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49화
마왕성에서 온 의뢰(2)
카네프가 미간을 찡그리며 짜증을 냈다.
“또 마왕성 놈들이야? 이 녀석들은 배려심도 없나? 아침부터 귀찮게 하네.”
“역시…… 농장으로 아무 제약 없이 차원 도약할 수 있으려면 마왕성에서 오는 경우밖에 없으니까요.”
안드라스는 카네프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디스 영주! 카디스 영주! 급한 일이라오. 빨리 나와서 마왕님의 전언을 받으시오!”
마왕성에서 찾아온 사람은 눈치도 없이 재촉했다. 이제는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카네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자식들 안 되겠어. 오늘 예의와 배려가 무엇인지 몸소 느끼게 해줘야겠어.”
예의, 배려…….
카네프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언급하며 식당을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당황한 안드라스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시, 시현 님!”
“알았어요. 제가 따라 가볼게요.”
평화로운 식사시간을 방해받은 건 나도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카네프에게 ‘예의’와 ‘배려’를 교육받을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 좀 챙겨주세요.”
아이들을 부탁하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평화로운 농장의 아침부터 흉흉한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카네프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벌써 건물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입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열려 있는 건물 현관문을 통해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거 왜 이러시는 거요. 나, 나는 마왕님의 전언을…….”
“마왕의 전언이고 나발이고. 너희들은 예의도 없어? 아침 식사시간인 거 몰라?”
“크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급하게 전해야 할 일이라…….”
“미안하게 생각하긴 개뿔! 미안하다는 놈이 남의 집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소리를 질러? 너는 오늘 나한테 예절교육 좀 받아야겠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카네프가 소환해낸 사슬들이 순식간에 중년 남자 마족과 그 일행을 휘감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두의 얼굴이 금방 새하얗게 질려갔다.
“어…… 어, 어?! 카, 카디스 영주우우!”
“사장님~! 멈춰요!”
나는 남자 마족을 감싸듯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는 재빨리 나의 등 뒤에 달라붙으며 몸을 숨겼다. 진짜 무서웠는지 내 팔을 붙잡은 손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카네프는 사슬들을 살짝 뒤로 물리며 으르렁거렸다.
“시현, 거기서 당장 나와. 저 녀석들은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릴 놈들이야.”
“왜 또 이분들한테 신경질을 내세요. 이분들은 그냥 위에서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이잖아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잖아. 태도가!”
“전령은 원래 그렇게 행동하는 거래요. 마왕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이니까요.”
남자 마족이 빼꼼 얼굴을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카디스 영주의 말이 정확하오. 진짜 예의와 배려를 알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저 자식을 확 그냥?!”
“우으으…….”
저기요. 괜히 깐족거리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지금 ‘카네프의 예절 교실’이 열리기 일보 직전이니까.
나는 경고의 뜻을 담아 중년 마족을 바라봤다. 눈치가 아주 없진 않은지 금방 입을 다물며 찌그러졌다.
“이 정도만 하고 다시 들어가서 식사나 마저 하세요. 그 무서운 사슬들도 다시 집어넣으시고요.”
“……쳇!”
결국, 카네프는 내 말에 따라 사슬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도 사라졌다. 남자 마족과 그 일행들의 안색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슬을 집어넣은 카네프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현관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억지로 돌려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농장의 평화로운 아침을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남자 마족을 바라봤다.
“오랜만입니다.”
“크흠, 큼! 오랜만이요. 카디스 영주.”
“제 취임식 때 뵀었던 게 마지막이었죠?”
“허허, 벌써 시간이 그렇게…….”
여러 번 만남을 가졌던 터라 중년 마족과 친근하게 안부 인사를 나눴다.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위압감은 많이 사라지고, 약간 푸근한 옆집 아저씨 느낌도 났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아까 하시는 말씀으로는 급한 일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렇소, 카디스 영주. 일단 이 편지부터 받으시오.”
“……?”
중년 마족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나에게 전했다. 편지 봉투에는 마왕을 나타내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 안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으음…… 이 허영심 가득한 도입부는 여전하네.
이제는 익숙해진 귀족 특유의 미사여구를 잘 걸러내며 편지의 내용을 해석해 나갔다. 내용을 훑어보던 중 계속 눈에 밟히는 단어가 있었다.
