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80화
선생님이 필요해(2)
-삑! 삐빅!
엘든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농장 쪽으로 연락할 수 있도록 아티팩트를 만들어 두었다.
촌장인 라구스에게 그 아티팩트를 맡겨 두었는데, 내가 정식으로 영주가 된 이후에는 처음으로 울리는 거였다.
신중한 성격인 라구스가 쓸데없는 일로 호출했을 리 없으니. 아마도 마을에 중요한 문제가 생겨난 게 틀림없었다.
“엘든 마을에 가봐야겠어요. 은율이 좀 부탁드릴게요.”
“함께 가겠습니다.”
“시현 선배, 저도요.”
내가 엘든 마을로 향할 준비를 하자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율이도 아빠랑 같이 나가고 싶다며 잠시 투정을 부렸지만, 혹시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잘 달래서 리아네와 카네프에게 맡겼다.
* * *
나와 안드라스 그리고 엘프리드는 급하게 엘든 마을로 향했다.
아티팩트의 신호가 위급 상황을 알리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였긴 했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영주가 됐기 때문일까? 확실히 예전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나를 발견한 주민들이 아주 깍듯하고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영주님 오셨습니까.”
아직은 이런 분위기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내고, 부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일단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가장 가까이 있던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마을에 혹시 문제가 생겼나요? 방금 라구스 촌장에게 호출을 받고 왔는데…….”
“아∼! 그러셨군요. 아마도 다른 마을에서 온 방문자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저쪽 마을 공터에 모여있을 겁니다.”
다른 마을에서 누군가 찾아왔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으음…… 웬만한 일은 라구스 선에서 처리했을 텐데. 나를 부를 정도의 일이 뭐였을까요?”
“글쎄요. 몇 가지가 떠오르긴 합니다만. 정확한 내용은 촌장에게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빨리 가봐야겠네요.”
나는 몸을 돌리기 전, 이야기를 나눴던 주민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설명해 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영주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바닥에 엎드릴 듯이 고개를 숙이며 부담스럽게 반응했다.
나는 다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마을의 공터를 향해 발길을 움직였다.
마을 주민들의 부담스러운 인사를 받으며 공터로 향하던 도중, 자경단 복장의 반가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컥?! 영주님 오셨습니까?”
“핫!”
어정쩡하게 경례 자세를 취해 보이는 그렉과 헤론. 나보다 훨씬 어색한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둘 다 오랜만이네. 자경단 일은 열심히 하고 있어?”
“무, 물론입니다.”
“밤샘 순찰도 매일 돌고 있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네. 촌장님의 호출을 받고 왔는데. 저쪽 공터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넷! 아버…… 아니, 마을 촌장님은 그곳에 계실 겁니다.”
“알았어. 안내해 줘서 고마워.”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다시 마을 공터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공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여러 개의 천막이 들어서 있었다. 천막들은 급하게 만들었는지,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느낌을 줬다.
“영주님!”
공터 앞쪽에 있던 라구스가 나를 발견하고 곧장 뛰어왔다. 그 뒤에는 레빌도 함께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오시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라구스는 몇 번이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날 불러냈다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부르라고 제가 아티팩트를 드린 거잖아요. 너무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보다 무슨 문제죠? 공터에 못 보던 천막들이 생겨난 것 같은데.”
내가 천막 쪽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저분들은 이웃 마을에서 찾아온 손님들입니다.”
“흐음. 여기에 이웃 마을도 있었군요? 저는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저도 그 존재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이웃 마을에서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입니다.”
“갑자기 여긴 왜 찾아왔데요? 천막까지 친 걸 보면 며칠 여기서 머문 것 같은데.”
“그게…….”
라구스가 표정을 흐리며 뭔가를 설명하려는데.
천막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마족들이 나오더니. 우르르 내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호, 혹시 카디스 영주님입니까?”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남자 마족이 간절한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네…… 제가 카디스 영주입니다만?”
나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남자 마족은 굉장히 감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오오! 드디어…… 드디어…… 위대하신 카디스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바닥에 바짝 몸을 붙였다. 뒤에 있던 다른 마족들도 그를 따라 털썩 엎드렸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
그들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구스와 레빌 쪽을 바라봤다. 레빌은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저 마족들도 네 영지 주민들이야.”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며 다시 레빌을 바라봤다.
“엘든 마을이 카디스 영지의 전부가 아니잖아? 영지는 그것보다 훨씬 넓으니까.”
