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5화
그리핀과 후계자(4)
바르바토스 가문에 도착하고 5일이 흘렀다. 이렇게 오래 이곳에서 지내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왔는데…….
의지할 곳이 없는 새끼 그리핀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5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모든 행동과 의식을 그리와 피니를 돌보는 데 집중했다.
불안해하지 않도록 항상 가까이서 지켰고, 잠을 자다가도 아이들이 울면 바로 일어나서 보살폈다.
두 녀석 다 내가 안 보이면 어찌나 불안해하던지…….
잠시 화장실만 다녀와도 엄청 서럽게 울어댔다.
내 의지로 그리와 피니를 떠나보낸 게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새끼 그리핀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버림당했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했을 녀석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번거로움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짧다면 짧은 5일이라는 기간.
그래도 잠까지 줄여가며 노력한 덕분인지, 새끼 그리핀들은 빠르게 건강을 되찾아갔다.
홀쭉했던 배는 빵빵해지고, 동그란 눈동자에는 다시 반짝임이 돌아왔다.
아직 농장에 있을 때만큼 완전한 회복은 아니더라도, 당장 건강을 걱정해야 할 심각한 수준은 확실히 벗어났다.
“여, 역시! 대단하십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베베토는 말까지 더듬으며 감탄을 터뜨렸고, 다이애나 대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무래도 아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보니 정말 걱정이 많았나 보다.
그리, 피니가 이렇게 빨리 회복하는 데에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확실한 지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내가 요구했던 조건들을 아주 확실히 이행했다. 가끔은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와 아이들이 머무는 방은 외부인으로부터 확실히 격리됐다. 방의 입구는 호위기사와 병사들이 교대로 지켰고, 다이애나 대부인이 신뢰하는 사용인들만 출입은 허가받았다.
대부인도 사용인들을 통해 가끔 소식만 전해 들을 뿐, 자신도 나와 새끼 그리핀이 있는 곳의 출입을 최대한 자제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최선을 다해 내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줬다. 먹고 마시는 건 당연히 철저하게 챙겨줬고,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구해다 줬다.
새벽에 깨어난 아이들을 돌보려고 일어나면, 문밖에서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덩달아 잠에서 일어나 시중들 준비를 했다.
“새벽에는 들어가서 쉬세요. 저만 일어나도 되는데…….”
“대부인 마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새끼 그리핀을 돌보는 데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예…….”
그들은 굉장히 믿음직스럽게 대답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새끼 그리핀들이 새벽 내내 열 번도 넘게 울어대는 통에 계속 잠에서 깨어나야 했고, 아침이 됐을 때는 사용인들 전부 반쯤 정신을 놔버린 상태였다.
좀비처럼 변해 교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나의 노력과 다이애나 대부인의 확실한 지원으로 새끼 그리핀들은 다시 안정을 되찾아갔다.
* * *
“농장은 별일 없죠?”
-별일이 없긴 왜 없어? 네가 없으니까 나 혼자 보고서를 다 써야 하잖아?!
통신 아티팩트를 통해 카네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보고서 타령을 먼저 하는 걸 보니 농장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야쿰들도 잘 지내고 있죠? 아롱이, 다롱이는 어떤가요? 초롱이가 젖은 잘 챙겨주나요?”
-은율이가 너 대신 매일 찾아가는데,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하더라. 다른 야쿰들도 얌전하고.
통신 아티팩트를 통해서 카네프 말고도 반가운 목소리들이 많이 섞여 들려왔다.
-시현 님은 잘 지내신대요?
-선배! 저번에 울타리 고칠 때 사용했던 도구들 어디 놔뒀는지 아세요?
-사장님, 사장님! 나도 아빠…… 아빠랑 이야기할래!
-으아악! 조용히 좀 해봐! 이 녀석들은 시현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네.
참다못한 카네프가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왜 은율이한테 소리를 지르세요?
-내가 언제 은율이한테…… 끄응…… 은율아, 너한테 소리 지른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저기 두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해서 그런 거야.
-카네프 님 혼자 선배랑 이야기하시니까 그렇죠!
-맞아요! 저희도 시현 님과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요!
-이것들이…….
여러 가지 의미로 활기찬 농장의 분위기가 아티팩트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잠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귀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은율아, 잘 지냈어?”
-응! 아빠 언제 와? 아빠 보고 싶어…….
쓸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그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은율이를 달래줬다.
“나도 은율이 보고 싶어.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그리랑 피니가 좀 아파서 아빠가 돌봐줘야 하거든.”
-많이 아픈 거야?
“이제 많이 좋아졌어. 목소리 들려줄까?”
나는 통신 아티팩트를 새끼 그리핀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그리야? 피니야?
새끼 그리핀들은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은율이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곧바로 반응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익! 삐익!
오랜만에 듣는 새끼 그리핀의 울음소리에 은율이는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애들아 안녕!
-삐익? 삑!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은율이와 새끼 그리핀들은 한동안 신나게 대화를 나눴다.
-건강해지면 꼭 농장에 다시 돌아와야 해. 알았지?
