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75화
말벌 퇴치(2)
잠을 잘 때 입었던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해치며 어제 밤늦게 술자리가 벌어졌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주차되어 있는 차 한 대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
정태호가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고. 뒤이어 윤세희도 그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굉장히 반가우면서도, 이렇게 만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이 내 반응에 그대로 나타났다.
“너, 너희들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이긴! 당연히 아저씨 도와주러 왔지.”
“도움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정태호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반응했고, 윤세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우리가 조금 일찍 오기는 했지. 당황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닌데 말이야.”
남진혁이 머쓱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진혁아, 어떻게 된 거야?”
“어제저녁에 길드로 긴급한 의뢰가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보통 이런 경우는 정부나 천족과 연관된 경우가 많거든. 그래서 당연히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했는데, 설마 시현 형과 관련된 의뢰일 줄이야…….”
“그럼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내려온 거야?”
“새벽에 출발하면서 알게 된 거지. 거기 가서 형을 도와주면 된다고 그러더라.”
이기석 본부장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을 처리한 듯했다. 빨라야 오늘 저녁쯤에나 도와줄 사람들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 그리고 이것도 형한테 전해주라던데요.”
“……?”
남진혁은 검은색 천으로 둘러싸인 길쭉한 무언가와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자루 하나를 건넸다.
검은 천 안의 물건은 받아 들자마자 그 정체를 금방 눈치챘다. 바로 마계에 두고 온 내 검이었다.
자루 안에는 작은 쪽지 하나와 익숙한 모양새의 포션이 들어 있었다. 마왕성에서 꿍유로 만든 포션이었다.
쪽지에는 마계의 언어로 몇 문장이 짧게 적혀 있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봐 함께 보내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발레리안이…….
이기석 본부장이 발레리안에게도 소식을 전했나 보네. 이번에도 발레리안의 세심한 배려를 느끼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남진혁이 전해준 것들을 확인하는 사이.
마지막 일행이 내 주변을 서성거리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뭐 해?”
“아이들은 어디에다 두고 온 거야?”
“당연히 아직 집에 있지. 아직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서예린은 뾰로통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씨이… 아이들 데리고 왔으면 미리 연락 좀 해주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
“미안. 이번에는 아버지 기일에 맞춰 고향에 찾아온 거라 어쩔 수 없었어.”
아버지 기일이라는 말에 그녀도 더는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서운한 마음이 남았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모두 고마워.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이렇게 도와주러 와줘서.”
“아저씨에게는 이미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는 저희가 갚아야죠.”
“세희 말이 맞아. 아저씨 일인데 당연히 도우러 와야지.”
“우리도 수당 받으며 일하는 거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 안 해도 돼. 거기다 긴급한 의뢰는 특별 수당까지 붙어서 짭짤하거든.”
“나는 다 필요 없고. 빨리 아이들이나 만났으면 좋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의 대답이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다.
* * *
“급하게 준비하느라 차린 게 많이 없네요.”
아주머니가 준비한 아침상을 두고 부끄럽다는 듯 말하자, 서예린과 남진혁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누가 봐도 진수성찬인걸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대접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죠.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정태호와 윤세희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아주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처음에는 길드의 네 사람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나도 손님으로 머무는 사과 아저씨네 집에 다른 손님을 데려가는 건 너무 실례였으니까.
하지만 사정을 들은 사과 아저씨는 마을을 도와주러 오신 분들을 꼭 대접해야겠다며 우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나와 길드 일행은 든든한 아침밥을 대접받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준비한 아침밥은 정말 맛있었지만, 길드 일행은 조금 어색한 모습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낯선 사람에게 대접받는 식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작은 소녀의 영향도 컸다.
“형? 그… 옆에 있는 아이는……?”
“아… 소개를 안 해줬구나. 이 아이는 은율이라고 해.”
“형이랑 관계는……?”
남진혁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 딸이야. 정말 귀엽지?”
내가 팔불출 같은 모습과 함께 대답하자. 서예린을 제외한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연스레 집중되는 시선에 은율이는 여우귀를 파르르 떨더니, 내 등 뒤로 얼굴을 묻었다.
“허허… 그때 휴대폰으로 들렸던 ‘아빠’ 소리가 저 아이가 말한 거였구나.”
