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52화
용마족의 마을(2)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주인공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불만을 표현한 사람은 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용마족 남자였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두꺼운 털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갑옷 차림,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말할 때마다 꿈틀거렸다.
“마왕성을 믿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겨우 찾아낸 방법이 저 평범해 보이는 놈이란 말입니까?”
“하르간! 우리를 도우려고 멀리서 오신 분들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삐딱한 태도의 용마족 남자에게 디우르가 소리쳤다. 하지만 하르간이라 불린 그는 공격적인 태도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미쳐 날뛰는 야쿰들이 언제 마을로 몰려내려 올지 모르는데. 저놈들에게 마을의 생사를 맡기란 말이야? 너야말로 정신 차려라, 디우르!”
“하르간, 저놈이……!”
두 용마족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디우르와 하르간을 중심으로 다른 용마족들도 서로를 향해 험악한 기세를 피워냈다.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두 패거리 간에 살 떨리는 긴장감이 가득해졌다.
험악한 분위기에 불안한 표정으로 발레리안을 바라봤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작게 웃어 보이며, 손짓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두 그만!”
“…….”
“…….”
“중요한 손님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들이야!”
촌장 바단이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용마족들은 순식간에 험악한 기세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적대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안하오, 카디스 영주. 문제를 해결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많은 마을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민감해진 상황이라오. 넓은 아량으로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바단은 용마족들을 대표해서 내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사과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탁자 위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다.
긴장감이 약간 느슨해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민감한 반응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왕성 쪽에서도 지금까지 대책을 내놓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는 손짓으로 모두의 시선을 내 쪽으로 이끌었다.
“여기 계신 시현 씨가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요.”
“…….”
자신만만하게 나를 내세우는 발레리안을 보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다니…… 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단은 눈을 빛내며 다시 발레리안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난폭해진 야쿰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만약에 시현 씨가 해내지 못한다면 마계에서는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오…….”
그런데 발레리안의 이런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통했는지 용마족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의심만이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반신반의하는 느낌이었다.
“저 뿔도 없는 사람이 진짜 야쿰을 막을 수 있다고?”
“마왕성에서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보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쾅!
“마왕성의 사탕발림에 또 넘어갈 생각이야? 마을의 생사가 달린 문제를 정말로 저들에게 맡기려는 거야?”
하르간을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르간의 말이 맞아. 믿고 맡겼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때는 정말 우리 마을은 끝장이라고!”
“으음…….”
하르간과 그 주변의 몇몇은 발레리안의 말에 격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외침에 용마족들의 분위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발레리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응했다.
“하르간 님이라고 하셨었죠? 그럼 하르간 님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물론이지.”
하르간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마을을 위협하는 야쿰들을 전부 척살한다. 나를 포함한 마을의 전사들은 이미 무기를 날카롭게 해두고 기다리는 중이다.”
발레리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마왕님께서는 섣불리 야쿰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시하셨습니다. 하르간 님의 방식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흥! 그럼 저 야쿰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란 말이냐?”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일단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이미 야쿰 무리가 마을의 영역을 침입하고 있다. 저놈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기다리라고만 할 것이냐!”
“…….”
하르간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애초에 마왕성을 믿고 기다린 게 잘못이야. 마을의 안위는 우리의 방식대로 지켜내야 해.”
“옳소!”
“하르간의 말이 맞아.”
“야쿰 놈들이 다시는 마을에 얼씬거리지 않도록,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해!”
“우리는 전투가 두렵지 않다!”
많은 용마족들이 하르간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중립적인 입장의 용마족들도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반응에 하르간은 의기양양해져서 나와 발레리안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카디스 영주라고 했던가? 마왕성도 급하긴 급했나 보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놈을 대책이랍시고 데려온 걸 보면…….”
“…….”
“뿔도 없는 비리비리한 저놈이 야쿰을 상대할 수 있다고? 나중에 그놈들 앞에서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큭큭큭!”
“큭큭큭!”
하르간의 비아냥거림에 몇몇 용마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을 넘은 그의 행동에 나와 발레리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당장 그 말 취소하세요!”
뒤에서 지켜보던 리아네가 나서며 소리쳤다. 하르간은 그녀의 박력 넘치는 행동에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금방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변해 대꾸했다.
“뭘 취소하라는 말이야?”