-삐이익! 삐이익!
“은율아, 아빠 돌아갈 때까지 다른 분들 말 잘 듣고 있어.”
-알았어! 착하게 지내고 있을게.
은율이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통신을 종료했다. 옆에서 통신을 도와주던 안드라스가 통신 아티팩트를 정리했다.
“다행히 모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요.”
“엘린 군이 조금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리아네 씨, 엘린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가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바르바토스 가문에서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해 둬서 농장 식구들과 짧게 통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가문의 보안과도 관련된 문제라서 다이애나 대부인도 배려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뭔가 답답함을 느낀 나는 오랜만에 기분전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드라스 씨, 같이 정원에 산책하러 나가실래요? 그리, 피니도 바깥 구경도 시켜줄 겸 미리 허락을 받아놨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나는 커다란 바구니에 부드럽고 푹신한 천을 깔고 새끼 그리핀들을 옮겨주었다.
바구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녀석들이 굉장히 귀여웠다.
안드라스와 나는 새끼 그리핀을 데리고, 사용인들의 안내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랜만에 저택 밖으로 향했다.
저택의 커다란 규모만큼 정원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언뜻 보아도 세심하게 관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와…… 이렇게 큰 규모를 깔끔하게 관리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원사가 필요한 걸까? 당연히 관리비도 엄청 많이 나오겠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계산적인 생각을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지워냈다. 괜히 머리 아픈 생각은 떨쳐내고 순수하게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기로 했다.
정원 안쪽까지 이동한 우리는 그곳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막아주는 커다란 파라솔까지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뒤따르던 사용인들은 시원한 마실 거리와 간식을 곧바로 테이블 위에 세팅해 줬다.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한 바깥 공기, 바람에 밀려오는 은은한 꽃향기, 거기다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방 안에서 새끼 그리핀을 돌보느라 쌓였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기 정원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훨씬 더 내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농장의 풍경이 그리워졌다.
농장에 대한 그리움은 잠시 묻어두고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감상했다.
“안드라스 씨, 정원이 정말 예쁘지 않아요? 관리도 깔끔하게 잘 돼 있는 것 같고. 이렇게 예쁜 정원은 처음 와보는 것 같아요.”
“흠흠, 슈나르페 가문 본가의 정원도 여기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정원을 관리하시는데, 꼭 직접 보여드리고 싶군요.”
안드라스는 저택에 이어, 이번에는 정원에서 자기 가문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뭔가 그 반응이 평소의 안드라스 답지 않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방문해 보고 싶네요.”
“말씀만 해주십시오. 시현 님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안드라스는 나를 꼭 가문으로 초대하고 싶은지 눈에서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의 가문은 또 다른 5대 가문 중 하나였기에 살짝 기대됐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바구니로 시선을 옮겼다. 정신없이 정원을 구경하던 새끼 그리핀들을 바구니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원의 잔디 위에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삐익?
-삐이익! 삐이익!
그리가 새로운 환경에 살짝 겁을 먹고 굳어버렸지만, 피니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주변을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다.
잠시 후, 잔디에 적응한 그리도 피니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잔디 냄새를 맡으며 몸을 뒹굴뒹굴하거나, 날아다니는 나비를 따라 정원 구석구석을 살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이 난 새끼 그리핀들의 모습을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솔직히 이곳에서 처음 새끼 그리핀들 보았을 때, 이미 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금방 건강을 회복할 줄이야…… 역시 시현 님은 항상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안드라스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열심히 돌본 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저 아이들이 잘 버텨낸 거니까요.”
“글쎄요. 시현 님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그는 나만 들을 수 있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현 님을 바라보는 바르바토스 가문 사람들의 눈빛이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과 사용인들도요.”
“…….”
그 속삭임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며칠 동안 나를 가까이서 시중들거나, 호위했던 자들이 보였다. 확실히 안드라스의 말대로 내 주변을 지키던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다.
처음에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명령 때문에 의무감에 행동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나를 대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시현 님이 가문의 상징을 되살리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요. 어찌 보면 당연한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쩝……. 그래도 마냥 기쁜지만은 않네요.”
안드라스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나에게 호의를 보내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바르바토스 가문과 점점 깊게 얽혀드는 느낌 때문에 부담감은 계속 심해졌다.
일단 새끼 그리핀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이곳에 남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역시 가장 좋은 건 그리, 피니와 함께 농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 진행 중인 후계자 쟁탈……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뭔가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가 차라리 마족이 아니라 마수였다면 또 몰라도…….
새끼 그리핀들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음울해졌다.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냥 건강하게 해준 거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잠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지금 이대로 포기한다면, 그건 정말로 아이들을 두 번 버리는 거나 다름없다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고 어두웠다.
앞으로의 일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통∼! 통∼! 데구르르…….
입구 쪽에서 작은 공 하나가 굴러와 내 옆에 덩그러니 멈춰 섰다. 잠시 후, 공이 굴러온 입구 쪽에서 작은 인영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공…….”
“가자…….”
귀여운 아기 마족들이 아장아장 공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기들은 공을 몇 걸음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근처에 있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