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89화
너구리 영감의 보은(1)
농장의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고.
나는 크록과 함께 엘든 마을로 향했다.
평소에는 엘프리드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엘프리드 스스로 농장일을 더 하겠다며 남았다. 아침에 늦잠을 잔 벌이라고 했다.
그래서 크록과 단둘이 엘든 마을로 가게 됐다.
아직 원활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조금 답답한 마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툭. 툭.
별안간 크록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
“…….”
그는 길에서 떨어진 곳 나무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둥지 안의 작은 아기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귀여운 아기 새들이네요.”
-끄덕끄덕.
그 귀여운 모습에 내가 살짝 감탄을 터뜨리자, 크록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록 씨는 겉모습이랑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걸 참 좋아하신단 말이지…….
그동안 함께 지내며 크록에 대해 많은 걸 알아냈지만, 아직 궁금한 점이 많았다.
일단 용혈족이라는 종족부터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였지만,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수화로만 의사소통하는 이유였다.
딱히 신체적으로 불편한 곳이 있지는 않아 보였는데. 그는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간단한 몸짓이나 수화로만 의사소통했다.
직접 물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눈치 없이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아 그만뒀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크록 씨, 그만 가죠.”
-……끄덕.
아직도 아기 새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크록의 팔을 손으로 이끌었다. 그는 아기 새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와 크록은 엘든 마을로 들어서며 마을 주민들의 인사를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도 아직은 크록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였다.
그래도 나에게 고용된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대놓고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혹시 크록이 이런 반응에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로커스의 말에 따르면 이 정도 반응은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지금쯤이면 로커스 씨는 촌장님 집에 있겠죠?”
-끄덕끄덕.
“그럼, 거기로 가죠.”
아침에 만들고 남은 토스트도 직접 전해줄 겸, 우리는 라구스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의 큰길을 따라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어……? 영주님!”
“안녕!”
이제 막 집을 나서는 라구스의 아들, 헤론을 만났다. 그는 살짝 초췌한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지금 안에 계세요.”
“고마워. 근데 얼굴이 좀 초췌해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괜찮습니다. 어제 자경단 야간 근무여서…….”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최근에 인원을 보충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자경단원들은 치안 유지를 위해 빡빡하게 일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헤론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고생이 많네.”
“아, 아닙니다. 영주님.”
군기가 바짝 들어간 헤론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져온 바구니에 토스트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이거 오늘 아침에 내가 만든 거야. 하나 가져가서 먹어.”
“아, 앗! 감사합니다.”
헤론은 감격한 표정으로 토스트를 받아들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바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집 밖으로 향했다.
우리는 짧게 헤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제 일상적인 모습이 된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왔느냐?”
“…….”
라구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를 해왔고, 너구리 영감은 힐끗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반대편에서 로커스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오전에 농장일 빠르게 끝내고 잠시 내려…… 윽?! 술 냄새!”
나는 훅! 하고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순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 반응에 라구스는 어색하게 웃었고, 너구리 영감은 한심하다는 듯 반대편을 바라봤다.
아주 자연스럽게 밝혀진 술 냄새의 근원지.
벌써 점심때가 넘었는데. 아직도 술 냄새가 이렇게 날 수가 있는 건가?
“로커스 씨? 어제 술을 얼마나 드신 거예요?”
“끄으응…… 별로 안 마셨어. 아침 해가 뜰 때까지만…….”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술을? 아니, 애초에 이 마을에 그렇게 늦게까지 운영하는 술집이 있었나?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일하러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쯧쯧, 저렇게 생각 없이 술 마시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너구리 영감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에 로커스는 지지 않고 곧바로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영감님. 제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영감님보다는 일 처리가 빠를 테니까.”
“뭐 얏? 이 버릇없는 놈이?!”
“두 분 다 또 왜 이러세요. 영주님도 오셨는데.”
너구리 영감과 로커스의 다툼이 본격화되기 전에 라구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익숙하게 두 사람을 말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모두 점심 안 드셨죠? 일단 이것부터 드시고 하세요.”
나는 가져온 바구니에서 토스트와 음료수를 꺼내 세 사람에게 나눠줬다.
