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70화
귀향(2)
“아빠∼! 준비 다 끝났어.”
은율이가 분홍색 캐릭터 가방을 메고 우다다 달려왔다.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은율이 왔구나. 필요한 건 다 챙겼어?”
“응. 그런데 사장님 표정이 이상해.”
은율이는 카네프 쪽을 꼭 집어 말했다. 그는 아직도 아까의 실수가 마음에 걸리는지, 평소보다 훨씬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 마이페이스인 카네프에게 잘 없는 일이라 약간은 재미있게 느껴졌다.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대충 둘러댔다.
“아마도 은율이가 아빠랑 같이 휴가를 가게 돼서 사장님이 많이 외로우신가 봐.”
내 말에 은율이의 눈이 커지더니, 카네프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섰다. 그리고 앉아있는 카네프의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사장님, 은율이 없어서 많이 외로워?”
“어? 으…… 응.”
카네프는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살짝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대신 그리랑 피니랑 많이 놀아줘. 새끼 그리핀들도 나랑 아빠가 없어서 많이 외로울 거야.”
어쩌다 보니 은율이가 카네프를 달래주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그 모습에 나머지 농장 식구들은 고개를 돌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카네프는 그들을 잠시 살벌한 눈으로 노려봤지만, 은율이를 앞에 두고서는 그 위력이 크게 살아나지 못했다.
결국에 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은율이가 없는 동안에는 새끼 그리핀들이랑 잘 놀고 있을게.”
“약속이야?”
“그래. 약속할게.”
약속한다는 대답을 듣자 은율이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밝은빛과 같은 미소는 어정쩡하던 카네프의 표정에도 스며들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은율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나와 소리죽여 웃던 나머지 농장 식구들도 덩달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는 은율이 덕분에 금방 사라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뒷일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은율이와 함께 농장 건물을 나섰다.
물론 이번에도 규리와 아꿍이도 함께 했다.
* * *
내가 태어난 마을은 흔히 사람들이 시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평소 길에서 자동차만큼 소가 지나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집마다 농사를 짓는 게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거의 평생을 소를 키우며 사셨다. 작게 밭농사를 짓기도 하셨지만, 가장 애를 쓰고 많은 정성을 기울인 건 소를 키우는 일이었다.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는 지금도 그곳에서 소를 키우고 계셨을지 몰랐다. 아니, 확실하게 소를 키우고 계셨을 거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가꿔온 농장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마음에 병을 얻으시고, 너무나도 허망하게 우리를 떠나셨다.
요 몇 년간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산소에 전혀 찾아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크게 아프시기도 했고, 먹고 살기 바빴다는 이유도 있지만.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며칠 전.
어머니가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올해는 아버지가 계신 곳에 찾아가지 않겠냐고.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겉으로는 평온한 연기를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날 밤에는 알 수 없이 심란한 마음에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사과 아저씨, 준호 형을 만나는 즐거운 일을 상상하며 억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날 밤에는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
* * *
“와아아! 이거 정말 아빠 거야?”
“그래. 아빠가 산 거야.”
「이거 막 빠르게 움직이던 그거 맞지, 뾰?」
“맞아.”
-무우우…….
아이들은 내가 구매한 자동차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차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앞 좌석과 뒷좌석을 차례로 앉아보기도 했다.
“호호호,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네.”
“그러게.”
나와 어머니는 신난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혹한의 쐐기마석을 일부 판매하고 돈을 얻었을 때, 발레리안의 권유로 차를 구매하게 됐다.
출퇴근하거나 개인적으로 움직일 때는 개인 차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차를 빌려 탈 수 없다는 생각에 발레리안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곧바로 차량을 알아보고 구매한 게 꽤 오래전이었다.
선택한 차종은 넉넉한 크기의 SUV 차량.
어떤 차를 살지 고민할 때 고려했던 사항은 간단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편하게 태울 수 있는 게 일 순위였다. 자연스럽게 편안한 승차감과 넓은 공간, 다양한 기능성을 따져 선택하게 됐다.
발레리안이 남자의 로망 스포츠카를 주장하며 바람을 넣어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운전 면허증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을 때는 대리운전을 했던 경험도 있어서 차를 운전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얘들아,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자∼ 할머니가 도와줄 테니 얼른 차에 타자.”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뒷좌석에 함께 자리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아직 차 안에서는 특유의 새 차 냄새가 가득했다.
기본적인 운전석 조정을 확인하고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우르르릉…….
“와…… 방금 차가 움직였어.”
-무우! 무우!
