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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8)화 (158/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58화

그리핀과 후계자(7) 

예이거가 협박이나 다름없는 선언을 하고 간 뒤, 다이애나 대부인의 명령을 받고 나를 돕던 사용인들은 전부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거기다 호위 병사들도 모두 교체되었다. 예전에 호위 병사들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아주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함부로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을 지켰다. 내일 회의가 열릴 때까지 우리를 꼼짝없이 가둬두겠다는 속셈이었다.

나와 안드라스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고심했지만, 딱히 시도해 볼 만한 해결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안드라스는 슈나르페 가문 사람이다.

과격한 짓을 했다가는 자칫 가문 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최대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차라리 이럴 때 사장님이 계셨더라면…….

앞뒤 재지 않고 자신 있게 들이박던 카네프의 존재가 그리워졌다.

결국,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방법은 그리와 피니를 데리고 바르바토스 가문을 탈출하는 것.

약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겠지만, 아이들을 무사히 지킬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예이거가 배치해 둔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안드라스와 나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됐다.

굳은 표정의 메이드 한 명이 음식을 운반하는 카트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는 험악한 표정의 병사들도 뒤따랐다.

-드르르륵…….

“시,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메이드는 많이 긴장했는지 손까지 벌벌 떨면서 우리의 식사를 준비해 줬다. 뒤에서 압박감을 주는 병사들 때문일 거라 짐작하며 안쓰럽게 바라보던 그때.

-찡긋!

“……?”

식사를 준비하던 메이드가 병사의 감시를 피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안드라스도 메이드가 보내는 신호를 눈치채고 눈을 반짝였다.

“식사가 다 끝나시면 다, 다시 불러주세요. 그럼…….”

메이드는 다시 감시를 받으며 방을 나갔다. 우리는 문 밖 병사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며 아까 메이드가 신호를 보냈던 그릇을 살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접시 아래쪽에 숨겨두었던 쪽지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바깥의 상황을 살핀 뒤. 안드라스와 함께 조용히 쪽지의 내용을 읽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고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다리세요.

다이애나 대부인

쪽지에는 짧은 지시사항과 다이애나 대부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우리를 도우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워낙 짧은 내용뿐이라 어떤 방식일지는 쉽사리 예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억지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게 여러모로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와 안드라스는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며 저녁 식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감시하는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새벽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 * *

바르바토스 저택에 새벽이 찾아왔다.

창문 밖으로 하늘에 떠오른 붉은 달이 보였다. 마계에서는 주기적으로 붉은 달이 떠오르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나보다.

원래라면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새벽.

방 안에서 잠이 든 건 그리와 피니 뿐이었다. 나와 안드라스는 최대한 소리 내는 걸 자제하면서 문밖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새벽이 깊어가는 데도 뭔가 신호가 없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음에도 친구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처럼, 불안감과 함께 오만 잡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아직 계획을 시작하지 않은 거겠지?

계획 중에 뭔가 어긋났나? 아니면 혹시 그쪽에서 신호를 보냈는데 우리가 못 알아차린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안드라스에게 말을 걸려던 걸 꾹 참아냈다.

계속 시간이 흐르고.

살짝 졸음이 밀려오려고 하던 그때.

-너희들 뭐…… 커억?!

-으으윽!

-털썩!

문밖에서 병사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방 안을 울려 퍼졌다.

이것이 신호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챙겨뒀던 짐을 챙기고,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인 새끼 그리핀들을 바구니째로 안아 들었다.

-끼이이익…….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이미 완전히 포박된 상태였다. 기사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딱 맞춰 나와주셨군요. 따라오시죠. 시간이 없으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 잠시만요.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일단 대부인 마님이 계신 곳으로 갈 겁니다. 지금 궁금해하시는 건 그곳에 도착하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최대한 조용히 따라와 주십시오.”

나머지 병사들이 뒷마무리하는 동안 우리는 기사를 따라 불빛 하나 없는 저택의 복도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중간에 순찰하는 경비병들이 있었는데, 기사는 능숙하게 그들의 동선을 피해 우리를 이끌었다.

경비병들을 피해 우리는 작은 쪽방 같은 곳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이애나 대부인과 몇몇 기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불안했던 표정에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걱정하고 있었어요.”

