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86화
검은수리 단원(2)
“시현 선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마을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던 엘프리드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사장님의 옛 동료분들이 오신 것 같아. 지금 마을 입구에 계신다고 해서 만나러 가는 길이야.”
“앗! 정말이요? 자,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갈게요.”
사장님의 옛 동료들을 마중 나간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따라나서겠다 외쳤다.
나와 레빌은 잠시 멈춰섰고, 그 사이 엘프리드는 함께 있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모두 내가 가르쳐 준 동작 목검으로 매일 연습해야 해. 그리고 절대 친구들끼리 목검으로 장난치지 말고.”
“네∼!”
“네∼!”
엘프리드가 처음 엘든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을 대하는 게 엄청 서툴고 어색했었는데, 이제는 완전 능숙해진 모습이 약간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인사를 끝낸 엘프리드가 합류하고. 세 사람은 마을 입구 쪽으로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우리는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낯선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분들인가요?”
“맞아.”
내 물음에 레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사람은 금발에 약간 곱상한 외모를 가진 남성 마족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한 상태였는데, 행동과 손짓에서 불량배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껄렁거림이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마계에서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농장 식구 중에는 덩치가 좀 큰 편인 안드라스보다 2배 정도는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외투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서 몰랐는데. 가까이 서 봤을 때, 단순히 덩치만 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에휴…… 단장은 왜 이런 외딴곳에 있는 거야? 이제 늙어서 요양이라도 필요한 건가?”
“…….”
투덜대는 금발 마족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넌 뭐야?”
“혹시 사장님…… 아니, 카네프 님의 옛 동료분들인가요?”
“옛 동료? 으음…… 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 맞아.”
“반갑습니다. 카네프 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내 소개에 금발 마족은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불쾌한 기분이 들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금발 마족의 어깨를 두드렸다.
-툭. 툭.
“아, 왜?”
“…….”
금발 마족이 무례한 행동을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꾸우욱. 꾸우욱.
“으악! 알았어. 알았으니까 손 떼!”
“…….”
“끄으응…… 어깨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금발 마족은 어깨를 매만지며 커다란 손의 주인을 노려봤다. 그 매서운 시선에 커다란 덩치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금발 마족은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어깨가 아픈지 얼굴은 살짝 찡그려진 상태였다.
“단장이랑 지금 같이 일한다고 했지?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로커스’. 그리고 옆에 있는 괴물은 ‘크록’이야.”
로커스?
언제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 것 같은데…….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한 간지러운 기분에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계속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금방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옆 사람을 소개하며 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까 어깨를 움켜쥐었던 커다란 손이나, 언뜻언뜻 보이는 부분에서 평범한 마족이나 수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카네프 단장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마을 위쪽에 있는 농장에 지내고 계세요.”
“농장? 단장이 농장에서 지내고 있다고?”
“네.”
로커스와 크록은 동시에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카네프가 농장에서 지낸다는 소식이 꽤 충격적이었나보다.
“카네프 님을 만나러 가실 거죠? 농장으로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어……? 응. 부탁해.”
“…….”
나는 로커스와 크록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내고 먼저 앞장섰다.
* * *
레빌은 자경단의 일로 마을에서 헤어졌고.
나와 엘프리드가 두 사람을 안내하며 농장으로 향했다.
“시현 선배. 저분들이 그 유명한 검은수리 단원이신 거죠?”
“아마도 그럴걸?”
“와…… 전설의 검은수리 단원들을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다니!!”
엘프리드는 로커스와 크록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엘린은 카네프와 그가 이끌었던 단체를 동경한다고 했었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단체였길래…….
‘검은수리’라는 단체에 대해서 여러 번 들어보기는 했지만, 아주 단편적인 것들뿐이라 모르는 게 많았다. 나중에 한 번 날을 잡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농장 건물의 윗부분이 조금씩 보일 때쯤.
나무 울타리 가까이에서 새끼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익!
-삐익!
나를 발견한 그리와 피니가 멀리서 우다닷! 달려왔다. 기운이 넘치는 두 녀석은 나의 바지 밑단을 부리로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최근에 부리 힘이 워낙 세져서 이곳저곳 사고를 치고 다니기 바빴다.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바지도 걸레짝처럼 변하기 일쑤였다. 나는 재빨리 상체를 숙여 녀석들을 안아 들었다.
“이 녀석들…… 새끼 그리핀이잖아?”
“…….”
로커스와 크록은 내 품에 안긴 그리와 피니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여기서 키우는 거야?”
“네. 여기 농장에서 키우는 아이들이에요.”
“너 혹시 바르바토스 가문 출신이야?”
“아뇨. 최근에 인연이 닿아서 교류가 좀 있긴 했지만, 가문 출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으음…….”
로커스는 깊어진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정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를 살피던 그의 눈빛은 또 다른 아이들의 등장에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우우우!!
-무우우!!
힘찬 울음소리와 아기 야쿰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달려왔다. 작은뿔, 얌꿍이, 아꿍이, 아롱이, 다롱이까지…….
주변에는 순식간에 귀여운 털북숭이들 가득해졌다. 내가 자세를 낮추자 녀석들은 작은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무슨 일이야? 그리핀 동생들 찾으러 온 거야?”
-무우우?
-무우. 무우우.