「맞아. 우르릉하고 울었다, 뾰!」
그렇게 크지 않은 시동 엔진음에도 아이들을 재잘재잘 말을 쏟아냈다. 백미러로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을 한 번 확인하고, 부드럽게 차량을 출발시켰다.
차량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커다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든지 몸을 들썩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얘들아, 차에 타고 있을 때는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돼. 저번에 말해줬잖아.”
“아빠가 하는 말 들어야지? 할머니가 손잡아줄 테니까 조금만 얌전히 앉아 있자.”
나와 어머니의 조곤조곤한 타이름에 아이들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도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쯤, 바깥 구경이 조금 시들해진 은율이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순간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였다. 은율이의 옆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은율이 아빠의 고향으로 가는 중이란다. 고향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니?”
“고향?”
-무우우?
은율이와 아꿍이는 ‘고향’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나! 들어본 적 있다, 뾰! 자기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다, 뾰!」
“규리는 알고 있었구나. 맞아, 우리는 지금 은율이 아빠가 태어난 곳으로 가고 있단다.”
규리는 고향의 뜻을 정확히 맞추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편, 은율이는 아직도 궁금함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거기는 왜 가는 거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이 거기에 있거든.”
“가족? 누구?”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란다.”
“할아버지?”
은율이는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눈을 반짝거렸다.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할아버지 만나고 싶다, 뾰! 너무 기대된다, 뾰!」
-무우우우.
기대가 가득해진 아이들의 반응에 어머니는 살짝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서 아이들을 만나는 상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그 서글픈 미소를 더 지켜보지 못하고 백미러에서 눈을 떼버렸다.
* * *
꽤 오랫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슬슬 익숙한 건물과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심란한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들은 휴게소에서 산 간식을 맛있게 먹고 쉴새 없이 재잘거리더니. 지금은 어머니에게 기대거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왠지 모르게 심란한 마음을 약간 줄여주는 것 같았다.
“어머, 저기 있던 중국집이 사라졌구나. 옛날에 너희 아버지가 참 좋아했던 가게였는데.”
어머니는 예전에 자주 방문하던 가게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 기억 속에도 남아 있던 그 가게는 유명 햄버거 체인점으로 변해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나?
그때 온 가족이 저 중국집에 가서 식사했었는데…….
가게에 들어섰을 때 코끝에 스치는 기름 냄새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코를 찡긋거렸다.
예전 기억보다 더 번화해진 시내를 빠져나와 우리 집이 있던 마을 쪽으로 빠져나갔다. 최근에 막 정비한 듯한 포장도로를 따라 정말 익숙한 마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꿈 많던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호호, 시현아. 너 예전에 저 집 뒷마당에서 친구들이랑 몰래 고구마 구워 먹다가 창고에 불낸 거 기억나니? 얼굴에 숯을 잔뜩 묻히고 엉엉 울었었는데.”
“당연히 기억나지.”
다행히 큰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엄청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그때의 아찔한 감정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어휴, 생각해 보면 너도 사고를 참 많이 쳤었는데…… 그에 비하면 은율이는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지 몰라.”
“하하. 그러게…….”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내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은율이는 천사나 다름없는 것 같았다.
시골 마을이어서 그런지 시내와 비교하면 거의 변한 모습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익숙한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옛날이야기를 나눴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나와 어머니는 동시에 말을 뚝 멈췄다.
잠시 후, 우리들의 시야에 앞마당이 딸린 집 한 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변에 잠시 차를 멈춰 세웠다. 어머니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그 집을 바라보았다.
“아직…… 그대로 있었구나.”
“…….”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가족이 살았던 집.
불의의 사고가 생기고 사정이 너무나도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집을 내놔야 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지, 집 주변에는 약간은 쓸쓸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근처에 소를 키우던 축사가 있던 곳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공터로 변해 안 쓰는 농기계와 폐자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입안이 썼다. 공허한 마음에 자꾸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시현아, 가자. 아저씨 기다리시겠다.”
“으…… 응. 다시 출발할게.”
다시 차량을 움직였다. 어머니는 두 눈을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셨다.
차량은 그곳에서 완전히 멀어져 또 다른 익숙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아이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얘들아, 도착했어. 이제 일어나야지?”
“으으응…… 할머니…….”
-무우우…….
「뾰오오……」
아이들은 잠꼬대하며 꾸물꾸물 어머니에게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아이들을 깨우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시골의 깨끗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마계 농장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확실히 도시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긴 운전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고 있던 그때. 멀리서 걸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시현이 왔어?”
얼굴에 반가움을 가득 담고서 달려오는 중년의 남성. 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사과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