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91화
너구리 영감의 보은(3)
“방법이 아예 남지 않은 건 아니야.”
어렵게 입을 뗀 너구리 영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라구스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뭐, 뭐죠? 그 방법이라는 게?”
“으음…….”
“영감님!”
재촉을 이기지 못한 너구리 영감이 그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정령의 숨결’이라는 약초 들어본 적 있어?”
정령의 숨결?
어리둥절한 나와는 달리, 라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강력한 마수들이 사는 숲 깊은 곳에 자라는 귀한 약초 아닙니까? 영감님도 여러 번 언급하기도 하셨고요.”
“맞아. 다 자랐을 때 맺히는 꽃이 샛별을 닮았다 해서 ‘샛별초’라고도 불리지.”
너구리 영감은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전 제조법에 따르면 치료약의 중요한 재료 중의 하나가 ‘정령의 숨결’이야. 그 약초의 품질에 따라 약효가 달라져.”
“그럼 정령의 숨결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럼 금방 해결할 수 있는 게…….”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너구리 영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반응에 놀란 라구스는 움찔 놀라 반 발짝 물러섰다. 너구리 영감은 본인이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끄응……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보다 설명을 계속해 주시죠.”
“크흠, 큼. 내가 치료약에 대해 한창 연구할 때만 해도 정령의 숨결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숲속에 위험한 지역까지 들어간다면 꽤 좋은 품질의 약초도 심심치 않게 구하곤 했었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약초가 뜸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숲을 아무리 뒤져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다.”
“으음. 다른 곳에서 약초를 구하면 안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너구리 영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령의 숨결은 같은 약초라고 해도 자란 지역에 따라서 그 성질이 달라. 다른 지역에서 구한 정령의 숨결은 내 제조법에 사용할 수 없어.”
단호한 대답에 내 표정이 흐려졌다. 하지만 금방 너구리 영감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럼 아직 정령의 숨결을 구할 방법이 남아 있는 거죠?”
“맞아. 내 예상이 맞는다면 숲속에서 정령의 숨결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분명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숲속 깊은 곳에 약초가 남아 있을 거야.”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말에 내 표정이 밝아졌지만, 반대로 라구스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 말은 반대로 엄청 위험한 곳으로 가야지만 약초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너구리 영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이지. 위험한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숲의 곳은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발도 들일 수 없는 곳이니까.”
나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한테라도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미리 알았으면 어떻게라도 방법을 생각해 봤을 텐데.”
“에휴……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아델라가 끝까지 거부했다.”
“왜, 왜요?”
“엘든 마을은 이미 너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거기다 미루가 납치됐을 때, 엄청나게 무리해서 구해주기까지 했지. 그래서 아델라는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야.”
“…….”
“아마 미루에게도 몇 번을 말했겠지. 절대 너에게 억지로 부탁을 하지 말라고, 부담을 줘선 안 된다고 말이야.”
자세한 사정을 전해 듣고 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더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델라를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부모님이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슬픔. 나는 이미 두 번이나 그 감정을 겪어봤다. 이렇게 괴로운 일을 아직 어린 미루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심을 굳힌 눈빛으로 너구리 영감에게 말했다.
“아델라 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단 폐를 끼치던 뭐던, 살아 있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
“영지 주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도, 영주의 책임 중 하나잖아요.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영주님…….”
“허헛……”
내 말에 라구스는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고, 너구리 영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령의 숨결인가 뭔가 하는 약초만 구하면 되는 거죠? 그럼 당장 숲으로 갈 계획을…….”
“미안하지만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또요?”
“그래. 어쩌면 정령의 숨결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구하기 힘든 물건일지도 몰라.”
몇십 배나 더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내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정령의 숨결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치료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는 아니다. 하지만 비전 제조법에서 말하길, 상태가 심각한 환자는 일반적인 치료약 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고 했다. 치료약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 재료가 꼭 필요해.”
“그 재료가 뭐죠?”
너구리 영감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야쿰의 젖.”
“…….”
“원래는 전혀 구할 수 없는 재료라 생각했는데. 마을을 들리는 상인들의 말로는 마왕성에서 그 재료를 취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마왕성에서는 그걸…… 꾸유? 뀨유?”
“……꿍유요?”
“맞아, 꿍유! 꿍유라고 부른다고 했어. 너도 들어본 적 있구나.”
당연히 들어봤을 수밖에.
