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90화
너구리 영감의 보은(2)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울려 퍼지는 다급한 목소리. 거기서 느껴지는 절박함에 모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다닷!
“너구리 영감님!”
금방 모습을 드러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양이 소녀 미루였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미루에게 다가섰다.
“미루야?”
“사탕 아저씨……”
미루는 나를 보자마자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심상치 않은 미루의 반응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무, 무슨 일이야?”
“엄마가…… 엄마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뭐야? 아델라가?!”
엄마가 쓰러졌다는 말에 가장 먼저 너구리 영감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얼마나 그 소리가 컸던지 잠시 미루에게서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너구리 영감은 후다닥 미루에게 다가섰다.
“아델라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거냐?”
“훌쩍…… 지금 침대에…… 흐윽…… 아침에 끙끙 앓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어요.”
“이런…… 라구스! 너는 먼저 아델라의 집으로 가라. 예전에 알려줬던 응급처치 방법을 까먹지는 않았겠지?”
“예, 물론입니다.”
“너는 미루 챙겨서 나를 따라와. 당장 가게에 약을 챙기러 가야겠다.”
로커스와 크록에게 잠시 집을 맡기고, 나머지는 너구리 영감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나는 훌쩍이는 미루를 품에 안고 너구리 영감과 그의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한 너구리 영감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필요한 약초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나도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약초에 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다 됐다. 어서 아델라의 집으로 가자.”
“짐은 저한테 주세요.”
너구리 영감은 나에게 짐을 맡기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짐과 미루를 챙기며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 * *
마을 외곽 쪽.
약간 좁고 구불구불한 길 끝에 나무 울타리와 아담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구리 영감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나도 예의 차릴 때가 아니었기에 집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집 안 풍경.
예전에는 따스한 분위기라 느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왠지 싸늘하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델라!”
너구리 영감은 안방의 문을 열며 미루 엄마의 이름을 외쳤다. 방 안에는 먼저 온 라구스가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누워있던 아델라는 외침을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으음…… 영감님 오셨네요…….”
아델라의 목소리에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발음은 정확하고 또렷했다.
“의식이 있는 거냐?”
“네…… 촌장님이 오셨을 때, 조금 정신이 든 것 같아요.”
“어휴…… 다행이구나.”
그녀의 상태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는지, 너구리 영감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라는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영주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바쁘신 분에게까지 민폐를 끼쳤네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하나도 안 바빴어요.”
“그래. 저놈은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된다.”
평소 같았으면 라구스가 주의를 시킬 정도로 너구리 영감의 말투가 과격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아델라의 안정이 중요했다.
“훌쩍, 엄마……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엄마 때문에 미루가 많이 놀랐지?”
“으으응. 아냐, 나도 괜찮아. 헤헤.”
미루는 아직도 온몸을 작게 떨면서도, 엄마를 안심시키려 억지로 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필사적인 모습이 너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게 느껴졌다.
너구리 영감은 챙겨온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약을 꺼내 그녀에게 먹였다.
다행히 약효가 있었는지 그녀의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혈색이 되돌아왔다. 숨소리도 안정적으로 변하고, 고통에 찡그렸던 표정도 훨씬 편안해졌다.
빠르게 호전되는 그녀의 모습에 나머지 사람들은 굳었던 표정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상태가 좋아진 아델라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일단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으로 보였는데. 그녀의 상태를 살폈던 너구리 영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라구스도 느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님. 혹시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으음…….”
너구리 영감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가 향한 곳이 어딘지 눈치챘다. 바로 내 품에 안겨 있는 미루였다.
라구스의 질문에 미루의 눈치를 봤다는건…….
아마도 즐거운 소식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스멀스멀 퍼져나오는 불길한 예감…….
나도 모르게 품 안의 미루를 힘줘서 끌어안았다.
-벌컥!
오늘따라 자주 듣는 것 같은, 거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레빌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괜찮은 겁니까?”
“진정해, 레빌. 아델라 씨는 이제 막 상태가 좋아져서 쉬고 있는 중이니까.”
“그래……? 그럼 이제 문제없는 거야?”
“…….”
라구스는 첫 번째 물음과는 달리, 두 번째 물음에는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레빌은 불안한 눈동자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집 안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가끔 미루의 훌쩍이는 소리만 들릴 뿐, 모두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어지던 침묵을 깬 사람은 너구리 영감이었다.
“일단 아델라의 상태가 좋아진 것 같으니까. 나는 빨리 가게에 돌아가서 약이나 더 만들어놔야겠다.”
그는 약간 과장된 것 같은 목소리로 나와 라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냐? 당분간 아델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 여기는 레빌에게 맡겨놓고 너희들도 나랑 같이 돌아가자.”
“예? 저는…….”
