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95)화 (195/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95화

누구를 보낼까(1)

세 사람이 모여 있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평소보다 훨씬 긴장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모여 있는 거지?

나는 슬쩍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세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

천족 아슈미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눈을 깜빡거리는 것만 없으면, 예쁜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평온했다.

반면 이기석 본부장은 조금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느낌상 아슈미르와 발레리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의 주인 발레리안은 뭔가 불만스러운 느낌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웬만한 일에는 여유로운 표정과 태도를 유지하는 게 보통인데…….

아마 내가 오기 전부터 세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간 게 틀림없었다.

대충 분위기 파악이 끝났을 때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기석 본부장이 천천히 말을 꺼내놨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시현 씨.”

정말 미안하신 것 맞아? 본부장님은 항상 불쑥 찾아오셨던 것 같은데…….

마음속으로는 살짝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감시관님과 함께 시현 씨를 찾아온 것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아니, 이걸 부탁이라고 해야 할지…….”

“부탁이 아니라 사실상 명령 아닙니까?”

이기석 본부장이 어렵게 말을 꺼내던 도중, 발레리안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말 속에 담긴 분위기가 조금은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발레리안의 물음에 반응을 보인 건, 이기석 본부장이 아니라 아슈미르 쪽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명령이 아니라 요청일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천족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만한 불이익이 따르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차원의 균형 유지를 위해 도움을 부탁하는 겁니다. 협조를 거부하는 존재에게 굳이 저희도 혜택을 베풀 이유가 없습니다.”

“혜택이라……. 혜택이 아니라, 천족의 지위를 이용해 횡포를 부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말씀이 조금 지나치시군요.”

발레리안과 아슈미르의 기 싸움이 첨예하게 부딪치자, 중간에 있던 이기석 본부장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자, 잠깐! 두 분 다 너무 감정적인 대화는 멈춰주십시오. 일단 시현 씨에게 정확한 설명해 드리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

“…….”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닫고 말을 멈췄다.

겨우 기 싸움을 말린 이기석 본부장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솟아난 땀을 닦아냈다. 그도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기석 본부장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시현 씨도 길드 활동을 좀 하셨으니. 정부에서 어떻게 균열을 관리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계실 겁니다.”

“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죠.”

나도 직접 균열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고, 가디언즈 길드 시험 때 따로 공부하기도 한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균열은 정부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맞춰 관리되지만, 가끔은 예외가 생기곤 합니다. 자연재해급 균열이 발생했을 때가 대표적인 예시죠. 그런데 또 다른 경우가 뭔지 아십니까?”

또 다른 경우?

뭐였더라……. 공부하면서 봤던 것 같은데…….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이기석 본부장은 곧바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로 천족이 직접 정부에 요청했을 때입니다.”

“아! 맞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천족이 요청이 있으면 그 균열은 짜인 시스템으로 관리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천족이 도움을 요청하는 모양새지만, 사실은 아까 발레리안이 말했던 대로 일방적인 요구나 다름없었다.

정부로서는 워낙 많은 부분을 천족에 기대는 처지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했다.

“어제 천족 측에서 정부에 요청이 있었습니다. 페이슈타 감시관 쪽에서 발생이 예측된 균열 중에 이상 현상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청에 따라 이상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인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으음…….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불안한데…….

설마 그 인원에 나를 뽑으려는 건…….

“천족 측에서 요청한 인원 중에 시현 씨도 포함됐습니다.”

이런 미친…….

설마설마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험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마터면 그대로 내뱉었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진짜예요? 저를 이상 현상이 발생한 균열에 투입한다고요? 저를 왜요? 저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월등하신 분들이 엄청 많이 있을 텐데…….”

“저도 천족 측에서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이기석 본부장은 자신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슈미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시선을 받은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확한 기준을 이 자리에서 밝힐 순 없습니만. 확실한 건, 이상 현상을 대처하기 위해서 시현 씨의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경험도 별로 없는 저에게 왜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는지…….”

“제 생각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마을에 피해를 주던 괴수들을 퇴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건 뭐…….”

“그것 말고도 시현 씨가 균열에서 보여줬던 활약들은 평범하다고 말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단순히 전투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

아슈미르는 이전에 내가 균열에서 보였던 모습들을 예시로 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천족의 이런 완고함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봤기에 반박하는 걸 금방 포기했다.