모두 배가 많이 고팠는지, 토스트를 받자마자 으르렁대던 두 사람도 잠잠해졌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아침에 미리 만들어둔 토스트라 조금 맛이 떨어졌을 텐데도, 세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구니의 토스트를 전부 비워냈다.
덕분에 죽어가던 로커스의 표정도 조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후…… 이제 좀 살겠네.”
“로커스 씨. 사생활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술은 좀 적당히 드셔야겠어요. 일에 지장을 주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다 몸이 상한다고요.”
“크흠, 큼. 주의할게.”
잘못했다는 건 아는 모양인지,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었던 로커스였기 때문에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고 라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구스 씨, 이제 마을에 급한 일들은 어느 정도 정리된 거죠?”
“네! 급한 문제는 대부분 조치했습니다. 이웃한 두 마을에 대한 지원도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로커스 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제가 아직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조언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라구스의 칭찬에 로커스는 약간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너구리 영감은 마음에 만든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로커스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지식과 경험이 풍부했다.
실제로 상인들을 상대로 상품의 시세나 가치에 대해 정확한 식견을 보이거나, 영지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다른 영지의 경우를 예로 들며 해결방안을 제시하곤 했다.
외진 곳이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정보와 경험의 부족함을 로커스가 아주 잘 메꿔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물론이고 라구스 역시 부담을 많이 덜어낸 모습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곧장 영주의 임무를 수행하려다 보니 너무나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는데.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잘 수습한 것 같았다.
급한 문제들이 대충 해결됐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을 때, 문득 오늘 아침에 카네프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설마 이제 와서 약속을 잊었다고 하지는 않겠지?
쩝…….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았지…….
마지막 토스트 조각을 먹는 중인 너구리 영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너구리 영감님…….”
“왜?”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혹시 생각해 보셨어요?”
“…….”
내 물음에 너구리 영감은 표정을 굳히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난번에 제안했을 때와 완전 똑같은 반응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더 말을 꺼냈다.
“뭐든지 영감님이 원하시는 대로 맞춰드릴 테니까, 제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으음…….”
나와 너구리 영감을 지켜보던 로커스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주님이 이렇게 낮은 자세로 부탁하시는데 엄청 쩨쩨하게 구네. 벌꿀 맥주인가 뭔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익! 그렇게 간단히 말할 문제가 아니야!”
“어익쿠, 죄송! 혼잣말이었는데 들렸나 보네.”
“저, 저놈을 내 그냥!”
“참으세요, 영감님!”
“로커스 씨!”
수염이 떨릴 정도로 흥분한 너구리 영감을 이번에도 라구스가 재빨리 말렸다.
나는 로커스의 이름을 부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번 내 눈빛을 피하며 모른 척했다.
너구리 영감의 흥분이 약간 가라앉은 뒤, 나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님. 그냥 단순히 돈이나, 보상 문제 때문은 아닌 거죠?”
“…….”
“혹시 어떤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나의 거듭된 질문에 너구리 영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돈이나 보상은 상관없다. 애초에 벌꿀 맥주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건, 오롯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예? 벌꿀 맥주 제조법은 영감님이 개발하신 게 아닌 건가요?”
“내가 조금 개량하긴 했지만, 그 근본은 너구리 수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제조법이다.”
라구스 촌장도 처음 듣는 이야기 인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너구리 영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크록과 로커스도 마찬가지였다.
“너구리 수인들은 오래전부터 술을 빚거나, 약초를 이용해 약 만드는 일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너구리 수인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비전 제조법이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지.”
“그럼 벌꿀 맥주도…….?”
“맞아. 벌꿀 맥주 제조법도 그중 하나야.”
그제야 나는 너구리 영감이 내 부탁을 어려워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너구리 수인들 사이에서 비전으로 내려오는 제조법이기 때문에 쉽게 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군요?”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라구스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영감님,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벌꿀 맥주를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영주님에게 큰 도움일 될 텐데요.”
“끄으응……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방법이 있는 겁니까? 도대체 그 방법이 뭐죠?”
모두의 시선이 너구리 영감에게로 집중됐다.
“으음…… 그 방법은…….”
한참을 고민하던 너구리 영감이 뭔가를 말하려던 그 순간!
-벌컥!
“영감님!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