나와 안드라스가 예의를 표하려고 하자 그녀는 직접 나서서 우리를 말렸다.

“인사를 받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하면 금방 여러분들을 찾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오히려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부족한 탓에 도움을 주러 온 여러분들에게 고생을 시키게 해드렸네요.”

“괜찮습니다, 대부인.”

“대부인께서 의도하신 게 아닌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차와 호위 병력을 저택 뒷문에 준비해뒀어요.”

“그럼…… 새끼 그리핀들도 함께 가도 되는 건가요?”

“예. 어차피 이곳에서 잔인하게 이용당할 바에는 시현 님께 아이들을 맡기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아요.”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와 피니도 함께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안드라스의 입가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걸렸다.

탈출에 관해서 설명하던 다이애나 대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간절한 표정으로 나와 안드라스의 손을 한쪽씩 붙잡았다.

“정말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저택을 탈출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부탁을……?”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새끼 그리핀들과 함께 쓰러진 제 아들을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없을까요?”

“…….”

“만약에 거절하신다면 그냥 보내드릴게요. 하지만 쓰러진 아들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늙은이의 노망이라 생각하셔도 좋아요. 잠시라도 좋으니까…… 제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흑!”

다이애나 대부인의 눈가의 주름을 따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잡은 손을 통해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줬다.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내가 느꼈던 참담한 감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자식의 효심이 깊다 해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다이애나 대부인은 내가 느꼈던 참담함에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지…….

긴박한 상황인지라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안드라스 씨.”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시현 님의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후후, 이제 말하지 않아도 통할만큼 사이가 깊어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는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이미 아시겠네요?”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카네프 님이 없다는 게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어지는 안드라스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우리는 동시에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아마 만화나 영화였으면 ‘이 일이 끝나면 꼭 술 한잔 같이하자고, 파트너!’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구닥다리 멘트는 필요 없었다. 깊은 신뢰로 이어진 우리에겐 짧은 눈빛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아직도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다이애나 대부인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가주님을 만나러 갈게요. 당장 안내해주세요.”

* * *

다행히 바르바토스 가주가 있는 방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경비병들도 이미 빠르게 제압된 상태.

-끼이이익…….

방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아주 얕게 숨은 쉬고 있지만, 얼굴과 손발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산자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아…….”

다이애나 대부인은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그 모습을 심란하게 바라보던 중, 바구니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느꼈다.

-삐이이…….

-삐이…… 삐이이익.

잠에서 깨어난 그리와 피니가 몽롱한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새끼 그리핀들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삐이익?

그리와 피니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두 녀석이 누워있는 남자에게 다가가길 거부한다면 곧바로 다시 바구니로 옮겨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끼 그리핀들은 바르바토스 가주에게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삐이익!

-삐익! 삐익!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들은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누워있는 가주의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발레리안의 손에 끌려오듯 마계에 도착해 예쁜이를 만났을 때의 기억.

아직도 그때의 따스하고 기분 좋은 느낌은 온몸의 세포 단위로 새겨진 듯 선명했다.

내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쓰러져 있는 가주의 모습이 내가 ‘마나 부적응’으로 고생했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르바토스 가주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해서 과거의 나와 똑같은 상황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다이애나 대부인은 분명 그리핀의 도움을 받아야 가주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에 그 방식이 예쁜이의 도움을 받아 내가 완전한 각성을 이뤄낸 것과 같다면? 눈앞의 쓰러진 남자에게도 똑같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무슨 방식으로?

모든 게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는 그 추측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촉박했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대부인 마님.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분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려면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가요? 알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깊은 슬픔과 허탈함이 얼굴 깊게 배어들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얼굴로 되돌리며 나와 안드라스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허무맹랑한 희망을 품었었나 봐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두 분은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약속한 대로 깔끔히 우리를 보내주려 했다. 죽어가는 아들의 마지막 희망을 보내는 일임에도 그녀는 깊은 슬픔을 속으로 삼켰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한듯했다.

“잠시만요!”

“……시현 님?”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시현 님,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요. 혹시 저를 불쌍히 여겨 그러시는 거라면…….”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단호히 다이애나 대부인의 말을 부정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초조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모두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주님을 깨울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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