꿍유라는 이름 자체가 내가 지어준 이름이니까.
“그럼 꿍유랑 정령의 숨결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어? 어…… 그래. 그것들만 있으면 어떻게든…….”
“꿍유는 제가 어떻게든 구해드릴게요. 나머지 정령의 숨결을 구할 계획을 세우면 될 것 같아요.”
“저, 정말이냐?”
너구리 영감이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감님. 영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분명 무슨 생각이 있으신 걸 겁니다.”
“네. 제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믿어주세요.”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구리 영감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내 제정신을 되찾고 강력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재료들만 구해준다면 어떻게든…… 아니, 무조건 치료약을 만들어내겠다. 무조건!”
그리고 내 두 손을 꽉 잡더니, 불꽃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벌꿀 맥주가 필요하다고 했지? 아델라가 무사히 건강을 되찾는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 원한다면 평생 벌꿀 맥주 만드는 노예로 부려도 좋아.”
“노예로 부릴 것 까지야……. 그래도 원하는 대로 벌꿀 맥주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은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희망을 되찾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너구리 영감의 모습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나는 곧바로 너구리 영감과 함께 정령의 숨결을 구할 계획을 세웠다.
언제 아델라의 상태가 더 심각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계획 수립은 빠르게 진행됐다.
너구리 영감은 약초 구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기로 했다. 숲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고, 정령의 숨결을 정확히 구분해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너구리 영감을 위험한 숲에서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계획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레빌이었다.
“나도 숲에 대해서 좀 아는 편이야. 데려가면 꼭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크록도 돕겠다고 나섰다.
“괜찮으시겠어요? 이건 계약했던 내용에 없는 일인데.”
-끄덕끄덕.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로커스는…….
“특별수당만 두둑이 챙겨준다면 참가할게.”
“좋아요. 두 분 다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릴게요.”
마을에서 금방 세 명의 실력자들을 모았다. 너구리 영감을 중심으로 함께 대략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나는 농장으로 되돌아가서 농장 식구들에게도 이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 미루의 엄마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미루와 친하게 지냈던 리아네는 불쌍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살짝 굳은 표정을 지었다.
“시현 선배, 그러니까 숲에 약초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일이라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마워, 엘린!”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최근에 부단장 업무가 많아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시현 님.”
“괜찮아요.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크록 씨와 로커스 씨가 도와준다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중간에 리아네도 돕겠다고 했는데. 내가 나서서 그녀를 만류했다. 좋은 의도로 지원한 건 알겠지만, 농장에 너무 많은 인원을 비울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슬쩍 카네프의 눈치를 살폈다.
“사장님…… 이렇게 도와줘도 될까요?”
“왜 내 눈치를 봐?”
“맨날 오지랖 부린다고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앞뒤 생각 안 하고, 매번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니까 그렇지. 이번에는 너 말고 다른 녀석들만 보내는 거잖아?”
“…….”
카네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너도 같이 숲으로 갈 생각이었어?”
“아, 아뇨! 저는 농장에 남아서 일해야죠.”
내가 황급히 아니라고 변명하자, 카네프는 그제야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농장 일에만 지장이 없으면 네가 뭘 하든지 신경 안 써. 그리고 벌꿀 맥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데, 당연히 반대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카네프는 벌꿀 맥주 맛을 상상하는 듯 히죽히죽 웃어 보였다.
농장 식구 중에서는 엘프리드가 계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총 5명의 인원이 계획에 참여하게 됐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5명의 인원은 장비 점검만 짧게 끝내고, 곧바로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숲으로 향한 첫날.
5명의 인원은 정령의 숨결을 하나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모두 이제는 길이 익숙해졌으니 다음에는 찾을 수 있을 거라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정령의 숨결’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지만,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강행군 속에서도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다행인 점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분명 ‘정령의 숨결’이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는데…….”
숲에서 돌아온 너구리 영감은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숲을 헤맨 나머지 인원도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예상했던 것 보다 일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선배.”
엘프리드가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사죄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착잡하게 바라봤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정령의 숨결’을 찾지 못하면 아델라 씨는…….
슬퍼할 고양이 소녀의 얼굴을 떠올라 가슴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모두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던 그때.
-간질간질.
엘프리드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 쪽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내 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응?”
「드, 드디어 찾았어요, 뾰롱!」
내 손등 위에 올라와있는 작은 요정.
요정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