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32)화 (232/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32화

마계로 돌아가는 길(4) 

“으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만들어낸 세상이라니?”

“저희도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나와 릴리아는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안드라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시현 님, 지금 이 장소. 뭔가 기억나시는 게 없습니까?”

“여기요? 으음…… 조금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안드라스는 손가락으로 널찍한 초원을 가리켰다.

“저쪽이 울타리. 그 옆에 축사와 창고…….”

“……?”

“딸기밭이 있는 곳. 그리고 저쪽이 농장 건물.”

“아!”

나는 안드라스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깨달았다. 왠지 익숙하다 느낀 이곳은 매일 출근하는 마계농장의 지형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게 펼쳐진 울타리나 농장 건물들이 없어서 몰랐는데. 안드라스가 힌트를 준 덕분에 눈치챌 수 있었다.

“뭐야, 오라버니? 왜 둘이서만 이야기해. 나도 알려줘!”

“너는 직접 본 적 없어서 모를 거야. 여기는 나와 시현 님이 일하는 농장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으음? 그럼 시현 오라버니가 농장의 모습을 본떠서 이 세계를 만들었단 말이야?”

“아마도…….”

“자, 잠깐! 잠깐만요.”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화를 중지시켰다.

“근데 왜 제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거죠? 안드라스 씨도 농장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안드라스 씨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농장의 모습은 알고 있을지언정, 벨리온 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로 몇몇 행적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

“저분이 가짜로 만들어진 벨리온 님이 아니라면, 여기서 벨리온 님을 실체화시킬 수 있는 분은 시현 님밖에 없습니다.”

벨리온은 작게 키득거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큭큭, 나도 진짜는 아니야. 겨우 사념체가 실체화된 것뿐. 뭐…… 그렇다고 가짜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네. 내가 가진 기억과 생각은 진짜로부터 비롯됐으니까.”

“다른 마수들도 전부 시현 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마수를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누가 또 있겠습니까?”

“…….”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현 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기에, 불안정한 차원문 속에서 우리를 이끌 수 있었던 겁니다.”

안드라스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넓게 펼쳐진 초원, 푸르른 숲, 마수들과 스승님까지.

정말 내가 이 세상을 만들어냈다고?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안드라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이 세상을 누군가 만들어냈다면, 여기서는 내가 가장 적합해 보였으니까.

“와! 그게 진짜라면 시현 오라버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네? 대단해!”

릴리아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글쎄……?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내 실력이 허접해서 그런지, 대충 둘러봐도 무척 엉성하게 만든 것 같은데.”

농장의 풍경과 비슷하긴 했지만, 진짜 완벽하게 구현해 낸 건 아니었다.

초원의 끝자락과 하늘은 미구현 됐는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고, 작은 벌레나 지저귀는 새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로운 세상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작은 세트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안드라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현 님의 말대로 조금은 엉성해 보이고, 별것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결과물의 대단함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이걸 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겁니다.”

안드라스는 흥분을 자제하기 힘들었는지, 설명을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차원에 대해서 다양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천족도 창조하는 능력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 힘쓸 뿐입니다. 마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마왕님도 창조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시현 님이 저를 놀라게 한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고 있습니다.”

그의 진심이 담긴 설명에 나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졌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언젠가 이 능력 때문에 더 큰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릴리아가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현 오라버니가 이 세상을 만들었고,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면 여기서 나가는 건 어떻게 하죠?”

그녀의 질문으로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던 목적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천족의 등장으로 일이 조금 꼬여 버렸지만, 원래 우리가 하려던 일은 릴리아를 마계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시현 오라버니가 이곳을 만들었으니까. 어떻게 나가는지도 알고 계시겠죠?”

“시현 님?”

릴리아와 안드라스가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당연히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벨리온을 바라봤다.

“왜 날 쳐다봐? 만약에 내가 여길 빠져나가는 법을 알았으면, 제일 먼저 박차고 나갔을 거다.”

안타깝게도 벨리온 역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혹시나 해서 주변에 있던 마수들을 둘러보았지만…….