갑자기 돌아가자는 말에 미루가 걱정돼서 거절하려 했는데. 옆에 있던 라구스가 내 말을 끊으며 먼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일단 너구리 영감 말대로 하시죠.”
“…….”
그리고 은밀하게 눈빛을 보내는 라구스.
나는 뭔가를 눈치채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 아저씨…… 갈 거예요?”
“어…… 으음. 일이 조금 바빠서.”
“…….”
내가 간다는 말에 미루는 고양이 귀를 축 늘어뜨리며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안쓰러운 모습에 너무나도 속이 쓰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미루야 미안. 대신에 아저씨가 일 금방 끝내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그래. 영주님 오실 때까지 내가 대신 같이 있어 줄 테니까.”
“으응……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미루를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등을 쓰다듬어 줬다. 풀죽은 고양이 소녀를 레빌에게 맡기고, 나머지 세 사람은 천천히 집을 빠져나왔다.
“…….”
“…….”
“…….”
우리는 마당 울타리를 지나 오솔길을 말없이 걸었다. 너구리 영감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 쪽을 살폈다.
더 이상 집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너구리 영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무거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라구스도 얼굴색을 어둡게 만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감님. 혹시…….”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다.”
“으음…….”
“뭔데요? 지금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데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내가 중간에 끼어들며 질문했고, 너구리 영감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델라의 몸 상태는 이미 한계다. 당장 병을 낫게 할 치료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아까 영감님이 준 치료약은요?”
“불완전한 약이다. 그걸로는 잠시 상태만 호전시킬 뿐. 근본적인 병을 치료하지는 못해.”
“그럼 완전한 치료약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데요?”
내 질문에 너구리 영감의 시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려나…… 그러니까 내가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부터 이야기해야겠군.”
“…….”
“내가 이 마을로 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귀족에게 가짜 정력제를 팔다가 걸려서 도망치던 신세였지.”
“가, 가짜 정력제요?”
“저도 그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의 시작에 나와 라구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가득해졌다.
“나도 처음 하는 이야기다. 지금은 굉장히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만 해도 굉장히 수입이 짭짤했어. 늙은 귀족들이 정력제라면 사족을 못 썼거든.”
“그래서요?”
“뭐 어떻게 됐겠어? 가짜인 게 들통나자마자 바로 쫓기는 신세가 됐지. 다행히 귀족들에게 잡히지는 않았는데. 정력제를 샀던 용병들에게 붙잡혀 버려서. 벌었던 돈을 거의 다 뺏기고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풀려났다.”
너구리 영감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갈 순 없었지. 어쩔 수 없이 온몸이 만신창이인 상태로 숲을 헤매야 했다. 그러다 기력을 다해 쓰러졌는데…….”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떠보니 저 집이더군. 그곳에 살던 부부가 나를 발견하고 치료해 준 덕분에 숲에서 객사하지 않았던 거야.”
“그럼 그 부부는…….”
“아델라의 부모님. 미루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되는 분들이지.”
그런 인연이…….
라구스도 자세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짜 정력제나 팔던 사기꾼일지라도, 은인을 몰라볼 정도로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당분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 곁에 지내며 은혜를 갚기로 했지. 그렇게 이 마을에서 지낸 지 몇 년이 지났다. 내가 어엿한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쯤, 부부 사이에서는 예쁜 딸이 한 명 태어났다.”
“그게 아델라 씨군요?”
“맞아. 부부는 어렵게 얻은 자식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물론 뛸 듯이 기뻐했지. 하지만 우리들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아기는 선천적인 병을 앓고 있었거든.”
“…….”
“아기는 겨우 세상에 내보였던 생명의 빛을 점점 잃어갔다. 그런데 정말 운명처럼, 아기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아냈다. 어렸을 때 배웠던 너구리 비전 제조법! 그 제조법 중에 아기의 병을 치료할 약도 있었던 거야. 하지만…….”
너구리 영감은 씁슬한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가짜 정력제나 만들어 팔던 놈이 그런 비전 제조법을 뚝딱 완성할 리 없었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어찌어찌 치료약을 만들어냈지만, 미완성의 약이었다. 아기의 목숨만 구했을 뿐 병은 치료하지 못했어.”
그의 목소리에는 서글픔과 허망함이 가득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부부에게 입었던 은혜를 아이를 완벽하게 치료해서 갚겠다고. 아이의 치료가 끝나면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날 거라고…….”
“…….”
“이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나?”
너구리 영감은 아직도 이 마을에 남아 있다.
그의 말은 아델라의 병을 낫게 할 치료약을 아직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다.
“그럼……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마지막 희망을 쥐어짜 내듯 간절하게 물었다. 너구리 영감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나와 라구스는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방법이 아예 남지 않은 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