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73화
귀향(5)
아버지 산소에서 성묘를 끝내고.
사과 아저씨 가족들과 함께 천천히 산에서 내려왔다.
“준호 아니냐? 아버지랑 어머니 모시고 어딜 다녀오는 게야?”
나무 정자 앞에서 쉬고 있던 한 할머니가 부채를 흔들며 준호 형에게 말을 걸었다.
“산소에 들릴 일이 있어서 뒷산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뒷산? 벌초할 때도 아닌데 거긴 뭐하러 다녀온 데. 말벌 놈들한테 쏘이면 어쩌려고.”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대꾸하자, 준호 형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나섰다.
“할멈, 여기 못 알아보겠어?”
“으잉? 옆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저기 읍내 넘어가는 길 쪽, 산 아래에서 크게 소 키우던 형님 기억 안 나? 여기가 그 임 씨 형님네 가족이잖아.”
“……아이고! 이제 기억났네, 기억났어!”
할머니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시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어머니를 번갈아 살펴보더니, 얼굴에 주름이 더욱 깊어질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현 어멈 맞지? 여기는 아들내미고?”
“네, 맞아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계셨어요?”
“나는 잘 있지.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왔어? 한동안 통 얼굴을 못 봐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죄송해요. 저희도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그 대답에 할머니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그랬구먼. 애썼네, 애썼어. 이제는 괜찮은 거지?”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나무 정자 밑에서 쉬고 있던 다른 어르신들도 하나둘 우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저 할멈은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지 씨 영감! 여기 못 알아보겠어? 저기 농장을 크게 하던…….”
크지 않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서로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잠시 긴가민가하던 어르신들도 금방 나와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봤다.
“허허! 임 씨네 아들이 이렇게 컸어?”
“시현 어멈은 옛날이랑 하나도 안 변했구먼.”
어르신들의 몰려드는 질문과 인사에 한동안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관심은 나의 손을 잡고 있던 은율이에게로 향했다.
약간 이질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어르신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워낙 어린아이를 쉽게 볼 수 없는 시골 마을이라 은율이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이고! 귀여워라! 이 애는 시현이 네가 데려온 거야?”
“네. 제 딸이에요.”
쏟아지는 관심에 은율이는 내 뒤로 숨으며 몸을 움츠렸다. 어르신들은 그 모습마저도 귀여운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얘야. 이름이 뭐니?”
“은율이…….”
“이름이 은율이야? 이름도 참 예쁘게 잘 지었네. 할머니가 맛있는 사탕 줄까?”
어르신들은 본격적으로 품에서 간식을 꺼내 은율이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작은 사탕부터, 약과, 초콜릿, 양갱…….
그리고 어떤 할머니는 어느새 직접 만든 식혜를 가져와 건네기도 했다.
「나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뾰!」
-무우우! 무우우!
규리와 아꿍이는 앞으로 나서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연히 어르신들은 크게 기뻐하게 둘에게도 맛있는 간식을 마음껏 나눠줬다.
은율이도 내 곁에 계속 꼭 달라붙어 있으면서 주는 간식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잘 먹는 거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우리 아이들 덕분에 어르신들은 더욱 신나서 간식을 가져왔다.
우리 주변에는 정자에서 쉬고 있던 어르신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모여들었다.
약간 어수선한 와중에 나와 어머니를 보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딸기밭 총각 옆에는 누구래요?”
“몰라? 왜 예전에 괴수들이 쳐들어와서 망한 소 키우던 농장 있었잖아.”
“그래요?”
“그것도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 지금 공장 짓는다고 난리 피우는 데가 아마 농장이 있던 자리일걸?”
공장을 짓는다고……?
뒷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묻혀서 더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신나서 간식을 나눠주시던 어르신 몇 분이 어디선가 술을 꺼내오기 시작했다. 사과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슬쩍 나에게 속삭였다.
“시현아, 빨리 애들 챙겨라. 저분들 한 번 술을 드시기 시작하시면 골치 아파지니까.”
“아…… 알겠어요.”
나는 조언대로 아이들을 챙겼다. 이미 맛있는 간식을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내 말에 따랐다.
아저씨의 말대로 정자에는 금방 술자리가 벌어졌다. 우리는 재빨리 행동한 덕분에 술 권유에 휘말리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우리는 다시 사과 아저씨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산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방금 배불리 간식은 먹은 탓인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아꿍이와 규리는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푹신한 방석에 자리를 잡았고, 은율이는 내 품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시현아. 은율이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되겠냐?”
아저씨는 너무나도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부탁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세요. 깨지 않게 조심해 주시고요.”
그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은율이를 안아 들었다. 잠에 빠져 있는 은율이는 자연스럽게 아저씨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저씨는 품에 안긴 은율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지 입꼬리를 계속 씰룩거렸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저렇게 좋을까.”
“저이가 생긴 건 조금 험상궂어도 아기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에휴…… 우리 준호도 빨리 결혼해서 저렇게 귀여운 손녀를 데리고 왔으면…….”
“…….”
아주머니는 깊은 한숨과 함께 준호 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준호 형은 슬쩍 그 시선을 피하며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형.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준호는 아직 결혼 소식이 없어요?”
“말도 마세요, 언니. 맨날 딸기밭에만 붙어 있으니 여자가 생길 리가 있겠어요?”
아주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순간, 은율이를 안고 있던 아저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련히 자기가 잘 알아서 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소문을 들어보니 준호가 읍내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아가씨랑…….”
