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40화
슈나르페 가문의 초대(2)
카네프 오라버니?
일단 카네프에게 누군가 살갑게 구는 것 자체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귀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호칭도 굉장히 신선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려던 순간.
다가온 여자를 향해 카네프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자이나. 그동안 잘 지냈냐?”
“제가 잘 지냈는지 궁금하시기는 하셨어요? 매번 아들을 통해 초대장이나 편지를 전해도 한 번의 답장도 안 해주셨으면서. 정말 너무하세요!”
“끄응…….”
여자는 카네프에게 서운한 감정이 많이 쌓여 있었는지, 쉴 틈 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도 카네프는 살짝 인상만 찌푸릴 뿐,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평소에 내가 아는 카네프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안드라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귀부인을 소개했다.
“시현 님, 저분이 슈나르페 가문의 안주인, 제 어머니이십니다.”
“아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말투를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릴리아의 외모나 성격이 전혀 안드라스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릴리아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듯했다. 특히 말투나 눈빛,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사장님의 친족이신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게는 외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카네프 님과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어렸을 적부터 카네프 님과 친분을 쌓은 거고요.”
릴리아가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처럼, 혈연으로 이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시달리던 카네프는 두 손을 내저으며 귀부인의 불평을 막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불평은 그만! 계속 이런 식이면 지금 당장 돌아갈 거야.”
카네프가 잘못을 인정하자 귀부인은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을 멈췄다. 그리고 ‘이쯤에서 봐 드릴게요.’라는 눈빛으로 생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중요한 손님이 아니잖아. 가문의 안주인이 중요한 손님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어머나?!”
귀부인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그녀는 황급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황한 귀부인의 시선이 나와 딱 마주쳤다. 내가 순간 멈칫하는 사이,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쪽으로 다가섰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카네프 오라버니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바람에 제가 중요한 손님을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릴리아를 찾는 데 도움을 주신 카디스 영주님 맞으시죠?”
나는 금방 표정을 관리하며 준비한 인사말을 읊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디스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저택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나르페 부인.”
“저도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저는 슈나르페 가문의 ‘자이나’라고 해요. ‘슈나르페 부인’ 같은 딱딱한 호칭 말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자이나.
커다란 가문의 안주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당황한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호호! 정말 괜찮아요. 아들뿐만 아니라 카네프 오라버니도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두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저에게는 카디스 영주님이 가족처럼 가깝게 느껴진답니다.”
자이나는 안드라스와 카네프를 차례로 바라보며 나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그럼 자이나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자이나 누나’라고 불러도 상관없는데…….”
“……??”
이번에는 표정 관리에 실패해서 얼굴이 멍해졌다.
“어머니??”
“자이나, 너도 적당히 해라. 늙어서 주책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자이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가 어때서요? 지금도 파티장에 가면 젊은 남자 귀족들이 어찌나 뜨거운 눈길을…….”
“어머니…… 제발…….”
“쯧쯧.”
진심으로 당황한 안드라스가 사정하듯 그녀를 말렸고. 카네프는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자이나에 비하면 릴리아는 얌전한 편일지도……?
나와 인사를 끝낸 자이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긴장감에 여우 귀를 움찔거리는 은율이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반짝이며 은율이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어머나! 여기 귀여운 손님도 있었네.”
“아…….”
은율이는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자 쑥스러운 듯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나는 작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은율아, 자이나 님께 인사드려야지. 우리 농장에서 열심히 연습했잖아.”
“응…….”
나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은율이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자이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떠듬떠듬 인사를 이어나갔다.
“아, 안녕하세요…… 은율이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족의 예법을 생각하면 아주 짧고 투박한 인사말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대단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엄청나게 두려워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정말 크나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네프와 안드라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작은 여우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자이나도 환한 미소와 함께 은율이의 인사에 대답했다.
“나도 반가워, 은율아. 안드라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안드라스 선생님?”
“응. 은율이가 너무 똑똑하다면서 나한테 매번 자랑했어. 마계어를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받아쓰기도 척척 한다던데?”
“응…… 저번에 100점 받았어.”
긴장한 와중에도 깨알같이 받아쓰기 100점을 자랑하는 은율이.
“와아! 은율이는 대단하네.”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칭찬하자, 은율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 동시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이나가 익숙한 안드라스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간 덕분에 은율이도 긴장을 덜 할 수 있었다.
“옛날에 안드라스는 게을러서 받아쓰기를 엄청나게 못 했거든. 0점을 받고 아버지한테 혼나서 펑펑 운 적도 있단다.”
“선생님이?”
은율이의 순수한 눈동자가 안드라스 쪽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흑역사 공개에 아들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머니 언제적 이야기를…….”
“큭큭큭!”
“큭큭큭!”
나와 카네프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키득거렸고, 안드라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흑역사 공개로 안드라스는 수치스러움을 얻었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은율이의 움찔대던 여우 귀도 다시 쫑긋 세워졌고,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긴장감을 털어낸 것 같았다.
자이나는 은율이의 변화를 금방 눈치채고 더욱 과감하게 다가섰다.
“은율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될까?”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은율이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
부탁을 받은 은율이가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을 보아하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겨도 돼?’라고 묻는 느낌.
나는 허락의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은율이는 천천히 자이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이나는 가까이 다가온 은율이를 와락 안아 들었다. 은율이는 낯선 사람의 품이라 그런지 조금 뻣뻣하게 움직였지만, 거부하는 모습이나 싫어하는 표정은 짓지는 않았다.
“꺄아앗! 너무 귀엽다. 살결 부드러운 것 좀 봐!”
자이나는 품 안에 은율이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요란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혹시 은율이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얌전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편, 카네프와 안드라스는 그런 자이나를 약간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아직 두 사람도 은율이를 저렇게 인형 안는 것처럼 꼬옥 껴안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은율아, 언니랑 같이 저택 구경하러 갈까?”
자이나가 은근슬쩍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괜히 심술이 난 카네프가 불쑥 끼어들었다.
“언니? 은율이한테 그 호칭은 말도 안 되잖아. 내 생각에는 할머니가…….”
-찌릿!
‘할머니’라는 말에 자이나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카네프를 노려봤다. 품 안에 은율이만 없었으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은 분노에 카네프뿐만 아니라, 나와 안드라스도 몸을 움찔 떨었다.
순식간에 우리를 제압한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은율이를 바라봤다.
“은율아. 그럼 ‘큰언니’랑 같이 저택 구경하러 가자. 중간에 맛있는 간식도 챙겨줄게. 알았지?”
자이나는 ‘언니’에서 ‘큰언니’로 호칭을 바꿔 말했다. 그러자 품 안의 은율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은 여우 소녀에게 홀린 듯, 헤벌쭉 웃으며 저택 안쪽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일행들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사용인들도 황당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카네프 님, 시현 님. 제가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안드라스는 나와 카네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이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안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