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7화
그리핀과 후계자(6)
다이애나 대부인의 자식은 총 4명.
쓰러진 바르바토스 가주를 제외한 첫째 아들, 셋째 아들 그리고 막내딸. 이렇게 3명이 다음 후계자 선정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에르마 티벨 바르바투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그녀가 바로 다이애나 대부인의 막내딸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에르마와 다이애나 대부인의 비슷한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달라도 겉모습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나와 안드라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그녀를 적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새끼 그리핀들과 후계자 문제로 여러 가지가 얽혀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먼저 소개를 했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슈나르페 가문의 안드라스라고 합니다.”
“저는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너무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않으셔도 돼요. 딱히 의도적으로 여러분에게 접근한 건 아니거든요. 정말로 우연히 아이들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거예요.”
“…….”
“…….”
“정말이에요. 아직 쌍둥이들이 많이 어려서 후계자 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거든요. 아! 물론 완전히 후계자 쟁탈에서 물러난 건 아니에요. 너무 쉽게 물러나면 가문 내의 제 입지가 너무 좁아져 버리거든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녀는 꽤 민감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너무 우리를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아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귀여운 아기들 이름 못 들으셨죠? 남자아이는 ‘레이’ 여자아이는 ‘샤샤’라고 해요.”
“레이…… 샤샤…….?”
내가 이름을 중얼거리자 품 안에 있던 아기들이 살짝 몸을 들썩거렸다. 자기의 이름은 제대로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레이랑 샤샤가 시현 님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메이드들은 아직 이름을 불러도 전혀 반응을 안 하거든요. 누굴 닮아서 저런 별난 성격이 됐는지…….”
그녀는 걱정이 많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레이와 샤샤의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나중에 커서도 주변 사람들이 고생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그녀의 고민에 공감이 갔다. 은율이도 처음 농장에 왔을 때는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많이 고생했으니까.
“나중에 크면서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두 아이 모두 성격은 조금 독특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너무 착한 아이들 같아서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으음…… 그럴까요? 시현 님 말대로 됐으면 정말 좋을 텐데……. 시현 님, 혹시 저한테 고용되실 생각 없으세요? 시현 님이라면 우리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에르마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제안했다. 옆에서 안드라스가 ‘왠지 정말로 잘하실 것 같습니다.’라며 작게 웃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에휴…… 당연히 그렇겠죠? 워낙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번 여쭤봤어요.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괜찮습니다.”
그 뒤에 나는 에르마와 자연스럽게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귀족 가문 사람들의 육아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평범한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성격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습관에 대한 고민, 또 교육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등등…….
에르마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 쌍둥이 때문에 더욱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듯했다. 생각보다 에르마와 이야기에 집중한 탓에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꾸벅…… 꾸벅…….
어느새 바구니의 새끼 그리핀들과 내 품 안의 쌍둥이가 졸기 시작했다. 에르마는 아기들이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낮잠 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눴네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에르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품 안의 아이들을 건네려 했다. 중간에 잠에서 깬 쌍둥이들이 다시 나에게 오려는 듯 몸을 버둥거렸지만, 에르마는 동시에 두 아이를 안아 노련한 손놀림으로 진정시켰다.
그녀는 떠나기 전 얼굴을 숙여 귓속말로 속삭였다.
“쌍둥이들이 시현 님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말씀드릴게요.”
“……?”
“너무 어머님을 믿고 안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새끼 그리핀들이 건강해질수록 불안해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
에르마는 귓속말을 끝마치자마자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었다.
“시현 님,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안드라스 님도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에르마는 쌍둥이를 품에 안고 테이블을 떠나 정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마지막에 남긴 귓속말은 계속해서 내 귓가에 어지럽게 맴돌았다.
* * *
길었던 정원 산책을 끝내고.
안드라스 그리고 새끼 그리핀들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정원도 마음에 들었고, 귀여운 쌍둥이와의 만남도 즐거웠지만, 에르마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귓속말 때문에 마음이 약간 싱숭생숭했다.
새끼 그리핀들이 건강해질수록 불안해하는 사람들……. 그건 아마도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가주의 형제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어머니를 너무 믿고 안심하지 말라는 말. 그건 이미 다이애나 대부인의 영향력만으로는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
-삐이익?
-삐익! 삐익!