-무우우?

-쿠우?

「왜 쳐다보는 거야, 뾰?」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아까 연구소에서 만든 ‘차원문 장치’를 다시 만들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좌표를 확정할 수 있잖아요.”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긴 합니다. 문제는 장치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장비가 모두 부족합니다.”

“아…….”

초원과 숲이 세트장처럼 펼쳐진 이곳에 ‘차원문 장치’를 만들 장비와 재료가 있을 리 없었다.

뭐야…… 우리 여기에 갇힌 건가?

당황스러움에 머리가 어질해졌다.

“시현 오라버니, 뭐 생각나는 거 없으세요?”

“여기서 믿을 수 있는 건 시현 님밖에 없습니다.”

신뢰가 가득한 두 사람의 눈빛.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더 할 뿐이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성립됐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여기서 나가는 방법 같은 걸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저 신뢰 가득한 눈빛을 무시할 순 없으니. 내 나름대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한동안 의미 없이 주변을 돌아다녀 보고.

마음속으로 ‘열려라. 참깨’도 외쳐보고.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함께 방법을 찾던 안드라스와 릴리아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흐르고.

“어휴…….”

계속 방법을 찾아 끙끙대던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잔디밭에 털썩 누워버렸다. 복잡한 생각은 떨쳐내 버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은 뿌연 하늘이었지만,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 그 망할 천족놈들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릴리아를 무사히 마계로 돌려보내고, 은율이랑 저녁 먹고 놀아주고 있을텐데…….

문득 은율이가 보고 싶어 져서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냈다. 저장된 은율이 사진이라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니…… 여기서 통신이 연결된다고?

당연히 통신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휴대폰 화면에는 신호 강도를 나타내는 안테나가 최대로 표시돼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아빠?

“은율이니?”

-응! 할머니한테 전화해달라고 했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아빠 언제 와?

“으음…… 아빠는 조금 늦을 것 같은데?”

-…….

늦을 것 같다는 말에 은율이는 대답을 멈췄다. 실망하는 기색이 팍팍 전해오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갇혔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일단 은율이와 통화를 금방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는 게 최우선이었다.

통화가 연결된다는 걸 알았으니 곧바로 발레리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실망한 은율이를 달래주려 입을 열려던 순간.

“흐음…… 그 목소리는 누구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벨리온이 휴대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헉?!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다. 그보다 여기서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냐니까?”

“어…… 제 딸 ‘은율이’인데요?”

“흐음…….”

벨리온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빠?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

“으응. 스승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스승님? 스승님이 뭐야?

“어…… 그러니까. 선생님이랑 비슷한 거야.”

-안드라스 선생님처럼?

통화 소리를 들은 안드라스와 릴리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도 이곳에 통신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율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고민을 끝낸 벨리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자야.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그랬지?”

“예! 물론이죠.”

“어쩌면 지금 네가 대화하고 있는 아이가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예?”

벨리온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좀 더 설명해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예전에 명예 결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내가 도와줬던 것 기억나지?”

“당연히 기억나죠.”

결투 상대였던 글라디온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벨리온이 유령처럼 나타나서 도움을 줬다.

워낙 아찔한 순간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구슬의 힘이 끝나면서 완전히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소녀의 목소리로 다시 의식을 되찾고 이 세계에 머무르게 된 거다.”

“……그게 은율이의 목소리라는 겁니까?”

벨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목소리는 정확히 기억나. 분명히 네 딸의 목소리였어.”

“으음…….”

“내 생각에는 은율이라는 아이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고 있는 것 같아.”

“시현 오라버니의 딸이요?”

“그게 정말입니까, 벨리온 님?”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어.”

벨리온의 말에 안드라스와 릴리아도 관심을 드러냈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한 채 생각이 깊어졌다.

은율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은율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어도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서 지냈던 벨리온의 주장이었기에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약에 벨리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은율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은율이에게서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거지?

나는 또 다른 고민으로 다시 한번 생각이 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