“커헉! 이 녀석들아. 애교도 이제 좀 살살 좀 부려라. 이러다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아기 야쿰들은 작은 덩치에도 밀어붙이는 힘이 장난이 아니라 애교를 받아주기만 해도 몸이 휘청거렸다.
몸은 좀 힘들어도 아이들을 쓰다듬는 내 얼굴에서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한참 아이들의 애교를 받아주는데, 뒤쪽에서 경악한 로커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건 새끼 야쿰이잖아?! 새끼 야쿰도 키우는 거야? 아니…… 애초에 야쿰을 키울 수가 있는 건가?”
“……?!”
로커스의 외침에 크록도 당황스러운 듯 커다란 손으로 머리 부분을 긁적거렸다. 그런데 그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멀리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우!!
커다란 덩치의 큰뿔이가 울타리 근처까지 다가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억! 진짜 야쿰이잖아?!”
“……!!”
“아아. 괜찮아요.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조금 경계하는 것뿐이니까 그냥 가만히 계시면 돼요. 과한 행동을 보이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큰뿔이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내 모습을 보고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녀석은 금방 경계를 풀며 되돌아갔다.
“보셨죠?”
“으…… 응.”
“…….”
두 사람은 큰뿔이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게 바라봤다. 나와 엘프리드는 두 사람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잠시 멈춰선 일행 쪽으로 누군가 빠르게 다가왔다.
“큰뿔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길래 혹시나 했더니, 역시 시현 님과 함께 와계셨군요? 고생하셨어요”
“리아네 씨.”
리아네는 나와 엘프리드와 짧게 시선을 맞추며 눈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곧장 뒤에 있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로커스 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 리아네냐? 역시 단장님이랑 같이 있었나 보네?”
“네. 계속 신세를 지고 있어요.”
큰뿔이 때문에 멍해 있던 로커스가 정신을 차리고 리아네와 인사를 나눴다. 리아네도 과거에 검은수리 단원들과 인연이 있는 듯했다.
로커스와 짧게 인사를 마친 리아네는 크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크록 씨…… 맞죠?”
-끄덕끄덕.
“보고 싶었어요, 크록 씨!”
리아네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와락 안겨들었다. 크록은 당황한 듯 잠시 팔을 버둥거리다가, 이내 진정하고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커스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쳇. 대우가 너무 차이가 나는 거 아냐?”
리아네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투덜거림에 대답했다.
“크록 씨가 로커스 씨랑 같아요?”
“내가 왜? 뭐가 어때서?”
“그걸 아직도 모르시는 건가요? 그런 점은 여전하시네요.”
“아오…… 이걸 콱! 그냥!”
로커스가 발끈한 표정을 짓자. 리아네는 재빨리 크록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고, 크록은 자연스럽게 그런 그녀를 보호했다.
“쪼끄만 꼬맹이였을 때 버릇을 제대로 들여놨어야 했는데…….”
리아네는 크록의 뒤에 숨어서 얄밉게 혀를 내밀었고, 로커스의 부들거림은 더욱 커졌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인연이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고 느꼈다.
로커스와 짧게 대치했던 리아네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서가요. 카네프 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로커스와 크록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하고 빛났다.
* * *
“불러온다는 놈이 저 녀석이었어?”
로커스를 만난 카네프의 첫 마디였다.
이번에도 환대받지 못한 그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짜증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렇게 외진 곳으로 다짜고짜 불러올 때는 언제고, 힘들게 도착한 사람에게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겁니까?”
카네프도 조금은 양심에 찔리는지, 많이 누그러진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발레리안과 연락을 유지했다는 단원이 너일 줄은 몰랐지…….”
“제가 한 거 아닙니다. 이 녀석이 계속 연락을 유지한 겁니다.”
“모두 흩어진 뒤에도 둘은 계속 같이 있었던 거야?”
“이 어리숙한 녀석을 제가 아니면 누가 챙겨주겠습니까?”
“챙겨준 게 아니라, 네가 부려먹은 건 아니고?”
“크흠…… 뭐, 상부상조 아니겠습니까?”
카네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추궁하자, 로커스는 궁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반응에 카네프는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피식 웃어버렸다.
“크록, 너는 잘 지냈냐?”
-끄덕끄덕.
카네프의 안부 인사에 크록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할 정도로 짧은 안부 인사.
하지만 카네프의 입가에는 보기 드물게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크록’이라는 인물을 굉장히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뭘 그렇게 칭칭 싸매고 왔어.”
-스으윽. 슥!
크록은 커다란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신호를 보냈다. 나와 엘프리드는 전혀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아.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다 믿을 만하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그렇게 싸매고 있느라 답답했을 텐데, 빨리 벗어버려.”
“…….”
크록은 잠시 나와 안드라스가 있는 쪽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두껍게 싸매고 있던 옷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오…… 오오……?!
조금씩 드러나는 크록의 본 모습에 나는 터져 나오는 감탄을 감추려 애썼다.
촘촘히 박혀있는 두꺼운 비늘. 두껍고 기다란 꼬리. 그리고 다리와 팔의 형태는 파충류를 연상케 했다. 처음 그의 본 모습은 보고 머리에 곧바로 떠오른 그것.
바로 전설 속에 등장한다는 용!
마치 용이 인간의 형상을 한 모습이었다.
내 옆에 있던 엘프리드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혈족…….”
“용혈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