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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70)화 (270/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70화

불청객(4) 

거기까지 알고 온 거야?

‘시현계’라는 구체적인 이름까지 언급하는 아크. 생각보다 철저한 천족의 대처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천족에게는 민감한 주제라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면 거짓말로 변명하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알고 오신 건가요? 조금은 무서워지려고 그러네요.”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에게도 꽤 중요한 문제여서 말이지.”

“불과 일주일 전쯤……. 그것도 마계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떻게 천족이 빨리 알 수 있었던 거죠?”

“천족의 눈은 어디에나 있다네.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자들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네. 가스트라의 흔적을 쫓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파악했거든.”

아크는 생각보다 순순히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잠잠한 농장 식구들의 반응을 보니, 천족이 마계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공공연한 비밀인 듯했다.

나와 아크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때,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발레리안이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아크 심판관님. 시현 씨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좀 더 정확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발레리안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아크의 입으로 향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신중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족은 태어날 때부터 차원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네. 마족도 차원 마법을 사용하지만 아주 제한적이지. 천족이 차원의 균형에 집착하며, 그것에 사명감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야.”

아크는 내 뒤편에 서 있는 농장 식구들을 바라봤다.

“반대로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마력을 다룰 수 있다네. 근원적인 힘에 대한 마족의 열망은 마치 천족의 사명감과 비슷해 보일 때가 있지. 난 개인적으로 이 차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하네. 천족이 할 수 없는 일을 마족이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마족이 할 수 없는 일을 천족이 할 수도 있는 거지.”

천족과 마족.

아크는 두 종족 간의 관계를 상호보완적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천족과 마족.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네. 바로 ‘창조’라네.”

“창조…….”

“천족이 차원을 다루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새롭게 차원을 창조해 낸 적은 없다네. 마족 역시 근원적인 힘을 새롭게 창조해 낸 적은 없지. 우리는 그저 누군가 창조해 놓은 틀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라네.”

틀 안에서 몸부림친다…….

이 말을 하는 아크의 눈동자에서 약간의 허무함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나도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현, 자네는 달라. 오랜 세월 동안 천족도 마족도 도달하지 못한 창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걸세.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야.”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저는 잘 실감이 안 나네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는…….”

“솔직히 말하면 나도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네. 창조의 영역은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으니까.”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던 아크는 한번 숨을 고르고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지금 천족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네. 자네가 가진 능력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지…….”

“그걸 왜 너희들이 정해?”

카네프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어이가 없네. 시현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던 너희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한테는 신경 끄고, 그 망할 용마족이나 붙잡으러 가.”

“그럴 수 없습니다.”

“뭐?”

이번에는 아크 뒤쪽에 서 있던 남자 천족이 나서서 반박했다.

“천족의 대다수가 창조의 힘은 차원의 균형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거기다 의도가 불순한 자들이 끼어들게 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전에 위험을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그 말은 시현을 억지로 잡아두겠다는 말이야?”

카네프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졌다.

하지만 남자 천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을 이어나갔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면?”

“당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능력이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우리는 무조건 그 위험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큭큭, 내 앞에서 건방지게 저런 말을 내뱉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에 대한 소문이 제대로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야?”

카네프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남자 천족도 곧바로 기운을 끌어올려 맞대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기운이 맞부딪치면서 주변에 소용돌이쳤다.

“으윽…….!”

하지만 아무리 천족이라도 카네프의 괴물 같은 기세를 이겨낼 수 없었다. 남자 천족은 처음으로 ‘고통’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 천족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던 그때.

-휘익!

앉아 있던 아크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소용돌이치던 기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네프에게 말했다.

“그만하면 됐네. 이 정도면 저 친구도 자신의 경솔함을 충분히 깨달았을 거야.”

카네프는 잠시 아크를 노려보다가 흥이 식었다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고맙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약한 놈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거든.”

이어서 아크는 엄한 목소리로 남자 천족을 질책했다.

“클라우 집행관, 우리가 손님으로 이 자리에 왔다는 걸 잊지 말게. 이런 시기일수록 경솔한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장담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 심판관님.”

잠시 험악했던 상황은 아크의 발 빠른 대처고 금방 해소됐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어색한 분위기에 모두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의외의 인물이 불쑥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아크 할아버지, 그래서 시현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말 저 천족 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잡아가실 생각이에요?”

릴리아가 민감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하지만 아크는 질문의 내용보다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오늘 이곳에 손님으로 찾아온 거란다. 애초에 그를 잡아갈 생각이었다면, 아까 보았던 선물도 굳이 준비하지 않았겠지.”

“정말이에요? 혹시 일부러 우릴 방심하게 만든 다음, 시현 오라버니를 데려갈 생각인 건 아니겠죠?”

“허허! 절대 아니야.”

무례할 수도 있는 릴리아의 질문에 아크는 재밌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행동 덕분에 주변에 남아 있던 긴장감이 맥없이 사라졌다.

“아까 클라우 집행관이 말했던 대로 자네의 능력을 위험하게 생각하는 천족도 있지만, 반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천족도 적지 않다네.”

“그런가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천족 중 하나일세. 나는 오히려 그 의견에서 더 나아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네.”

“기회……? 그게 무슨 뜻이죠?”

“자네가 살고 있는 지구. 그곳에 갑자기 왜 균열이 생겨나고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알고 있나?”

“아크 심판관님!”

“아크 심판관님!”

클라우와 아슈미르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크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으음……. 천재지변 같은 거 아니었나요? 그냥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인 줄 알았는데.”

“흔히 천재지변이라 일컫는 현상들도 전부 일어난 원인이 존재하듯, 균열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유가 있다네.”

균열이 나타나게 된 이유.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도 균열을 일상처럼 받아들일 정도로 이상 현상에 익숙해졌지만, 아무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한 적이 없었다.

나는 궁금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아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로 차원의 균형이 어긋났기 때문이라네.”

“으음……. 차원의 균형은 천족이 완벽하게 지켜내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전혀 그렇지 않다네. 물론 모든 천족들이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노력과는 무관하게 균형은 점점 어긋나고 있다네.”

아크의 이야기는 굉장히 놀라웠다.

지구의 사람들과 접촉한 천족은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는데…….

“놀랐나?”

“조금은요. 천족은 이 사실을 일부러 숨기고 있던 건가요?”

“숨겼다기보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아크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해졌다.

“천족에게 있어 차원의 균형을 수호하는 일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균형은 계속 뒤틀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네. 그로 인해 생겨난 좌절감을 자네는 상상할 수 있겠는가?”

“…….”

“그래서 많은 천족들은 눈앞의 사실을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는 거라네. 그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스스로의 무능함도 진실이 돼버리니까.”

천족이란 존재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졌다. 차원의 균형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다 바쳐 노력하면서, 정작 균형이 뒤틀리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니…….

“아까 자네의 능력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었지? 차원의 균형을 해치는 위험성? 그건 전부 변명에 불과해. 진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네.”

아크의 말이 이어질수록 클라우와 아슈미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마 그들도 천족의 어두운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원래 나는 이렇게 자네를 만나러 와서는 안 되지만, 겁쟁이들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꼴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네. 자네를 만나보고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

그는 나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자네를 만나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행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아크는 앉은자리에서 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시, 심판관님?!”

“아크 심판관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뒤에 서 있던 천족들은 물론이고, 나와 농장 식구들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의 이런 반응에도 아크는 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간절하게 말했다.

“시현, 제발 우리를 도와주게. 자네만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유일한 희망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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