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0)화 (160/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0화

그리핀과 후계자(9) 

먼저 무릎을 꿇은 기사들을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이들이 뒤따라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끝까지 서 있는 사람은 다이애나 대부인과 예이거 뿐이었다.

깨어난 바르바토스 가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뜯어져 나간 문, 벌벌 떨고 있는 병사와 기사, 눈물을 흘리는 다이애나 대부인. 마지막에 가주의 시선은 자신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이거를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예이거 형님.”

“……오랜만이다.”

“깨어나자마자 형님의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제가 쓰러져 있던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동생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가주는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 속에 뼈가 있음을 금방 눈치챘다.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던 예이거는 꾸역꾸역 입을 열어 대답했다.

“침입자들이 가문의 저택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연락을 받았다.”

“침입자요? 아∼ 혹시 저를 깨어나게 해준 저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하, 형님께서 큰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이곳에는 침입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가문의 은인들이지요.”

방 안쪽을 바라보는 가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어째서 형님이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쓰러져 있을 때, 가문 내에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어머니의 허락이 있어야 할 텐데요?”

“…….”

예이거와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몸을 움찔하며 떨었다. 가문 내에서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아주 민감한 일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역모죄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이거도 자신이 어떠한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깨어난 것이냐? 어떻게?!”

“하하! 저도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새끼 그리핀과 뿔이 없는 남자가 저를 깨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놈들이…… 결국…….”

“그런데…… 아직 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요.”

“…….”

“형님, 누구의 허락으로 병력을 움직이신 겁니까?”

가주의 질문에 예이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통해 무언의 대답을 보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가주의 눈동자에 잠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은 사라지고 싸늘한 기운만이 가득해졌다.

“지금 이 시간부로 모든 병사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 소란을 피운 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병사와 함께 대기하라. 그리고 소란을 주도한 ‘예이거’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방에 가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도록!”

“가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주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예이거를 따르던 기사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다이애나 대부인을 따르던 기사들이 나서 예이거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기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바르바토스 가주와 다이애나 대부인은 그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으음…….”

가주가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을 휘청거렸다. 다이애나 대부인은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남아있던 기사들도 뒤이어 그에게 다가왔다.

“혹시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어머니. 일어나자마자 무리를 했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졌을 뿐입니다. 조금만…… 쉬면…… 괜찮을 겁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느끼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콕. 콕.

-콕. 콕.

“으으음…….”

얼굴에 뭔가를 찌르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창문을 가득 메우는 아침 햇볕이었다.

-삐익? 삐이익!

-삐이익!

잠을 깨운 범인들이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하고 기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양손을 더듬거리며 귀여운 범인들을 쓰다듬었다.

“그리, 피니! 둘 다 잘 잤어?”

-삐이익!

-삐이익!

새끼 그리핀들은 내 말을 알아듣고 힘차게 대답했다. 녀석들의 부들부들한 솜털을 쓰다듬으며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그때, 옆에서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군요?”

“헉! 안드라스 씨?”

나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덕분에 내 가슴 위에 있던 새끼 그리핀들도 뒤따라 놀라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침대 옆에는 의자에 앉은 안드라스가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약간 놀림을 당한 것 같아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큭큭. 죄송합니다. 시현 님을 놀리려고 한 건 아닙니다. 늦게까지 깨어있다가 저도 이곳에서 잠시 잠들었나 봅니다.”

“끄으응…….”

안드라스의 대답에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나른한 잠기운이 조금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바르바투스 가주를 깨우는 데 성공했었지? 곧바로 다시 쓰러지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으시려나?

“바르바투스 가주님의 상태는 괜찮다고 합니다. 새벽에 쓰러졌던 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후유증이었을 뿐, 불치병 증상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내 표정을 읽은 안드라스가 내가 궁금해하던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나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어디죠? 새벽에 호위를 받으며 온 건 기억나는데. 원래 머물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다이애나 대부인이 머무는 곳과 제일 가까운 방이라고 합니다. 혹시나 우리가 불안해할까 봐 대부인께서 직접 이곳을 지정하셨다고 합니다.”

“아! 그런가요?”

어쩐지 침대부터 방의 장식까지 원래 머물던 손님 방보다 더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똑. 똑. 똑.

-일어나셨습니까?

방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밖에서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시면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시죠.”

우리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 복장의 남자 사용인이 들어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쉬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대부인 마님께서 두 분의 상태를 꼭 확인하라 명하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됐습니다. 혹시 불편하신 곳이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대부인 마님께서 두 분을 아침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좋으니, 편하게 찾아오라는 말씀도 함께 하셨습니다.”

“시현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솔직한 마음은 다시 포근한 침대로 들어가 새끼 그리핀들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손님으로 된 입장에서 차마 집주인의 초대도 거절하고 게으름을 부릴 순 없었다.

약간 내키지는 않는 얼굴을 한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정말 편한 모습으로 찾아갈 수는 없으니,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준비를 끝낸 우리는 새끼 그리핀들을 바구니에 태우고 방 밖으로 나섰다.

