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74화
말벌 퇴치(1)
마을 곳곳에 어둠이 내려앉고, 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사그라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주민들이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회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오늘은 임시로 마을총회가 열리는 날이라고 했다. 목적은 사나워진 말벌들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라는데.
원래라면 내가 참가할 일이 없는 마을 모임이겠지만. 말벌 문제에 대해 관여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아저씨와 준호 형에게 이기석 본부장과 상담했던 내용을 알려주고. 그들과 함께 회관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마을 주민이 나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많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마을 주민 중에는 이런 모임을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말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모습이었다.
그중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다니며 큰 소리로 떠드는 후덕한 인상의 50대 남성이 눈에 띄었다.
어찌나 열심히 말을 하는지 아직 모임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준호 형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 기억나?”
“누군데?”
“왜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과자랑 장난감 보내주던 사람 있잖아? 이 마을의 최고 부자라고 소문났던 ‘김창수’라고…….”
“아…….”
그의 설명에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졸업한 시골 초등학교에 가끔 후원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저 아저씨였다.
대대로 이곳에 살며 큰 영향력을 가진, 흔히 말하는 지역의 유지였다.
“과자랑 장난감을 받을 때는 몰랐지…… 저렇게 속이 시커먼 사람일줄은…….”
“……?”
“저 아저씨가 마을에 공장을 짓자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이야. 군청에는 아는 사람이 쫙 깔려 있고, 정치 쪽으로도 인맥이 장난 아니래. 소문으로는 공장을 짓는다는 투자자도 저 아저씨의 가까운 친척이라더라.”
자연스럽게 김창수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오묘해졌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머릿속에 대충 그려졌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반대를 무릅써가며 공장을 지으려는 의도가 그리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자∼ 자∼! 이제 어느 정도 모인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 보겠습니다.”
후덕한 분위기의 마을 이장이 사람들의 앞으로 나섰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조금씩 잠잠해졌다.
“오늘은 마을 주민들과 임원들의 요구로, 회칙에 따라 임시총회를 열게 됐습니다. 안건은 모두 아시다시피 점점 심해지는 말벌 피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을 이장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손만 놓고 있을 겁니까? 말벌들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간 어르신만 이번 달에 다섯 분이 넘었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말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회비까지 따로 걷어가 놓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전혀 안 보이잖아요! 여러분, 제 말이 틀렸습니까?”
“옳소!”
“저 말이 딱 내 심정이다!”
잔뜩 화가 난 외침에 많은 주민이 동조했다. 시작하자마자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이장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말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장이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잠재우기도 전에 후덕한 인상의 남자, 김창수가 앞으로 나서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러분! 이장님께 뭐라 그러지 마십시오. 이미 군청에서도 손을 놓아버리고, 길드에 의뢰를 넣는 것도 실패했습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께서 저를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지속적인 지원으로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웅성웅성.
김창수의 말에 다시 소란스러움이 커졌다. 공장 건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한 상황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고민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분위기가 김창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공장 건설을 나쁘게만 생각하시는데. 좋은 점도 충분히 많이 있습니다. 일단 일자리가 생겨나면 젊은 사람들도 많이 들어올 거고, 투자가 활성화되면 정부에서 개발 지원도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거부감을 표하던 사람들도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의미 없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마쇼!”
“의, 의미 없는 말이라니?!”
“공장을 지어 일자리가 생긴다고 해도 도시의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나 하겠소? 와봤자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그 자리를 채우겠지.”
“…….”
“그리고 설사 투자가 활성화돼서 정부의 개발이 뒤따른다 해도. 그건 마을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 아니라 돈을 투자한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 될 게 뻔하지 않소?”
논리정연한 반박에 김창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이요? 있다면 말해보시오!”
“방법? 당연히 있지!”
“……?!”
아저씨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나를 바라봤다.
신뢰가 가득한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소를 키우며 농장을 운영하던 임 태자 경자를 쓰시던 분이 제 아버지십니다.”
내 소개에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구 아들이라고?”
“저기 마을 바깥쪽에서 소 키우던 임 씨 아들이잖아. 아버지 기일이라서 어머니 모시고 고향에 돌아왔다더라고.”
“아버지도 없이 힘들었을 텐데. 번듯하게 잘 컸구먼.”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 때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말벌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 가족은 외지로 떠나 있지만, 아버지가 평생 사셨던 마을에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나서게 됐습니다.”
내 이야기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아주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물론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김창수와 몇몇 사람들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마을 이장이 다시 한번 소란스러움을 진정시키며 내게 물었다.
“시현이라고 했지?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참 고맙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를 돕겠다는 건가?”
