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9)화 (169/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9화

귀향(1)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떠나는 손님들의 인사를 받아주기 위해, 다시 한번 발레리안과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다.

배웅을 거의 끝냈을 때쯤에는 어느새 하늘이 푸른빛에서 검은색을 더해가고 있었다.

거의 녹초가 된 나에게 라구스가 찾아왔다.

“시현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뭘……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워낙 바쁘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물이요?”

때맞춰 라구스의 뒤쪽으로 레빌이 뭔가를 실은 수레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건……?”

“취임식 날짜에 맞추려고 조금 급하게 만들었다곤 하지만, 맛이 나쁘지는 않을 거야.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재료를 모아 만들었어. 물론 가장 고생한 사람은 직접 이것들을 만든 너구리 영감님이지만.”

“아…… 혹시?!”

내가 기대감 가득 찬 눈빛으로 묻자 두 사람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에 실린 익숙한 나무통들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벌써 입가에 군침이 도는 것 같았다.

“엄청 대단한 선물은 아니지만 받아줘.”

“시현 님. 영주님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나는 깜짝 선물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레빌과 라구스뿐만 아니라 다른 엘든 마을 사람들과도 하나씩 인사를 나눴다. 미루에게는 아직 손목에 차고 있는 꽃팔찌를 보여주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엘든 마을 사람들까지 떠나고.

떠들썩했던 주변에는 어둠과 적막이 찾아왔다.

“선배, 수레에 담긴 건…… 응? 이 나무통은 벌꿀 맥주 아니에요?”

“벌꿀 맥주라고?”

카네프가 벌꿀 맥주 소리를 듣자마자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벌꿀 맥주를 바라보는 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시현, 진짜 벌꿀 맥주야?”

“네. 엘든 마을 사람들이 선물이라고 주고 갔어요.”

벌꿀 맥주 소식에 다른 농장 식구들도 뒤이어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이라도 당장 나무 맥주통의 뚜껑을 열어버릴 기세였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농장 식구들끼리 취임식 뒤풀이를 해볼까요?”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 * *

취임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정식으로 영주에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마왕성에서 돌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농장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영주의 일을 잘 모르는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농장을 돌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야쿰들을 돌보고, 가끔은 딸기밭과 딸기잼 공방도 살피고, 최근에는 새끼 그리핀들까지 추가돼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영주의 일에 대해서는 발레리안이 따로 생각해둔 게 있다고 했으니, 그의 언급이 있을 때까지는 일단 농장의 일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카아앙!

-카앙…… 까아앙!!

오랜만에 농장의 건물 뒤편에서는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 선배! 검술 수련을 꽤 오랫동안 쉬었던 것치고는 꽤 버티시는데요?”

“헉…… 헉…… 버티기는 개뿔…….”

호흡을 거칠게 내쉬며 엘프리드를 노려봤다. 그는 칭찬의 의도로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쉬지 않은 것 같은데도 몸은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고, 한때 카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날카로웠던 실전 감각은 완전히 녹이 슬어 있었다.

엘프리드는 잠시 공세를 늦추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도 검 끝을 내리며 최대한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그런 거예요. 검이라는 게 하루라도 잡지 않으면, 당장 다음 날부터 감각이 뒤틀리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수련을 이어나가는 게 좋아요.”

“헉…… 어쩔 수 없었어. 헉…… 워낙 일들이 계속…… 되다 보니.”

마왕성에 마왕을 만나러 다녀오고, 새끼 그리핀들과 함께 바르바토스 가문에도 다녀오고, 거기다 영주 취임식까지…….

꽤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검 수련을 소홀히 하게 됐다.

“그러니까 조금씩이라고 했잖아요. 하루에 기본적인 자세 수련만 해줘도 감각 유지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

“이제 조금 숨 좀 돌리셨죠? 다시 갑니다.”

“자, 잠깐만 아직 힘들…….”

-까아앙!

이 무지막지한 놈!

엘프리드는 나의 마지막 외침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튀어나오려던 욕을 참으며 겨우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잠시 숨을 돌린 덕분에 호흡과 움직임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조금이나마 생겨난 여유로 어떻게든 반격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직 감각이 녹슬어 있던 탓이었는지, 제대로 된 반격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다시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체력은 바닥인 상태. 이제 정말로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하려는 그 순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 몸속에서 느껴졌다.

어디선가 마력의 흐름이 불쑥 솟아나더니 빠르게 온몸을 휘저었다. 나는 그 불가사의한 힘에 이끌리듯이 몸을 움직였다.

“어엇?!”

엘프리드의 입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방금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절묘하게 회피함과 동시에 순간 반격의 기회가 생겨났다.

