 놀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시현 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제대로 우리의 사정을 설명해야 해요.”

“하지만 그…… 가문의 체면과 위상이…….”

“거짓으로 유지해야 할 체면과 위상보다는, 정말로 가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의 신뢰가 더 중요해요. 죽은 제 남편도 아마 이렇게 했을 거예요.”

“끄으응…… 대부인 마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베베토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끝까지 들어주세요. 이건 새끼 그리핀들뿐만 아니라 바르바토스 가문에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끝까지 경청하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녀의 남편, 그러니까 전대 가주로부터 시작됐다.

전대 가주와 다이애나 대부인 사이에서는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는데. 전대 가주는 둘째 아들의 재능과 인품을 높게 평가해 일찍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워낙 전대 가주의 권력이 막강했던 터라, 후계자 선정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쉽사리 의견을 내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가주의 자리는 가문의 둘째 아들이 이어나가게 됐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둘째 아들에게는 가주 자리에 오르기 전 결혼했던 한 부인이 있었다. 워낙 부부 사이가 좋아 금방 가문의 후대가 태어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심지어 어렵게 자리를 잡았던 아이가 유산돼 버리는 일이 생겨 버렸다.

여파로 건강이 나빠진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부부 사이가 너무 좋았던 둘째 아들은 부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게 됐다.

결국.

억지로 가주의 역할을 이어나가던 둘째 아들도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았다.

가문의 주인이 쓰러지자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둘째 아들은 후계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후계자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인 상태였다.

이 틈을 노린 가주의 형제들이 각자의 자식들을 가문의 후계자로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각자 지지하는 세력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분쟁을 일으켰다.

다이애나 대부인이 어떻게든 싸움을 중재해 보려 애썼으나, 이미 장성한 자식들의 싸움을 늙은 어머니가 말릴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한, 어찌 보면 지루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 싸움 이야기…….

그리고 드디어 새끼 그리핀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후계자에 대한 신경전이 끊이질 않고 있던 와중, 우연히 사냥꾼들이 그리핀의 알을 발견하고 이곳에 가져왔어요. 과거 가문의 상징이었던 그리핀을 키워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모두가 후계자 쟁탈에 신경을 쓰고 있던 탓에 그리핀의 알은 금방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지요.”

나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음…… 그래서 이 녀석들이 농장으로…….”

“맞아요. 솔직히 시현 님에게 알들을 맡길 때만 해도 아무도 부화에 성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안드라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시현 님이 알들의 부화에 성공해 버린 거군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핀이 성공적으로 부화했다는 소식은 금방 가문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가문의 상징이 돌아왔다는 기쁨보다는, 새끼 그리핀의 탄생이 어떻게 후계자 싸움에 이용될지에 대한 관심뿐이었지요.”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잠든 새끼 그리핀들을 내려다봤다.

“억지로 끌려온 저 아이들을 가문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후계자 선정에 쓰일 도구로 취급당하기 시작했어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금방 지쳐갔고요”

“어떻게 그런…….”

나는 분노와 어이없음을 동시에 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렇게 연약한 녀석들을 도구 취급하다니!

모든 일을 자세히 설명해 준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절박해진 표정으로 부탁했다.

“바르바토스 가문에 실망하신 시현 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염치없지만 조금만 더 도움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 아이들을 후계자 선정의 도구로 사용하실 생각이라면, 죄송하지만 절대 도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지금 쓰러져있는 바르바토스 가주, 제 둘째 아들에 대한 거예요.”

“……?”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에 대한 부탁이라고?

나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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