“제가 소속된 길드가 있는데. 그곳에서 힘을 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짓던 사람 중 한 명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쳇! 또 콧대 높은 길드의 각성자들을 불러서 우리 돈을 받겠다는 소리 아니야?”
돈 이야기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내 설명에 분위기는 곧바로 반전됐다.
“제가 개인적으로 계획을 진행할 생각이라, 딱히 마을 분들의 금전적인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비용이 전혀 안 든다고?”
“그게 정말인가?”
비용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에 마을 이장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봤다.
볼멘소리를 냈던 사람은 크게 당황하더니, 억지로 흠집을 잡으려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비용이 필요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냥 사기꾼들을 불러오는 거 아냐?”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가 담긴 물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은 딱딱해진 말투로 그에게 대답했다.
“제가 소속된 길드는 ‘가디언즈’라는 곳입니다.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길드 중 한 곳이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아까 찾아봤는데 ‘가디언즈’라는 곳, 엄청 대단한 곳이더라고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곳이래요.”
준호 형이 나서며 가디언즈 길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명한 곳이면 한번 믿어봐야지.”
“허허, 마을에서 이렇게 출세한 인물이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네.”
“어렸을 때부터 눈빛이 똘똘하더니. 내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다니까.”
반면 김창수와 몇몇 사람들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놈을 보듯 나를 노려봤다. 아저씨와 준호 형은 그 사람들의 반응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말벌 문제는 김창수를 밀어내고, 내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생각보다 일찍 마을 임시총회가 마무리되고.
기분이 상한 듯한 김창수는 그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와 반대로 기분이 좋아진 이장과 마을 어르신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술과 술잔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이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얌전히 술잔을 받아야만 했다. 겨우 회관을 빠져나왔을 때는 머리 위에 밝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 * *
“끄으응…….”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어제 어르신들이 권하는 술을 최대한 조절했음에도, 원래 주량보다 약간 넘치게 마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숙취의 불쾌한 느낌에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곳이 사과 아저씨네 집 거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왼쪽에는 준호 형이 아직도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고, 오른쪽에는 잠옷을 입은 은율이가 내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밤늦게 들어왔을 때는 나와 준호 형만 여기서 잠들었었는데, 아무래도 중간에 은율이가 나를 찾아 여기에 온 것 같았다.
“일어났니?”
부엌 쪽에서 어머니가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어, 엄마.”
“어우! 술 냄새! 준호랑 얼마나 마신 거니?”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게 아니야. 어르신들이 주는 걸 그냥 받아먹다 보니…….”
“꿀물 좀 타왔어. 이것 좀 마시고 얼른 씻고 나와. 준호 엄마가 지금 아침 차리고 있으니까.”
“으응. 알았어.”
어머니가 타준 꿀물을 마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율이가 깨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어준 뒤, 욕실에 들어가 빠르게 몸을 씻었다.
욕실에서 나오니 잠에서 깨어난 준호 형이 어머니에게 꿀물을 받고 있었다. 완전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끄으응…… 너는 숙취 괜찮냐?”
“꿀물 마시고, 씻으니까 좀 괜찮은데?”
“으으윽! 나는 죽겠다. 영감님들 술 마실 때면 항상 ‘적당히’를 몰라.”
“형도 빨리 일어나서 씻고 와. 얼른!”
“아, 알았어. 그렇게 밀지마! 머리 흔들리니까.”
준호 형을 욕실로 보내고 이불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직 잠들어 있는 은율이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은율아. 이제 일어나야지? 할머니가 아침 먹으래.”
“으으음…… 아빠…….”
은율이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내 품속으로 안겨 왔다. 언제봐도 귀여운 잠투정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할머니랑 같이 아침 안 먹을 거야? 할머니가 서운해하실 텐데.”
“으응…… 먹을꼬야…… 할머니랑…….”
잠꼬대 비슷한 대답을 하며 한차례 몸을 비틀더니, 스르륵 눈을 떴다. 오동통하고 따뜻한 볼살을 살짝 꼬집어주자 몽롱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제 일어났어?”
“응.”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해주며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한테 아침 인사하고 와야지.”
“응. 알았어”
은율이는 ‘할머니∼!’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아주머니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아침부터 잔뜩 귀여움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이불까지 정리하려던 그때.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는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그리고 통화 연결이 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야?
“……아침부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잔말 말고, 어디냐니까?
“…….”
막무가내인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되찾고 답변을 했다.
“고향에 잠시 내려와 있는데?”
-그건 들어서 알아. 지금 네 고향 마을 회관에 도착해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뭐?!”
-뭘 그렇게 놀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했다며?
“아니…… 그렇긴 한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나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