“시현 님을 무시했던 말 전부 취소하라고요. 시현 님은 당신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뭐, 뭐야?”
“아까 야쿰을 상대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죠? 매일매일 직접 상대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야쿰들이 시현 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요.”
“…….”
하르간이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리아네는 거침없이 나의 활약상을 설명했다.
처음 야쿰을 만났을 때부터 아기 야쿰들을 받아내고, 꿍유를 짜내고, 그 뒤에 있었던 수많은 일까지…….
미리 준비라도 해뒀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리아네의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흥분한 탓에 설명이 과장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정적인지 흡사 기적을 목격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흐뭇한 기분이 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민망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건 아닌데…….
그녀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발레리안 쪽을 바라봤는데. 오히려 발레리안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열정적인 리아네의 증언은 나에겐 큰 민망함을 가져다줬지만, 그것과 비례해서 용마족들에게는 기대감을 심어줬다.
“정말로 야쿰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소문으로는 정말 그렇다던데? 거기다 리아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면 정말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전투를 벌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가장 좋긴 하지.”
완전히 하르간 쪽으로 넘어갔던 분위기가 다시 한번 균형을 되찾았다. 용마족들은 사이에서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가 오고 갔다.
순식간에 기세를 빼앗긴 하르간은 리아네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못 본 사이 마왕성의 앞잡이가 다됐군.”
‘앞잡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에도 리아네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는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네 아버지인 ‘그분’께서 이 상황을 보셨다면 크게 실망하셨을 거야.”
“……?!”
아버지?
흔들리는 리아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는 사이, 촌장 바단이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모두 조용!”
“…….”
“…….”
“결정을 내리겠다. 일단 난폭해진 야쿰 무리에 대한 것은 마왕성에서 오신 분들에게 맡기겠다.”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촌장의 결정이 내려지자 용마족들의 표정이 크게 갈렸다.
기뻐하는 용마족뿐만 아니라, 불만스러운 용마족들도 촌장의 결정을 존중하듯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분들마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마왕성의 입장과 관계없이 우리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
마지막에는 용마족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에 불만스러워하던 자들도 조금이나마 표정이 풀렸다.
촌장 바단의 말을 끝으로 모여 있던 용마족들은 하나둘씩 흩어졌다. 넓은 탁자 주변에는 우리 일행과 촌장, 디우르만 남게 됐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손님분들께서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촌장님.”
“디우르, 손님들을 숙소로 안내해 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숙소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시현 씨. 저는 촌장님과 따로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알겠어요. 그럼 리아네 씨랑 먼저 가 있을게요.”
나와 리아네는 발레리안을 남겨두고 디우르를 따라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이번에는 리아네가 발걸음을 멈춰 서며 말했다.
“시현 님.”
“네?”
“디우르 님을 따라서 먼저 숙소로 가실래요? 저는 따로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리아네도 어딘가에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우중충한 그녀의 표정에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졌다.
“괜찮으면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숙소에 바로 가는 것보다 잠시 마을을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렇게 하실래요? 디우르 님도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상관없다. 카디스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건 잠시 미뤄두고, 리아네를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는 마을의 안쪽을 지나 외곽 쪽으로 걸어갔다. 외부인이 방문했다는 소문이 벌써 퍼져나갔는지, 길을 걷는 중간에 나를 바라보는 용마족들의 시선이 굉장히 따가웠다.
최대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관광을 온 기분으로 마을을 둘러봤다.
마계에서 봤던 마을들과 확실히 다른, 페스투나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열심히 마을을 구경하면서 우리는 마을의 외곽 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위에는 커다란 건물 여러 개가 지어져 있었다.
건물들 겉에서 느껴지는 엄숙한 분위기에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리아네 씨, 여기는……?”
“돌아가신 용마족 분들의 흔적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에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어머니랑 오빠에게 인사를 드리려고요.”
“아…….”
미소를 짓는 리아네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카디스 영주님. 안쪽은 용마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죄송해요, 시현 님.”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저는 느긋하게 마을 풍경이나 구경하고 있을게요.”
미안해하는 리아네와 디우르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는 그곳에서 살짝 떨어져나와 언덕 아래에 보이는 마을 전경을 감상했다.
꽤 높은 곳까지 올라온 덕분에 한눈에 마을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럴듯한 마을 풍경에 흡족해하던 그때.
-냐아아옹.
-냐옹.
어디선가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