아무리 감각이 녹슬었다고 해도 완벽한 기회를 놓쳐버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끌어내 검을 휘둘렀다.

-까아앙!!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등 뒤로 바닥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서 검을 놓친 엘프리드가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나를 바라봤다.

“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끄으응…… 뭐가?”

“마지막 움직임이요. 제 공격을 완벽히 꿰뚫은 것처럼 움직이면서 반격하셨잖아요? 지금껏 한 번도 그런식으로 반격하신 적이 없었는데…….”

“…….”

그는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 말고 다른 데서 몰래 검술 지도를 받고 계신 건 아니죠?”

“야! 너랑 이렇게 검술 수련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따로 검술 지도를 받을 여유가 어딨어?”

“으음…… 그럼 이럴 리가 없는데…….”

엘프리드는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도 그 불가사의한 힘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을 돌렸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뒤에도 엘프리드는 계속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근처에 나뒀던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린, 언제까지 고민하고 있을 거야? 나 먼저 갈 거야?”

“벌써 가시게요? 더 안 쉬시고요?”

“오늘 바빠. 취임식 준비 때문에 밀린 보고서도 다 정리해야 하고, 나 없는 동안 농장 식구들이 먹을 반찬도 미리 챙겨야 해.”

“……어디 가세요?”

“취임식 뒤풀이 때 이야기했잖아. 나 내일부터 휴가야.”

* * *

내가 마계 농장에 온 뒤로 이곳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자랑이 아니라 진짜 내가 관여하지 않은 일이 농장에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휴가를 가거나,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때면 늘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없을 때 문제가 생기면 대응할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몇 번의 휴가와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들로 인해, 농장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대처법을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으면 야쿰을 돌보는 일은 리아네가 맡았다. 물론 내가 하는 것처럼 밀착해서 야쿰을 보살피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대신 먹이를 꺼내주거나, 축사 청소, 물통 갈아주기 등등. 간단한 일들은 나 없이도 리아네 혼자 가능했다.

안드라스는 딸기밭과 딸기잼 공방 관리. 엘프리드는 농장 외부 청소, 잡일 그리고 식사 준비를 담당했다.

식사 준비라고 해도 내가 미리 준비해둔 반찬을 꺼내거나, 라면이나 즉석식품 같은 걸 준비하는 정도였다.

“시현 님. 저번에 가져오신 식료품과 주방용품 중에 거의 다 떨어진 걸 정리해 왔어요.”

“선배, 이건 필요한 개인 물품을 정리한 거예요. 선배랑 은율이 건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적어뒀어요.”

“아! 시현 님. 사진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는 용지랑 잉크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그것들도 같이 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아서 나의 휴가 준비를 대비하는 농장 식구들을 보며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된 것 같았다.

“모두 든든해지셨네요. 이제는 제가 농장에 없어도 되겠어요.”

장난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에 리아네, 엘프리드, 안드라스. 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럴 리가요! 농장에는 시현 님이 없으면 안 돼요.”

“서, 선배. 우리 버리고 가는 거 아니죠?”

“시현 님이 안 계시면 아마 이곳은 몇 달…… 아니, 한 달도 못 버틸 겁니다.”

가볍게 건넨 말에 생각보다 진지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만둔다던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모두 농장일에 익숙해지신 것 같아 믿음직스러워졌다는 의미로 한 말이에요.”

나는 적극적으로 나서 오해를 해명했다. 그제야 세 사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농장 식구들이 생각보다 나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큭큭…… 말 한마디에 전부 다 호들갑은. 그렇게 시현에게 의지만 해서 되겠어?”

카네프는 키득거리며 놀리듯 말했다. 당연하게 세 사람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런 반응을 신경 쓸 카네프가 아니었기에 슬쩍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왠 휴가야?”

“그게…… 일이 좀 있어서요.”

“영주님이 되시자마자 휴가를 나가다니. 너무 농땡이 부리는 거 아니야?”

카네프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장난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휴가를 떠나는 이유를 대충 둘러댈지, 정확히 밝힐지 고민됐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농장 식구들에게 정확한 이유를 밝히기로 했다. 농장 식구들에게 일부러 숨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조금 있으면 아버지 기일이라서요. 요 몇 년 사이에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거든요.”

“어…… 어어?”

카네프는 아주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카네프 님…… 방금 그건 좀…….”

“시현 선배, 정말 우리 버리고 가는 거 아니죠?”

“시현 님, 제가 카네프 님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 사람은 내가 기분이 나빠졌을 거라 생각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카네프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봤다.

“괜찮아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당황하는 농장 식구들을 보며, 괜히 말했나 싶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모두를 진정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