심란한 표정 때문인지 그리와 피니가 울음소리를 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부리로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거나, 몸을 비비적거리는 애교를 부리며 어떻게든 나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녀석들의 귀여운 행동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부들부들한 솜털을 쓰다듬어줬다. 새끼 그리핀들 덕분에 약간 마음을 추스르던 그때.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부인 마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당장 물러서라!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앞길을 막는 것이냐?
문밖에서 굉장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들어도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리와 피니를 보호하듯 품에 안았다.
-벌컥!
거칠게 열리는 방문.
호의적이지 않아 보이는 병사 무리와 함께 로에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또 저 녀석이야?
로에딘을 알아보자마자 나와 안드라스는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심지어 품 안에 있던 그리와 피니도 뾰족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방 안에 있던 사용인들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너희들은 당장 밖으로 나가 대기하도록 해라.”
“저기…… 대부인 마님의 명이…….”
“얼른 나가지 못하겠느냐?!”
“히익…….”
로에딘과 병사들의 흉흉한 기세에 사용인들은 겁에 질려 순식간에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방 안에는 우리와 로에딘 무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바르바토스 가문에서는 손님에 대한 기초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단 말입니까?”
안드라스가 화를 억누르며 로에딘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타다다닷! 척!
로에딘을 포함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물러섰다. 입구부터 만들어진 길을 통해 중년의 남자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짙은 눈썹과 턱수염.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가 어우러져 강인한 인상을 줬다.
남자는 나와 안드라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와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나는 바르바토스 가문의 ‘예이거’라고 한다.”
“…….”
예이거는 손님에 대한 배려와 존중 따위는 없이 위압적인 태도로 우리를 상대했다. 그 기세는 품 안에 있던 새끼 그리핀들을 떨게 만들 정도였다.
안드라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가주님의 형제분입니까?”
“맞다. 내가 형제 중에서 첫째, 둘째인 그 녀석의 형이다.”
쓰러진 가주의 또 다른 형제.
정원에서 만났던 에르마와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었다.
“예이거 님께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안드라스는 비꼬는 어조로 물었지만, 예이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길게 끌 이유가 없으니 짧게 말하겠다. 외부인은 더 이상 가문의 일에 상관 말고 이곳을 떠나라. 지금 당장!”
“죄송하지만 저희는 예이거 님의 부하가 아닙니다. 당신의 명령을 따를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 머무는 겁니다. 가문의 일과는 상관없습니다.”
“시끄럽다! 이미 가문의 원로와 가신들이 너희를 내쫓는 일에 동의했다. 내일 회의가 소집되면 어머니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더는 너희를 보호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감정 없는 시선이 내 품의 새끼 그리핀들에게 향했다.
“하찮은 마수들을 지키려고 굳이 고생할 이유는 없지 않나? 적당히 이대로 물러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나는 예이거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찮은 마수라니…… 그리핀은 바르바토스 가문의 상징 아닌가요?”
“가문의 상징? 애초에 그리핀은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치료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 활용하는 게 올바른 행동이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예이거의 말과 표정이 너무나도 소름 끼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하겠다. 당장 가문을 떠나라. 조용히 떠난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못하겠다면요?”
“뭐?”
“저는 이 녀석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시고 돌아가 주세요.”
“…….”
예이거는 차오르는 분노를 눈동자에 담아 노려봤다. 위압적인 기세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시선을 맞받아쳤다. 품속에 그리와 피니가 불안에 떨며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삐이이…….
-삐이이…….
괜찮아, 얘들아.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던 예이거는 기세를 거두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당분간은 조금 더 손님 대접을 해주도록 하지. 어차피 내일 회의가 끝나면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가문의 침입자로 끌려나가게 될 거다.”
“…….”
“그리고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말이야!”
예이거가 몸을 돌려 방을 빼져 나가고, 로에딘과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시현 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다행히 그리와 피니도 금방 활기찬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와 안드라스의 굳어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못했다.
“회의에서 저희를 내쫓겠다는 건…….”
“아마도 내일 회의에서 후계자 쟁탈을 끝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저희를 내쫓고 새끼 그리핀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겠죠.”
“끄응…….”
이제 바르바토스 가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그때까지 새끼 그리핀들을 도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그리와 피니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겪어야만 한다.
나는 안드라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돌파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