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6화
카디스 영주(6)
“사탕 아저씨!”
취임식의 무대로 발을 옮기던 중, 귀여운 고양이 소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루와 함께 엘든 마을의 수인들이 뒤늦게 식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그들을 향해 다가섰다.
“모두 오셨군요.”
“늦게 도착해서 죄송합니다. 어수선한 마을을 정리하느라…….”
“아니에요, 촌장님. 딱 맞춰서 오셨어요. 자리를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나는 엘든 마을 사람들을 미리 정해둔 자리로 안내해 줬다. 포코 영감님은 깔끔하게 준비된 손님 자리를 보고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시현 님…… 저희가 이런 곳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혹시 폐가 되는 건 아닌지…….”
“당연히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죠.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빨리 앉으세요. 곧 취임식이 시작되니까요.”
불안해하는 포코 영감님을 직접 자리로 이끌어줬다. 그는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사합니다, 시현 님. 이 늙은이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오래오래 사셔서 저랑 같이 계속 일하셔야죠.”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든 마을의 수인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이런 곳에 초대됐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봤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유일한 수인이다 보니,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자연스레 엘든 마을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었다.
“전부 다 왜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들이야! 우리가 못 올 곳에 왔어? 우리도 초대받고 온 거니까 당당하게 행동해.”
“맞아. 이렇게 기쁜 날 눈치만 보면서 지낼 순 없지. 오랜만에 너구리 영감님이 맞는 말을 하셨네.”
“레빌 이 자식이! 내가 그럼 평소에는 헛소리만 한다는 말이야?”
“헛소리는 아니더라도, 쓸데없는 말은 많이 하시잖아요?”
“이익!”
레빌과 너구리 영감님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고, 사색이 된 라구스가 중간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두 사람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럽게 변했다.
괜찮아진 분위기에 안심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미루가 머뭇머뭇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미루야,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저기…….”
“……?”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미루는 주섬주섬 나무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예쁘게 잘 만들어진 꽃 팔찌가 들어 있었다.
“이건……?”
“아저씨한테 뭔가 선물하고 싶어서요.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어제 정말 열심히 만들었어요.”
미루는 주변 손님들의 화려한 장신구들에 비해 준비한 선물이 초라하다 느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꽃 팔찌를 꺼내 들었다.
줄기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팔찌 모양에 꽃장식에서는 아직도 생생하게 향기가 흘러나왔다.
어제 마을 주변을 뛰어다니며 재료를 모으고, 열심히 팔찌를 만들었을 미루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연스레 마음이 푸근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조잡해 보이는 선물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곧바로 꽃 팔찌를 왼손에 차고, 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고마워, 미루야. 마음에 들어.”
“정말…… 요?”
“물론이지! 취임식 할 때도 꼭 차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지켜보고 있어. 알았지?”
“네! 꼭 지켜보고 있을게요.”
내가 마음에 든다는 말에 미루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갸르릉거렸다.
“시현 씨, 이제 진짜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알겠어요, 리안 씨.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또 올게요.”
엘든 마을 사람들에게 급하게 인사를 남기고, 발레리안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취임식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농장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취임식 시작할 것 같아요.”
“드디어 시작하는 거냐? 빨리 끝내고 와.”
“선배, 너무 긴장하진 않으셨죠? 어제저녁에 같이 연습한 대로만 하시면 문제없을 거예요.”
“정말 꿈만 같네요…… 이제 시현 님이 진짜로 영주님이 되신다니…….”
“다녀오십시오, 시현 님.”
별것 아니라는 듯 맥주를 홀짝이는 카네프, 긴장하지 말라는 엘프리드, 아직도 취임식이 믿기지 않는다는 리아네, 담담히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안드라스까지.
“아빠!”
“다녀올게, 은율아.”
“응!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마지막으로 은율이를 가볍게 한 번 안아주고 취임식 무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왕성에서 직접 임명장을 받아온 전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농장을 여러 번 방문했던 그 남자 마족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소.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니…… 그보다 카디스 공. 생각보다 화려하게 취임식 자리를 준비했구려. 이렇게 큰 규모로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소.”
“그게 어쩌다 보니…….”
“거기다 베르딕 가문의 카엘 님부터, 제르무어 마법사단의 아그룬 님까지…… 에스테르로 임명되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카디스 공의 영향력이 벌써 이렇게까지 커졌을 줄이야.”
중년의 마족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말대로 처음 에스테르에 임명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게 아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고속 승진을 하는 기분이랄까?
“솔직히 저도 얼떨떨하네요.”
“모두 카디스 공의 뛰어난 능력 덕분 아니겠소?”
“그렇게 평가받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 않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하하! 겸손한 모습은 그대로구려.”
호탕하게 웃은 중년 마족은 잠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에게 신호를 주면 따라 올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무대에 올라섰다.
“모두 정숙해 주시오.”
중년 마족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주변에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식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지금부터 카디스 영지의 새로운 주인을 임명하는 의식을 시작하겠소.”
그의 곁으로 마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든 기사가 양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중년 마족이 보내는 신호에 맞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중년 마족은 품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꺼내며 엄숙하게 외쳤다.