남진혁은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저씨 친딸은 아닌 거죠? 으윽!! 왜 그래?”
정태호가 눈치 없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옆에 있던 윤세희가 그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바보야! 눈치 좀 챙겨!”
“끄응…….”
그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괜찮다는 듯 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친딸이라고 생각하니까 상관없어.”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은율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네 사람 모두 감동받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은율이도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올려봤다.
“은율아. 이리 와봐.”
기회를 노리던 서예린이 은율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여우 소녀는 내 곁을 떠나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서예린은 은율이를 꼭 껴안으며 볼을 비비적거렸다.
“은율아. 언니 안 보고 싶었어?”
“으음…… 조금 보고 싶었어.”
“아유∼! 기뻐라! 언니는 은율이 너무 보고 싶어서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
서예린은 나머지 일행에게 과시하듯 은율이와의 친분을 마음껏 드러냈다. 세 사람은 굉장히 부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모두가 은율이의 귀여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또 다른 작은 그림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우우!
「어디 갔다 왔냐, 뾰?」
아꿍이와 그 머리 위에 올라탄 규리가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 아이의 등장에 길드 일행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어엇? 저 아이들은……?”
“독개미굴에서 봤던…….”
“그…… 맞다! 아꿍이랑 규리! 아꿍이, 규리 맞죠?”
세 사람은 아꿍이와 규리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무우? 무우우! 무우우!
「앗! 개미들이 많던 동굴에서 봤던 사람이다, 뾰!」
아꿍이와 규리도 그들을 알아보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은율이보다 부끄럼이 훨씬 없는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세 사람을 향해 다가섰다.
둘의 귀여움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세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점점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 아저씨?”
“응?”
“이 아이들 설마 소환수가 아닌 건가요?”
“어. 그런데, 왜?”
“허억?!”
“사진을 찍어 보내주실 때, 조금 이상하다 느꼈는데…… 설마 실재하는 아이들일 줄이야…….”
정태호와 서예린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남진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질문 더는 안 하려고 했는데…… 형,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하하!”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사과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준호 형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뒷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입구로 향했다. 남진혁은 뒷산으로 가는 길에 앞장선 준호 형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준호 씨. 생성된 균열을 제거하고 난 뒤에 갑자기 말벌들이 사나워졌다는 거죠?”
“분명합니다. 그게 올해 초였으니까.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네요.”
“그 이후에 길드에 퇴치 의뢰를 맡기기도 하셨다고요?”
“네. 분명 마을에서 몇 번이고 의뢰를 맡겼는데. 달라지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흐음…….”
대화를 나누던 남진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경험이 많은 그의 생각이 궁금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진혁아. 어떤 것 같아?”
“균열에서 튀어나온 괴수가 주변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는 경우는 생각보다 꽤 흔하게 일어나. 실제로 외국에서는 그것 때문에 생태계가 변하는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
“괴수가 자연의 생명체 집단을 통째로 장악했다는 경우는 처음 들어본 것 같아. 굉장히 특이한 사례인 건 분명해.”
“이전에 왔던 길드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준호 형이 중간에 말을 덧붙이며 남진혁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시현 형.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이런 경우에는 그냥 괴수랑 싸우는 것보다 일이 훨씬 번거롭거든.”
그의 어려움을 예상하는 말에 나와 준호 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에이! 무슨 걱정이에요. 아저씨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을걸요?”
“맞아요.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에요.”
또 시작됐다.
정태호와 윤세희는 ‘아저씨라면 가능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거의 신앙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절대적인 신뢰였다.
“야. 너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서예린의 물음에 나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도중.
반대편에서 열 명 가까이 되는 중년 남성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곧장 우리 쪽으로 걸어와 앞을 막아섰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준호 형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임시총회에서 봤던 김창수였다.
“당신은…….”
“흐음. 이 사람들이 그 가디언인가 뭔가 하는 곳의 사람들인가? 뭐…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치는 않아 보이는구먼.”
그의 말투에서 명백하게 적대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준호 형은 슬쩍 우리 쪽을 살피더니,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김창수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길을 비켜주십시오. 어제 마을 회의에서 말했다시피 시현이가 도와주실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말벌들을 잡으러 뒷산으로 가는 건가?”
“물론입니다.”
대답을 들은 김창수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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