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04화
소집(4)
“양쪽에 착용한 팔찌 보이시죠? 일정 수준 이상 마력을 끌어올리면 바로 경고음이 울릴 거예요. 정해진 마력 수치를 넘기면 패배하는 거니까 주의하세요.”
남진혁이 대결에 필요한 아티팩트 장비 착용을 도와주며 설명도 함께 이어나갔다.
“목적은 상대방의 방어 아티팩트를 파괴하면 됩니다. 최대한 상처를 입힐 만한 공격은 자제해 주시고요. 더 궁금한 것 있으세요?”
“아뇨,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아네는 감사 인사와 함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남진혁은 조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도 궁금한 것 없어?”
“……지금은 갑자기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가 제일 궁금하네.”
내가 우울한 분위기로 말하자. 남진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힘내, 형! 아까는 자신만만하게 나섰잖아.”
“리아네 씨가 당당하게 나서는데. 내가 눈치만 볼 수는 없잖아…….”
-짝!
“윽!”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뒤돌아보니 두 눈을 부릅뜬 서예린이 있었다.
“정신 차려! 저 재수 없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녀는 자신이 대결에 나가는 것처럼 두 눈에서 투쟁심을 불태웠다.
“긴장하지 말고 마음껏 싸워봐. 혹시 지더라도 아저씨가 다 알아서 수습해 줄 거야.”
“커흐흠…….”
갑작스러운 선언에 강희섭은 살짝 당황한 듯 헛기침했다. 하지만 서예린의 따가운 눈총 세례가 이어지자, 크게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 말대로야.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해봐. 내가 여기서 옷 벗고 깽판을 쳐서라도 수습할 테니까.”
“역시 아저씨가 최고야!”
“길드장님 그건 좀…….”
강희섭의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서예린과 남진혁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응원이었지만, 덕분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한번 최선을 다해볼게요.”
“아아! 얼른 해치워 버려. 끝나면 모두 회식이나 하러 가자고.”
“시현 형, 파이팅! 리아네 씨도 힘내요!”
“박살 내버려!”
나와 리아네는 길드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대결이 이뤄지는 장소로 향했다. 리아네는 살포시 웃으며 내게 중얼거렸다.
“좋은 분들이네요.”
“그렇죠?”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농장에 초대할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뭐……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우리 두 사람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반대편에서 아스토라 길드원들이 우리와 비슷한 장비를 착용하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껄렁껄렁한 걸음걸이에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눈빛에서는 우리를 얕잡아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아네도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차가워진 말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단 저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게 먼저겠군요.”
“…….”
나도 상대의 노골적인 태도에 불쑥 오기가 샘솟았다. 동시에 전투에 대한 흥분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와 아스토라 길드원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아까 가온 길드 대표라고 불렸던 남자였다.
“저는 대결의 심판을 맡게 된, 가온 길드 대표 박승준이라고 합니다. 대결 방식에 대해서는 각자 숙지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도하게 위험한 공격을 하거나, 불필요하게 살기를 드러낸다면 곧바로 대결을 중지시킬 겁니다. 제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불리한 판정이 내려질 겁니다.”
주의사항을 짧게 말한 박승준은 리아네 쪽을 바라봤다.
“그쪽의 여자분께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실 겁니까?”
리아네를 제외한 세 사람은 연습용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녀의 양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네. 저는 맨손으로 충분해요.”
-피식!
무기가 필요 없다는 말에 상대방 쪽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을 바라보는 리아네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보내는 신호에 맞춰 대결을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
“…….”
나는 어색한 연습용 검을 두 손으로 다잡으며 대결을 준비했다. 반면 상대할 두 사람은 아직도 실실 웃으며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박승준은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시작 신호를 보냈다.
“준비…….”
“…….”
“…….”
“시작!”
-파아앗!!
그의 시작 신호에 맞춰 눈앞에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콰직!!
-콰직!!
그리고 연달아 이어지는 섬뜩한 소리.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길드 대표와 관계자들, 심판으로 나선 박승준, 심지어 대결에 참여한 아스토라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모두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귓가에 리아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요?”
-투두둑…….
-투두둑…….
그녀가 양손을 펼치자 방어 아티팩트의 잔해가 떨어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아스토라 길드원이 멀쩡한 모습으로 착용하고 있던 그것이었다.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한 모두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한가지 감정만이 흘러넘쳤다.
리아네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러자 박승준은 움찔하며 몸을 떨더니, 심하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두 사람 모두 방어 아티팩트가 파괴되었으니 승패가 결정됐습니다. 대결의 승자는 가디언즈 길드원분들입니다!”
박승준이 우리의 승리를 선언하자. 구경하던 사람들 쪽에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맨손으로 저런 위력이 나온다고?”
“이게 도대체…….”
반대로 가디언즈 길드원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앗! 이겼어!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크하하하하!!”
“지, 진짜 대단해요!”
리아네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아스토라 길드원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낸 뒤.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얼굴에는 한없이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앞에 멈춰선 리아네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봤다. 그 모습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은율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은율이를 대하듯,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윽…… 스윽……
“정말 잘했어요, 리아네 씨.”
“……!!”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리아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실수를 인지한 나는 황급히 손을 내리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기분 나쁘셨죠?”
“아뇨. 괜찮아요. 칭찬해 주셔서 오히려 기뻤는걸요.”
그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가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던 그때.
아스토라 길드 대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요!”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분명하게 방어 아티팩트가 파괴됐습니다. 공격에 대처하지 못한 건 온전히 아스토라 길드측의 잘못이지 않습니까?”
박승준은 눈 앞에 펼쳐진 사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스토라 대표는 잠시 멈칫했지만, 금세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 주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력을 제한한 상태에서 맨손으로 저렇게 쉽게 방어 아티팩트를 부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거기다 두 개를 동시에?”
“으음…….”
아스토라 대표의 물음에 박승준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리아네의 공격이 빠르고 정확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방어 아티팩트를 파괴한 건…….”
“방어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그가 계속 억지를 부리자 박승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참다못한 강희섭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추잡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그쪽은 자존심도 없어?”
“크윽…….”
아스토라 대표는 굴욕감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방어 아티팩트에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결과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길드 대표님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뭐?”
“방어 아티팩트를 교체하고 재대결을 해야…….”
그가 재대결을 주장하자 강희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나! 누구 맘대로 재대결을 하겠다는 거야?”
“다른 대표님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모두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스토라 대표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대결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고 있었다.
리아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인 탓에 아티팩트의 결함 쪽으로 의견이 몰렸다. 이미 승리 선언까지 받은 우리로서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스토라 대표가 부리는 억지로 분위기가 점점 흐려지던 그때.
“재대결을 해도 상관없어요.”
“뭐……?”
리아네의 목소리에 강희섭이 놀라며 뒤돌아봤다.
“안 그래도 너무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시현 님만 허락하신다면 저는 한 번 더 재대결을 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판단을 맡기겠다는 듯 시선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아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저도 괜찮아요. 진짜 방어 아티팩트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대결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스토라 대표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하! 좋습니다. 바로 새 아티팩트로 교체하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말 붙일 틈도 없이 후다닥 자신들의 길드원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강희섭은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박승준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겠어? 억지 부리는 걸 굳이 들어줄 필요는 없는데.”
강희섭이 약간의 미안함과 걱정을 담아 물었다.
나와 리아네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