방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이애나 대부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똑. 똑. 똑.

“대부인 마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아아! 얼른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자마자 다이애나 대부인이 제일 먼저 뛰어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두 분 다 정말 잘 오셨어요. 혹시 어제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대부인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하게 잘 쉬었습니다.”

“저도 괜찮았습니다.”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혹시 불안해하셨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나와 안드라스의 손을 차례로 꼭 붙잡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외부인에게 보이기 힘든 친밀한 행동들을 통해, 그녀가 우리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아들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다이애나 대부인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손수 우리를 이끌었다. 안쪽 침실의 문을 열자 바르바토스 가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두꺼운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고, 옆에는 치료사가 불안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을 확인한 바르바토스 가주는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오! 생명의 은인들이 오셨군!”

“바르바투스 가주님을 뵙습…….”

“바르바투스 가주님을…….”

“아아! 번거로운 인사는 됐네. 인사를 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나니까 말이야.”

그는 약간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갖추려는 우리를 말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살짝 머뭇거리는 우리의 등을 다이애나 대부인이 살포시 떠밀었다.

나와 안드라스는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다이애나 대부인은 침대에 걸쳐 앉았다.

“정말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어머니의 얼굴도 다시 보지 못했을 것이고. 자네들은 나뿐만 아니라 바르바투스 가문의 은인이야.”

그의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에 우리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네의 이름이…… 임…… 시현이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가주님.”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어. 끝없이 긴 꿈을 꾸던 와중에 자네와 그리핀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아마도 조금만 늦었으면 나는 영원히 꿈에 빠져들었을 거야.”

바르바투스 가주는 상상만으로 아찔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의 표정에는 나를 향한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깨운 것인가? 아니, 애초에 그리핀들은 어떻게 부화시킨 거고? 가문에서 그토록 방법을 찾아 헤맸는데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는데 말이야!”

“가, 가주님!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또 쓰러지십니다.”

옆에 있던 치료사가 가주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주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대답을 기다렸다.

“가주님을 깨운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는 설명해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때는 워낙 상황이 정신없어서 제가 뭘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거든요.”

“흐음…… 그런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혹시 숨기는 게 없는지 살짝 떠보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눈빛은 웃음으로 뒤덮였다.

“하하하! 우리 가문의 숙원이나 다름없는 문제를 우연히 해결했다는 말인가? 하하하!”

“가, 가주님!! 그렇게 크게 웃으시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치료사가 놀라며 그의 웃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겨우 웃음을 멈춘 가주는 빙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사실은 자네에 대한 정보를 읽던 중이었네. 솔직히 나를 깨운 일도 믿기 힘든 일인데, 여기에 적혀있는 것들도 하나같이 놀라운 일뿐이구먼. 이계에서 온 존재…… 야쿰…… 요정…… 그리고 그리핀까지.”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바르바투스 가주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요즘 마계에서 핫한 인물인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를 살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지.”

바르바투스 가주는 침대에 앉은 자세로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시현, 혹시 나에게 원하는 게 있는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네.”

그는 편하게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내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가 명확했기에 나는 곧바로 질문에 대답했다.

“이 새끼 그리핀들을 제가 맡고 싶습니다. 이곳이 아니라 제가 일하고 있는 농장에서요.”

“그 야쿰들을 기르고 있다는 농장 말인가?”

“네!”

“흐음…….”

바르바투스 가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아주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자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리핀이 바르바투스 가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은인이고 뭐고, 자네를 억지로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네. 만약 이대로 자네를 그리핀과 보내준다면 우리 가문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설마…….

나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가주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생각만 했다는 것뿐이니까.”

“그럼……?”

“가문의 원로들과 가신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가주의 권한으로 그렇게 하도록 해주겠네. 이 아이들은 자네가 데려가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가주님!”

“대신!”

“……?”

“아직은 우리가 그리핀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자네에게 맡기지만. 언젠가 준비가 끝난다면 꼭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주게. 그러면 아무런 미련 없이 보내주겠네.”

가주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부탁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안드라스 쪽을 바라보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가주의 부탁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가주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오히려 내가 부탁을 한 꼴이구먼. 혹시 나에게 더 부탁할 건 없는가? 무엇이든 편하게 말해도 된다네.”

“그럼 저…….”

“……?”

“이제 농장으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생각보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어서…… 농장에서 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

“……?”

“푸흐…… 푸하하하하하하!!”

왠지 모르겠지만 바르바투스 가주는 아까보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크게 웃었던지 밖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 안쪽의 상황을 확인할 정도였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드라스에게 속삭였다.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큭큭, 아닙니다. 시현 님 다운 부탁이었습니다.”

“설마 안 보내주지는 않겠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안드라스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씨!

나는 딴 거 다 필요 없고 빨리 은율이랑 아기 야쿰들 보러 가고 싶다고!

“푸하하하하하!!”

바르바투스 가주의 웃음은 그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휘청거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치료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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