“영원히 녹지 않는 왕좌의 수호자이자, 아라크단을 지배하는 마왕님의 전언이오. 그에 마땅한 예를 표하시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절차에 따라 예를 표했다. 중년 마족은 두루마리를 풀어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알아듣기 힘든 미사여구와 형식적인 말들.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나머지 한 귀로 흘려 버렸을 텐데. 지금은 바짝 긴장한 채 중년 마족의 말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정해진 질문에 대해 정해진 대답을 정확히 말해야 했다.
영주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약속과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종의 서약 절차였다.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어제 엘프리드와 수차례 연습한 덕분에 문제없이 의식을 이어나갔다. 정신없이 대답을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의식의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소. 그대는 아라크단의 왕좌가 녹지 않는 한, 그 주인에게 영원히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하겠습니다.”
내 마지막 대답이 끝나고. 계속 엄숙한 표정을 유지했던 중년 마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맹세의 의식은 성립되었소. 마왕님께 인정받은 새로운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어 중년 마족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성스럽게 두루마리를 말아 내 쪽으로 건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품 안으로 가져갔다.
중년 마족은 나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준 뒤, 몸을 돌려 많은 사람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마왕님의 에스테르이자, 카디스의 칭호를 받은 이계의 인간! 그는 이제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카디스 영지의 영원한 주인임을 선언하는 바이오!”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
레프미어는 마왕이 내게 직접 내린 이름이며, 오래전 기록에 남아 있는 숲의 요정의 이름이라고 했다. ‘임(林)’씨 성의 ‘수풀 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중년 마족의 선언과 동시에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는 축하해 주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선언이 끝나고 연주자들이 악기를 들려는 순간. 나를 축하해 주려는 또 다른 존재 때문에 모두 손을 멈춰야 했다.
-부우우우우!!
-부우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야쿰의 울음소리.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땅이 조금씩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농장 식구들을 제외하면, 난데없이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 카디스 공?! 이…… 이건?”
“괜찮아요. 저를 축하해 주려고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그게 무슨……?”
당황하는 중년 마족을 대충 안심시키며, 농장의 야쿰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를 축하하기 위해 열심히 울고 있을 귀여운 야쿰들을 상상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깜짝 축하 인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샤라라라락!
-반짝반짝!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가루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의 가루들로 인해 주변은 온통 기분 좋은 향기로 가득 찼다.
“이 가루는…….”
“저, 저기! 요정이다!”
“정말 요정이야!”
“이렇게 많은 요정이 한꺼번에…….”
하늘에는 수많은 요정이 날개를 퍼덕이며 신나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꺄하하하!」
「시현! 축하해, 뾰!」
「신난다, 뾰!」
사람들은 홀린 듯 멍한 눈동자로 하늘의 요정들을 쫓았다. 그중, 귤색 머리칼의 귀여운 요정이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시현! 축하한다, 뾰!」
“규리구나! 취임식을 축하해 주러 온 거야?”
「취임식? 그런 건 잘 모른다, 뾰!」
“응?”
「은율이가 오늘 시현한테 엄청 기쁜 일이 있을 거라 해서 찾아온 거다, 뾰!」
“아…… 그렇구나.”
아무래도 오늘을 기대했던 은율이가 규리에게 취임식에 관해 이야기 해준 모양이었다.
「근데 취임식이 뭐야, 뾰?」
나는 아주 짧게 영주로 취임한 것을 설명해 줬다. 그러자 규리는 엄청 기뻐하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시현이 이곳의 주인이 되는 거냐? 뾰!」
“응, 맞아.”
「와아! 잘됐다, 뾰! 그럼 앞으로 주변에 더 많은 꽃이랑 딸기를 심어줄 수 있겠다, 뾰!」
규리는 기대감의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자신의 희망을 드러내는 순수한 모습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규리랑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중년 마족은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카디스 공…… 도대체 이 요정들은…….”
“아…… 그게…….”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그에게 설명했다.
“저 몰래 축하해 주러 온 손님들이 있었네요. 하하!”
나는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중년 마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요정들의 축하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고. 정신을 다시 차린 연주자들에 의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 * *
그 날.
변두리에 있던 영지의 새로운 영주 취임식에 대한 소문은 금방 마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취임식에 참석한 모두가 그곳에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빠짐없이 주변에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5대 가문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행사의 규모에 귀한 손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고.
특히 5대 가문에 중요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귀족 행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명한 사람들도 자리했다는 소문에 많은 이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거기다 소문으로만 알려졌던 마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능력. 취임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내가 똑똑히 봤어! 그 카디스 영주가 손을 딱 들어 올리니까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동시에 울음소리를 내더라니까?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요정이 카디스 영주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였어. 아! 진짜라니까! 여기 이것 봐봐. 이게 그 요정들이 뿌린 가루라고!
-카디스 영지에 마족이 살지 않는 쓸모없는 땅이 많잖아? 거기에 영주를 따르는 수많은 마수가 득실거린데.
소문은 또다른 소문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카디스’라는 새로운 영지는 등장하자마자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