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4화
그리핀과 후계자(3)
“바르바토스…… 가주 님에 대한 부탁이요?”
“네, 지금 쓰러져 있는 제 둘째 아들에 대한 거예요.”
나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이야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품 안에 있는 새끼 그리핀에 대한 부탁이라면 몰라도, 갑자기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드라스가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정리하려 했다.
“대부인께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님의 회복을 돕는 일이라면 굳이 시현 님에게 부탁하실 이유가…….”
“아니에요! 제 말이 억지처럼 들리겠지만, 제 둘째 아들을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지금 시현 님뿐이에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단호하게 외쳤다.
그 물기 어린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해서 듣고 있던 모두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는 잠시 격해졌던 감정을 금방 추스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대부인.”
안드라스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의 배려 넘치는 행동에 다이애나 대부인은 살짝 놀라더니 잠시나마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레이디를 대하는 기술이 많이 느셨군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아니겠습니까?”
안드라스는 여유로운 분위기로 대답했다. 대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더 진해졌다. 덕분에 살짝 답답했던 분위기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받은 손수건으로 잠시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 부탁을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실 거에요. 전문 치료사도 아닌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지만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우리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바르바토스 가문은 대대로 불치병을 가지고 있어요. 마신을 모셨다고 알려진 초대 가주님부터 이어진 증상이에요.”
“…….”
“이 불치병이 발병하면 원인 모를 발작증상이나 신체 능력의 하락, 심하면 전신 마비까지 이어져요. 무엇보다 마력을 아예 다룰 수 없게 돼서 어떠한 마법도 쓸 수 없어지죠.”
다이애나 대부인이 불치병에 대한 증상을 늘어놓을수록 점점 내 표정이 오묘해졌다.
으음?
왠지 낯설지 않은 증상들인데…… 뭐지?
“그럼 쓰러진 가주님도……?”
“맞아요. 자식과 아내를 연달아 잃은 충격에 몸이 약해지더니 방금 말한 증상들을 앓다가 쓰러진 거예요.”
안드라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 이해가 잘되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흐음……. 제가 바르바토스 가문의 역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바르바토스 가문 사람들이 불치병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그 불치병이라는 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까?”
다이애나 대부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병이 초대 가주님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틀림없어요. 단지 후대에 와서 치료방법을 잃어버려 불치의 병이 됐을 뿐이죠.”
“그 말씀은 원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네. 가문의 기록에는 초대 가주님도 잃어버린 치료방법으로 병을 이겨내셨다고 적혀 있어요.”
잠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모두 방금 들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이겨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
다이애나 대부인은 편하게 말해보라는 듯 나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저희는 쓰러진 가주님에게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요. 차라리 전문 치료사나 잃어버린 치료법을 찾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특히 시현 님만이 유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이에요.”
“……?”
그녀는 내 품에서 잠들어 있는 새끼 그리핀들을 보며 말했다.
“초대 가주님에 관한 기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요. 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초대 가주님은 그리핀의 인정을 받아 다시 태어났으며, 후대의 자손들도 그리핀과 함께함으로써 영원히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라고…….”
“그리핀이 치료방법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그리핀의 인정’만이 저주를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했으니 막연하게 짐작만 할 뿐이에요.”
복잡한 눈빛으로 품 안의 새끼 그리핀들을 바라봤다.
나는 그리와 피니가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뿐인데,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아직 연약한 이 아이들을 얽매고 있었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다시 절박한 눈빛으로 부탁했다.
“지금 제 아들을 살릴 유일한 희망은 그 새끼 그리핀뿐이에요. 그리고 새끼 그리핀들을 돌볼 수 있는 건 시현 님뿐이고요. 제발 쓰러져 있는 아들이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도와주세요. 흐윽!”
그녀는 나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높은 신분을 가진 존재일지라도, 쓰러진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괜히 집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졌다. 옆에 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부인 마님…… 진정하세요.”
“흑…… 흐윽…….”
베베토는 다이애나 대부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금 대부인 마님을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시현 님밖에 없습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저를 평생 농장의 일꾼으로 부려먹어도 좋으니 제발……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알겠으니까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이야기하세요.”