“일단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어요. 천족의 요청으로 제가 투입 인원에 포함됐다고 해도, 제가 거절하려면 할 수 있지 않나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이기석 본부장은 내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발레리안이 다시 한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시현 씨가 요청을 거절하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받습니다. 일단 천족이 취급하는 영혼석을 구하기 힘들어질 거고, 길드 활동에도 지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길드 활동은 본업처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상관없지만, 영혼석을 구하기 힘들어지는 건 조금 곤란했다. 마계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려면 영혼석이 필요했으니까.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이기석 본부장이 다급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부담스러우실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위험한 건 아닙니다. 시현 씨와 함께 균열에 투입되실 분들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의 각성자들입니다. 길드 활동을 하실 때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실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발레리안이 곧바로 반박했다.

“단순히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시현 씨를 아무 곳에나 보낼 수 없습니다. 시현 씨는 마왕님께 그 지위를 인정받은 귀족입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비유이긴 하지만, 이 나라의 대통령이나 장관을 그 자리에 데려간다고 하면 본부장님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

“시현 씨에 대한 이런 부당한 취급은 제가 참을 수 없습니다. 당장에라도 마왕님께 보고를 드리고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발레리안은 평소에 볼 수 없는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아슈미르가 나섰다.

“이미 시현 씨는 여러 가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마계를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이곳의 물건을 마계로 가져가기도 합니다.”

“이미 협의가 끝난 것들입니다. 혜택이라는 표현은 억지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이전에 마계의 아이들이 차원의 규율을 어기고 넘어왔을 때, ‘뮈네크’가 반응하지 않아 구속하지 않았을 뿐. 그건 명백하게 규율을 흐트러뜨리는 일이었습니다.”

“…….”

“시현 씨에 대한 일은 저희 감시관들뿐만 아니라, 심판관과 집행관 모두가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저희는 당연히 시현 씨에 대한 압박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은 쉽게 넘길 수 없겠군요.”

발레리안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시현 씨가 마왕님의 인정을 받은 귀족의 신분임을 밝혔습니다. 조금 전의 감시관님의 말씀은 마왕님에 대한 적대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이에 질세라 아슈미르도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천족은 정해진 규율에 따라 움직입니다. 저희의 일을 방해한다면,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균형을 어지럽히는 죄인일 뿐입니다.”

방 안은 금방 두 사람이 내뿜는 사나운 기세로 가득해졌다. 강력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테이블 주변을 거세게 휘감자, 이기석 본부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살벌한 대치를 지켜보던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말렸다.

“에휴……. 두 분 다 그만두세요. 본부장님 하얗게 질리신 거 안 보이세요?”

“…….”

“…….”

두 사람은 이기석 본부장의 눈치를 보며 기세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시선을 계속 마주치며 신경전을 이어나갔다.

“제가 필요하다면 투입 인원으로 참여할게요.”

“시현 씨!!”

“저, 정말입니까?”

“…….”

내 결정에 발레리안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고, 반대로 이기석 본부장의 표정은 밝아졌다. 아슈미르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만족스러운 듯 발레리안과 신경전을 멈췄다.

“저만 억지로 소집된 게 아니잖아요. 다른 각성자 분들도 이렇게 요청을 받아서 참가하시는데, 굳이 저만 유난을 떨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안 씨.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모인다잖아요. 거기다 아마 보상도 빵빵할걸요. 제 말 맞죠, 본부장님?”

“물론입니다. 이번 임무에 소집되시는 문들은 모두 업계 최고 수준으로 대우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원하시면 무기, 장비 지원도 무료로 해드립니다. 그리고…….”

이기석 본부장은 혹여 내 마음이 바뀔까 봐 재빨리 혜택들을 늘어놨다. 발레리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시현 씨,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마왕님께 보고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만…….”

“괜찮아요. 괜히 문제를 크게 만들 필요 없어요.”

“으음……. 시현 씨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계속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발레리안은 약간 불만이 남은 듯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결정에 따르겠다 말했다.

하지만 다시 눈에 강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아슈미르와 이기석 본부장을 바라봤다.

“시현 씨가 임무에 참가하시는 건 동의하겠습니다. 대신 이쪽에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

이기석 본부장과 아슈미르가 궁금한 눈빛을 띠었다.

“시현 씨는 마왕님께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시현 씨가 안전하실 수 있게 배려를…….”

“그런 식으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저희가 안심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

“……?”

“시현 씨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호위를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발레리안의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그 호위는 마계에서 보낼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