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23화
후계자 선정?(7)
빛이 모여들며 허공에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곳에는 바르바토스 가주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 카디스 영주. 잘 지냈는가?
“예……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주님께서는 저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맡기셔서 그런지 얼굴이 엄청 좋아 보이시네요.”
조금은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바르바토스 가주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카디스 영주가 뿔이 많이 났구먼그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라도 도움을 받아야지.
능청스러운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문의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는가? 혹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없겠지?
“모두 문제없습니다. 쌍둥이들은 완전히 농장에 적응해서 매일 이곳저곳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아미 양은…… 크흠, 아무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달달한 분위기로 가득한 아미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그만뒀다. 개인적인 연애사를 가문의 어른에게 알릴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그런가? 쌍둥이의 어머니, 에르마가 들으면 조금 서운해하겠구먼.
근황에 관해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바르바토스 가주는 한결 진지해진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카디스 영주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는 건, 이제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겠지?
“결단이라고 할 게 있습니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내가 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자, 바르바토스 가주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답이 나와 있었다니. 나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애초에 후계자로 적합한 사람은 한 명뿐이잖습니까.”
그는 나에게 가문의 후계자 선정을 맡기겠다며 후보자들을 보냈지만, 사실 후계자에 적합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안드라스에 빠진 아미는 아예 후계자에 관심이 없었고, 쌍둥이들은 후계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오직 크로셀만이 후계자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농장에 함께 지내며 크로셀에 대해 느낀 것은 굉장히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느낌이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한 행동도 없었고, 농장 식구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크로셀이 가장 후계자에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예이거’.
반역을 일으키려 했던 자의 아들이다.
가끔 사극에서 보면 3대를 멸할 정도로 죄의 무게를 무겁게 보는 게 반역죄다. 그런데 바르바토스 가주는 크로셀을 후계자 후보로 나에게 보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의도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뭐가 말인가?
“정말로 크로셀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도 괜찮은 겁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질문에 바르바토스 가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네만 인정해 준다면 나는 상관없다네. 오히려 그 말은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야. 자네는 크로셀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도 상관없는 건가?
“저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훗날 크로셀이 내 자리를 잇게 되더라도, 자네와 바르바토스 가문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될 거라 믿어도 되겠는가?
역시…….
바르바토스 가주는 후계자 선정을 맡긴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크로셀을 후계자로 인정해도 될지 허락을 구한 것에 가까웠다.
그는 나와 바르바토스 가문의 관계가 오래 이어지길 원했고. 후계자로 점찍은 크로셀에 대해 내가 불만을 품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크로셀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 껄끄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대놓고 반대하는 쪽도 생길 거고요.”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야겠지. 또 그 아이가 이겨내야 할 문제고.
“만약에 제가 앙심을 품고 아미 양이나 쌍둥이들을 후계자로 추천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뭘 어쩌긴 어째. 뒤늦게라도 자네가 추천한 아이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작해야지.
“허어…….”
이 아저씨 완전 대책 없는 사람이네.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바르바토스 가주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은 자네의 힘이 우리 가문에 필요하다네. 훗날 자네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후계자는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일이야.
“쩝…….”
-그리고 자네가 합리적인 판단을 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거라네. 차라리 용서해 주면 용서해 줬지, 악의적인 마음을 품을 만큼 독한 성격은 아니지 않나?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칭찬 같으면서도, 뭔가 물렁한 사람 취급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네요.”
-하하! 기분 탓일세, 기분 탓! 내가 카디스 영주에게 해줄 말이 칭찬밖에 더 있겠나.
바르바토스 가주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나의 뚱한 표정도 길어졌다.
-아무튼, 정말 고맙네. 억지스러운 내 부탁을 들어줘서.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요.”
-이 빚은 조만간 갚을 수 있으면 좋겠군. 바르바토스 가문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하게. 자네의 부탁이라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받아들일 테니.
그렇게 바르바토스 후계자 문제는 조용히 마무리됐다.
자연스럽게 농장에 머물던 후계자 후보들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쌍둥이들은 농장에 정을 많이 붙였는지, 돌아가기 싫다며 눈물을 보였다.
보기 드물게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옆에 있던 메이드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꽤 오랜 시간 나와 은율이가 쌍둥이들을 안아주며 달랬다. 그리고 언제든지 농장에 놀러 와도 된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쌍둥이들은 눈물을 멈췄다.
아미는 떠나기 직전까지 안드라스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안드라스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농장 식구들과 짧은 작별인사를 나눈 크로셀은 마지막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시선을 맞추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나를 따라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마지막에는 감사의 뜻을 담아 내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바르바토스 가문의 인물들이 떠나가고.
농장에는 다시 평범한 일상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