“아, 아버지! 왜 쓸데없는 말을…….”
준호 형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아저씨의 말을 막았다. 흥미로운 소식에 아주머니의 두 눈이 반짝였다.
“준호야, 그게 정말이니?”
아주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준호 형은 나를 이끌고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시현이랑 둘이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디가! 조금 있으면 저녁 먹어야지.”
“금방 올게요.”
나와 준호 형은 집을 나와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언덕길로 향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마을에는 벌써 고요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우리는 길가에 놓인 낡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나 담배 피워도 되지?”
“형, 담배 피웠었어?”
“피운 지 좀 됐다. 마을 아저씨들한테 이래저래 일 배우다가 자연스럽게 따라 피우게 되더라고.”
준호 형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능숙하게 담배를 태우는 그의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준호 형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머니가 빨리 장가가라고 뭐라 안 하시냐?”
“나? 아직은 없어.”
“너는 좋겠다. 나는 요즘에 틈만 나면 장가가라고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우리 집은 최근까지 사정이 있었잖아.”
“그것도 그렇네.”
그는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의 결혼 압박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약간 우중충한 분위기를 환기할 겸 아까 아저씨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까 아저씨가 한 말은 뭐야. 간호사 아가씨? 형 지금 만나는 분이 있는 거야?”
“아냐. 그냥 식사 한번 같이한 거야.”
“그래도 한번 만나긴 만났나 보네?”
“크흠…….”
준호 형은 약간 쑥스러움을 숨기려는 듯 헛기침했다. 흔히 말하는 ‘썸’을 타는 중인 것 같았다.
그의 달콤한 연애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너무 파고드는 건 또 예의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게는 더 신경이 쓰이는 주제가 따로 있었다.
“형.”
“응?”
“아까 마을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우리 농장이 있던 곳에 공장을 짓는다는 게 사실이야?”
“…….”
내 질문에 준호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쩝…… 들었냐?”
“응.”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점점 가능성이 커지는 것 같아.”
살짝 충격을 받은 나는 표정이 흐려졌다. 그냥 지나가는 헛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공장이 들어서는 걸 마을 사람들이 찬성한 거야?”
“당연히 반대했지. 원래 예전부터 공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 반대가 너무 심해서 실행되지 못한 거거든.”
“근데 왜 갑자기…….”
“에휴…… 그것도 저 망할 말벌들 때문이야.”
“……?”
그는 찡그린 얼굴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었다.
“괴수들이 말벌들을 장악하고 난 다음에 마을에는 계속 피해가 늘어났지만, 딱히 대응할 방법을 못 찾았다는 이야기 아까 했었나?”
“응. 그런데 각성자들을 불러서 퇴치하면 되는 거 아냐? 길드에 의뢰할 수도 있잖아?”
“당연히 그 방법도 생각해봤지. 실제로도 의뢰를 넣기도 했고. 그런데 길드의 각성자들도 완전히 퇴치를 못 하더라. 잠시만 잠잠해질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어.”
“으음…….”
“마음 같아서는 해결될 때까지 길드에 계속 의뢰를 넣고 싶은데, 길드 의뢰비가 좀 비싸야지. 거기다 여기는 시골이라고 의뢰 자체를 잘 안 받더라고. 몇 번 불러온 것도 웃돈을 주고 불러온 거야.”
준호 형의 넋두리 같은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들이 시골 지역을 꺼리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새로 각성한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큰 도시로만 향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공장이랑 무슨 상관이야?”
“사나워진 말벌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제안이 온 거야. 만약에 공장 건설에 반대를 멈추면, 사나워진 말벌과 괴수 퇴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준호 형의 표정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솔직히 군청에서 일하는 놈들, 여기다 공장을 세우겠다는 놈들,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놈들 전부 못 믿겠거든? 지금도 나는 반대 의견이긴 한데. 다른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나 봐.”
“…….”
“다치시는 어르신도 계속 많아지고, 농사에 피해를 보는 분도 계시니까. 마냥 반대만 할 수도 없고…….”
준호 형은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바라보며 착잡한 듯 중얼거렸다.
잠시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 도착해 보았던 옛날 집, 아버지의 산소, 우리를 반겨주던 어르신들, 마지막으로 사과 아저씨네 가족들까지 머릿속에 차례로 떠올랐다.
아버지의 농장은 사라졌어도.
아직 남아 있는 빈집을 허물고, 그곳에 공장이 지어지는 것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낙인처럼 남아 있는 기억. 불타는 농장을 바라보며 무력감에 빠져야 했던 그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어렸던 그때와 다르니까!
“준호 형.”
“어?”
담배를 한 대 더 꺼내려던 준호 형이 손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에 그 말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공장은 당연히 안 지어지겠지?”
“당연하지. 마을 사람 중에 여기다 공장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 아…… 몇 명 있기는 하겠다.”
확신에 찬 대답에 나는 빙글 웃어 보였다. 그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낯선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알았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준호형은 휴대폰을 받아 짧게 대답했다. 다시 담배를 담뱃갑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가 조금 있으면 저녁 준비된다고 빨리 오란다.”
“형, 나 미안한데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도 될까? 어디 급하게 연락할 곳이 생각나서…….”
“그래? 알았어.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천천히 들어와.”
“고마워.”
먼저 언덕길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쯤,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이기석 본부장님?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라 조금 상담을 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