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50화
마왕성에서 온 의뢰(3)
마왕성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마왕의 부탁을 거절하기엔 여러 가지 의미로 껄끄러웠고, 무엇보다 리아네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전령의 역할을 완수한 중년 마족은 굉장히 기뻐했다.
어려운 결정을 몇 번이고 치켜세우며, 마왕성에 나의 용기와 충심을 상세히 전달하겠다고 확언했다.
여담으로 중년 마족은 농장을 떠나기 전…….
“크흠, 그러고 보니 카디스 영지에서 만들어지는 ‘벌꿀 맥주’가 아주 유명하던데. 조금 맛볼 수 없겠는가?”
“저 자식이…….”
그는 카네프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벌꿀 맥주’ 이야기를 꺼내 다시 한번 신경을 긁었다. 당연히 카네프는 폭발했고 나와 다른 농장 식구들이 전부 달려들어 말려야 했다.
“흐,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카네프 님?! 저 엘프리드예요. 사슬 좀…… 으아악!!”
“얼른 가세요. 이번에는 진짜 위험해요.”
중년 마족과 일행은 질겁하며 후다닥 농장을 떠나갔다. 중간에 소란스러움에 은율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들 중 몇 명은 걸어서 돌아가기 힘들었을 수도…….
그렇게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이 확정되고 나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비는 딱히 필요 없었지만, 농장과 영지에는 따로 대비를 해둬야 했다.
그나마 영지는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각각 영지 행정관과 재정관에 임명된 두 사람에게 영지 일을 부탁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자리를 비우게 돼서. 제가 없는 동안 영지를 잘 맡아주세요.”
“마왕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어쩔 수 없죠. 마시고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영지는 너무 걱정하지 마. 며칠 정도는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영주님은 맡은 일에나 집중해. 아! 그리고 돌아올 때 선물 잊지 말고.”
라구스와 로커스는 영지를 잘 돌보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영지의 관리를 맡겨두고.
이제 남은 건 농장.
일단 가장 중요한 역할인 나와 고향이 위기에 처한 리아네는 당연히 떠나는 쪽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생각 외의 한 사람이 일행에 추가됐다.
“리안 씨도 함께 가신다고요?”
“네, 시현 씨. 마왕님의 명을 받아 시현 씨를 돕게 됐습니다.”
바로 발레리안.
오랜만에 농장으로 찾아온 그는 함께하게 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직접 알렸다.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발레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제가 함께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워낙 바쁘시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에 합류하시는 게 조금 이상해서요.”
“제가 바쁜 건 사실입니다만. 이번 일의 중대성을 생각하면 다른 일은 잠시 미뤄두는 게 당연합니다. 거기다 복잡한 사정으로 제가 직접 나서야 할 사정이 있거든요.”
복잡한 사정?
발레리안이 이번 의뢰에 합류한 것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급한 이야기들 때문에 질문은 가슴에 묻어둬야 했다.
발레리안에 이어 또 의외의 한 사람이 합류를 선언했다.
“나도 간다.”
“예에? 사장님도 가신다고요?”
나는 몸을 들썩일 정도로 놀라며 카네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히려 카네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사장님이 스스로 뭘 하겠다고 나서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아서…… 그리고 농장을 계속 지키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원래는 그렇긴 한데. 나 없어도 농장은 별문제 없을 것 같고. 너무 오랫동안 여기에 있어서 그런지 지루하기도 해서 말이야. 오랜만에 멀리 바람이나 쐴 겸 너희랑 같이 나갈 거야.”
으음…….
카네프가 합류한다는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엄청난 실력자인 그가 합류한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그 엄청난 실력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두려웠다.
카네프는 내 복잡한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양쪽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같이 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뇨.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그럼?”
나는 카네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거 마왕님의 의뢰라는 거 알고 계시죠? 거기다 리아네 씨 고향의 생사가 걸린 아주 중요한…….”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적어도 방해는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조용히 있을 거야.”
“…….”
조용히 있겠다는 말에 선뜻 믿음이 생겨나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카네프를 가로막을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발레리안에 이어 카네프가 4번째 일행으로 합류했다.
“그럼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건가요? 농장 일은 안드라스 씨와 엘린에게 부탁하면…….”
“나도 갈래!”
함께할 일행을 확정하려던 그때, 여우 소녀가 번쩍 손을 들며 합류를 선언했다.
“으, 은율이도 가려고?”
“응!”
앙다문 입술과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반면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은율아. 이건 놀러 가는 게 아니야.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해결하러 가는 거야.”
“나도 아빠 도와줄래.”
은율이는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물론 굉장히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동행을 허락할 순 없었다.
막무가내인 여우 소녀 때문에 내가 난처해 하자, 지켜보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가 나섰다.
“시현 님이 일을 하고 계실 동안 같이 새로운 수업을 해볼까요? 저번에 저택에서 보았던 악기에 관심이 있었죠? 제가 연주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배가 없는 동안 내가 열심히 놀아줄게. 오빠랑 놀자.”
은율이는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싫어!”
“크헉?!”
“으윽…….”
두 사람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은율이의 ‘싫어!’가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힘없이 무릎을 꿇고 좌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발레리안과 리아네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나도 아빠랑 있고 싶어. 나 버리고 가지 마.”
“은율이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니야. 잠시만 중요한 일을 끝내고 오는 거야.”
아무래도 은율이는 내가 오랫동안 떠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나를 따라가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울먹이는 은율이의 모습에 마음이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에 쉽사리 딸을 동행시킬 수 없었다.
계속 떼를 써도 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은율이는 내 손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여우 소녀가 향한 곳은 카네프가 앉아 있는 의자 앞이었다.
“사장니임.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은율이는 축 늘어진 여우 귀와 물기 가득한 눈동자로 올려봤다. 부탁하는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
담담한 표정을 짓던 카네프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은율이를 번쩍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당연히 되지. 안 될 게 뭐 있어?”
“정말?”
축 늘어져 있던 여우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그래.”
“와아아아!”
은율이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카네프 품에 안겨들었다.
“사장님 최고! 멋있어! 사장님이 아빠 다음으로 제일 좋아!”
“그래, 그래.”
카네프는 은율이의 찬사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농장 식구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발레리안은 살짝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은율이는 상상 이상으로 눈치 빠르고, 똑똑하네요.”
“하하…… 가끔은 저도 깜짝깜짝 놀라니까요.”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맛있는 음식도 많고 둘러볼 곳도 많거든요. 특히 온천으로 굉장히 유명합니다.”
“오…… 그런가요?”
“저도 한 번 경험해 봤는데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임무가 우선이겠지만, 여유가 된다면 이번 기회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온천이라…….
요즘같이 쌀쌀한 날씨에 뜨끈한 물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발레리안은 카네프와 은율이가 있는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은율이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은율이가 있는 곳이 마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일지도 모르니까요.”
카네프가 소중하게 무릎 위에 앉혀놓은 존재를 마계의 누가 건드릴 수 있을까?
나는 발레리안의 말에 마음속 깊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리아네, 발레리안, 카네프, 마지막으로 은율이.
이렇게 5명이 마왕성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농장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