야쿰…….
편지 전반에 걸쳐 ‘야쿰’이라는 단어가 계속 언급됐다. 그런데 그 ‘야쿰’이 농장의 ‘야쿰’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들고 있던 편지를 내리며 중년 마족을 바라봤다.
“대충 읽어봤는데. 혹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야쿰이 있나요?”
“편지의 내용대로요. 평화롭던 마을에 갑자기 한 무리의 야쿰이 나타나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오.”
“갑자기 문제를 일으켰다고요?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는데요?”
“그렇소.”
중년 마족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야쿰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웬만해선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마수다. 과거에 야쿰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경우는 모두 명확한 원인이 있었다.
내 반응을 본 중년 마족이 설명을 덧붙였다.
“카디스 영주만큼 야쿰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기본적으로 온순한 성격이라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적인 상황과 많이 다르오. 문제를 일으키는 야쿰들은 과도한 공격성으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중이오.”
“야쿰 무리가 그렇게 날뛰고 있다고? 그것 참…… 지옥이 따로 없겠네.”
카네프가 한마디 거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중년 마족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네프가 말한 대로 정말 지옥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고 볼 수 있다.
날뛰는 야쿰 무리라니…….
나도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뿐이지만, 그 위험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괜히 이 농장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결계를 설치한 게 아니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됐을 때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전령이 왜 마왕의 명을 받아 나를 찾아온 건지 대충 눈치챘다.
마왕성이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날뛰고 있는 야쿰.
그리고 자칭 최고의 야쿰 전문가인 나.
“하아…… 설마 저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건가요?”
“이미 마왕성에서 손 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한 상태요. 하지만 최악의 상황만 억제하고 있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했소. 마왕님께서는 카디스 영주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소.”
“흐음…….”
“만약에 그대가 나서지 않는다면. 마왕성에서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
최후의 수단.
그건 아마도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마왕성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다른 농장 식구들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멀리서 눈치만 살폈다.
인기척을 느낀 중년 마족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잘됐군. 용마족 메이드, 자네에게도 전해야 할 편지가 있다네.”
“네? 저요?”
갑자기 호명된 리아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머지 사람들도 의아함을 느끼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잘은 모르지만, ‘붉은 비늘 일족’의 마을에서 보내온 편지일 걸세.”
“이게 제 고향에서 온 편지라고요?”
리아네는 황급히 편지를 받아들었다. 봉투를 뜯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읽어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마지막에는 처음의 미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리아네씨,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어 있어요?”
“시현님…….”
리아네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난 마을…… 고향이 없어질 위기래요.”
“네?”
“갑자기 나타난 야쿰 무리가 마을의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래요. 아직 마을 중심부는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있지만, 더 피해가 심각해지면…….”
“……?!”
리아네의 안타까운 소식에 농장 식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중년 마족에게 진위여부를 묻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야쿰들은 굉장히 넓은 지역에 피해를 주는 중인데. 특히 ‘붉은 비늘 일족’의 피해가 극심하다고 들었소. 꽤 오래전부터 마왕성에도 지원을 보냈지만, 겨우 버텨내는 게 한계라고…….”
야쿰에게 피해를 당한 곳이 리아네의 고향이라니…….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쓰라렸다. 어떤 위로의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 리아네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딱 한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리아네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시현님…….”
“저 잘 아시잖아요. 야쿰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전문가라는걸.”
내 위로가 조금 통했는지, 그녀의 눈동자에 약하게나마 밝은빛이 돌아왔다.
“카디스 영주! 직접 나서주는 것이오?”
중년 마족이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격하게 반색했다.
“제가 마족은 아니지만, 마왕님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죠.”
“오오! 이 정도의 충심이라니?! 그대의 어려운 결정을 마왕님께서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그는 제대로 감동받은 표정을 짓더니, 내 두 손을 꼭 잡고 크게 흔들었다. 팔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그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중년 마족에게서 떨어져나오자마자, 이번에는 리아네가 내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저돌적인 포옹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계속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리아네는 복받쳐오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계속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살짝 그녀를 껴안으며 등을 두드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