“여기 있는 분들은 카디스 영지에 포함된 다른 두 마을에서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아…….”
상황을 지켜보던 안드라스가 슬쩍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통 일반적인 영지가 4, 5개의 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니, 카디스 영지의 크기를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 그런 건가요?”
“으음. 영지 주민을 파악하는 일은 영주의 아주 기초적인 업무이긴 합니다만…….”
“…….”
한평생을 한국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던 내가 영주의 기초적인 업무를 알고 있을 리가…….
거기다 아버지 기일 때문에 영주에 취임하자마자 바로 휴가를 나가야 했다. 그런데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이런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내가 영주가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을 관리하고 아직도 엎드려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크흠. 일단 모두 일어나세요. 이렇게 엎드려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따라 그들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보아하니 저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거죠?”
대표로 보이는 남자 마족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왔습니다. 저희 마을은 외부와 교류가 적은 탓에, 새로운 영주님 소식도 얼마 전에 알게 됐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나도 영지에 엘든 마을만 있는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여기 엘든 마을에 대한 소문도 함께 들었습니다. 원래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던 마을이었는데, 영주님의 은혜로 아주 짧은 시간에 풍족한 마을로 변했다고…….”
엘든 마을이 많이 변하긴 했지.
살짝 뿌듯함을 느끼고 있던 와중, 남자 마족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카디스 영주님! 저희 마을도 도와주십시오. 지금 마을의 아이들과 주민들이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세요, 영주님!”
“제발…….”
남자 마족 뒤에 있던 자들도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절박하고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몇 명은 눈물까지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이것 참…….
그들의 애절한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난처했다.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던 엘든 마을을 도와주긴 했지만, 그게 요술 지팡이를 휘두르듯 한 번에 뚝딱 이뤄진 게 아니었다. 꽤 긴 시간을 함께해오며 이뤄낸 것들이었다.
만약에 나를 찾아온 이들의 마을이 과거의 엘든 마을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솔직히 어떻게 해줘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하게 느껴졌다.
무릎 꿇은 마족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계속 커지고. 나는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몰라 얼굴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때, 레빌이 내 앞으로 나서며 마족들에게 말했다.
“일단 너희들의 사정은 들었으니. 더 이상 영주님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물러서.”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영주님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냥 물러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 굶어 죽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더욱 강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마족들.
레빌은 와락 인상을 구기더니,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영주님은 신이 아니야! 너희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이 그냥 나올 리가 없잖아.”
“하, 하지만…… 엘든 마을은…….”
“우리 마을도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영주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 줄 알아? 그 은혜를 따지자면 모든 마을 사람이 평생 일해도 갚기 힘들 정도야. 그런데 너희 마을도 다짜고짜 그렇게 해달라고?”
“…….”
“일단 물러나라. 영주님은 분명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분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 너희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으실 거다. 그러니 더는 억지 부리지 마.”
“……알겠습니다.”
레빌의 외침에 남자 마족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천천히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가득했지만, 레빌의 사나운 눈빛에 황급히 눈을 피하며 천막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소란이 정리됐다. 레빌은 기세를 거두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수고했어.”
라구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레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그리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영주님. 이곳에서는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 것 같으니, 괜찮으시다면 제집으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미안하지만 신세 좀 질게요.”
“실세라뇨.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일행은 앞장서는 라구스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 * *
라구스의 집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러 가지 서류와 책들로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부엌에서 따뜻한 차를 꺼내왔다.
테이블 가까운 자리에 나와, 라구스, 안드라스가 빙 둘러앉았고. 엘프리드는 조금 떨어진 의자에, 레빌은 대충 창문에 걸터앉아 이곳을 바라봤다.
“끄응……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묻자, 안드라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꺼내놨다.
“일단 끼니를 챙기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니. 적당히 식량과 생필품들을 챙겨 돌려보내는 게 좋을것같습니다. 물론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쉽지 않을 겁니다.”
“흐음…….”
식량과 생필품을 챙겨주는 것정도는 어렵지 않다. 이제 엘든 마을은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해졌으니까.
하지만 안드라스의 말대로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 언제까지 그들을 지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앓고 있던 와중, 벽에 기대서 있던 레빌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미안한데. 문제가 있는 건 그 사람들뿐만은 아냐.”
“예?”
“지금 엘든 마을도 여러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