당황하는 나를 대신해서 엘프리드가 베베토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도 계속 나를 향해 부탁을 멈추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를 바라봤다. 그들도 지금의 상황을 딱히 뭐라 판단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은 내 선택에 달린 건가…….
나는 품에 안겨 있는 새끼 그리핀들을 바라봤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쓰러진 가주고 뭐고, 당장 아이들과 함께 농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그리와 피니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가 다이애나 대부인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당연히 새끼 그리핀들도 내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리와 피니를 여기에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깊게 고민을 해봐도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긴 고민 끝에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깔끔히 정리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시킨 다이애나 대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부인께서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일단 새끼 그리핀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시현 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말에 다이애나 대부인의 얼굴이 밝아지고, 베베토는 크게 소리치며 기뻐했다.
“그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다 들어드리겠어요.”
“일단 아이들을 다시 농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겠죠?”
“그건 저도 들어드릴 수 없어요. 후계자 쟁탈로 모두 예민한 상황이라 모두 반발할 거예요.”
역시…….
예상대로 새끼 그리핀들을 농장으로 데려가는 건 어려워 보였다. 아이들을 돌보려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
나는 최대한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생각해둔 조건들을 차례로 꺼내놨다.
첫째는 새끼 그리핀들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나의 말을 존중해줄 것.
둘째는 필요한 물품들을 최대한 지원해 달라는 것.
마지막은 새끼 그리핀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누구도 강제로 불러내거나,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이렇게 세 가지의 큰 조건을 내걸었다.
“시현 님의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일게요. 제 권한이 닿는 한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겠어요. 제가 직접 몸으로 막아서는 일이 있더라도…….”
다이애나 대부인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옆에 있던 베베토도 어떤 일이든 돕겠다며 뒤에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자마자 다이애나 대부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지만, 그건 나중으로 잠시 미룰게요. 지금 당장 가문의 사람들에게 새끼 그리핀과 시현 님에 대한 접근을 막아야겠어요.”
그녀는 힘이 실린 목소리로 강경한 의지를 드러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용인들에게 언제든지 부탁하라는 말을 남기고, 베베토와 함께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 농장 식구들만 남게 되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하아…… 일이 복잡하게 돼버렸네요.”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다이애나 대부인이라면 시현 님이 내건 조건을 충분히 지켜주실 겁니다.”
“끄응…… 당분간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려면 농장은 물론이고 집에도 못 돌아가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급한 농장일을 몇 개 처리해 놓고 올걸…….”
“농장에 계신 분들도 이해해 주시겠죠. 집에 계신 어머님에게도 리안이 대신 잘 설명해 즐겁습니다.”
“글쎄요. 사장님은 또 오지랖 부리는 거냐고 화내지 않을까요?”
“하하하!”
우리는 투덜거리는 카네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안드라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엘프리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린?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
“……?”
나와 안드라스는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엘프리드를 바라봤다.
“다이애나 대부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후계자 쟁탈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도 불치병에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새끼 그리핀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했을까요?”
“그건…….”
“으음…….”
엘프리드의 물음에 나와 안드라스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가주의 자리가 탐이 난다고 해도, 불치병에 걸리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새끼 그리핀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 놓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깊어지던 고민은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깨어져 나갔다.
-삐이…… 삐익?
-삐이익!
“벌써 일어났어? 배고파?”
“제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꿍유 좀 더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
“저는 일단 농장에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아마도 꿍유가 더 필요할 것 같군요.”
우리는 풀리지 않는 의문은 잠시 미뤄두고 눈앞에 귀여운 아이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녀석들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보며 계속 울었다. 마치 그동안 어디 갔었냐고 서러움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새끼 그리핀들에게 속삭였다.
내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녀석들은 울음을 멈추고 내 품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다시 한번 나에게 믿음을 주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약간 푸석푸석해진 아이들의 솜털을 매만지며 안쓰러운 미소를 띄웠다.
부모도 없는 이 아이들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가 보호막이 되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