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72화
두 번째 야유회(1)
청명한 하늘, 따사로운 햇살.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적당히 편안한 나무 의자에 앉아, 멀리 울타리 너머 보이는 귀여운 마수들…….
아! 물론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 귀엽다는 뜻이다. 야쿰을 귀엽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나는 편안한 자세로 야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쿰이 풀을 뜯는 모습을 이렇게 멍하니 지켜보는 건, 농장에서 내가 자주 즐기는 일 중 하나였다.
포근하고 활동하기 좋은 날씨 덕분에 많은 야쿰들이 멀리까지 나와 신선한 풀을 뜯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아기 야쿰들도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흐아아…… 좋다, 좋아.”
갑자기 무리의 숫자가 늘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이주해 온 야쿰들은 자연스럽게 농장 생활에 적응했다.
북적북적해진 야쿰 무리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느낌이었다.
축사도 더 넓게 증축해 줘야 할 것 같고, 녀석에게 줄 간식도 더 많이 준비해야겠어. 다음에 상회의 상인들을 만나면 의견을 물어봐야겠네.
야쿰 무리가 늘어난 만큼 내가 챙겨줘야 할 일도 늘어났지만, 내게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더 솟구치는 느낌이랄까?
혼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사박사박.
뒤쪽에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직접 보지 않아도 발걸음의 주인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리아네 씨?”
“혹시 쉬고 계신 데 제가 방해를 한 건가요?”
“아뇨, 괜찮아요.”
내가 반기는 표정을 보이자, 리아네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내 곁에 다가섰다.
“출출하실까 봐 간식이랑 시원한 마실 것 좀 챙겨왔어요.”
그녀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작은 접시를 꺼내 쿠키를 담고, 유리컵에 과일 탄산수를 따라주었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준비 안 해주셔도 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부족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더 준비해드릴게요.”
“혹시 은율이는……?”
“은율이 거는 이미 따로 챙겨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치즈 님이랑 같이 낮잠을 자고 있을 거예요.”
나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는 줄줄 대답을 꺼내놨다.
“저만 앉아서 이렇게 먹으려니까 조금 민망하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시현 님이 드시는 모습만 봐도 충분해요.”
“…….”
리아네는 생글생글 웃으며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접시의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바삭!
바삭한 쿠키, 그리고 그사이에 달콤한 초코칩.
특별할 것 없는 쿠키 맛이지만, 입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기분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약간 텁텁하다고 느낄 때쯤 시원한 탄산수 한잔!
캬아!
그야말로 소소한 행복 그 자체였다.
간식을 먹고 내가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리아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풀 뜯는 야쿰을 지켜볼 때 저런 표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오묘해졌다.
요즘 들어 리아네는 부쩍 나에게 친절함을 보였다. 정확히는 용마족 마을을 다녀온 다음부터였을 거다.
원래도 농장에 메이드로서 나를 보살펴주기는 했는데, 최근에는 나의 전속 메이드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싫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싫어할 수가 없었다. 진심을 담아 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지원해 주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면, 가끔 다른 농장 식구들에게 눈치가 보인다는 점 정도?
-바삭!
나는 무의식적으로 쿠키를 집어 먹으며 다시 야쿰들을 바라봤다. 리아네도 최대한 조용히 곁에 머물며,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존중해줬다.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을 즐기다가 문득 며칠 전에 농장을 찾아왔던 손님이 떠올랐다.
-나는 천족의 심판관 ‘아크’라고 하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천족에 대한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느낌의 천족이었다.
첫 만남도 당황스러웠지만, 그가 꺼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나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했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 시현!
-자네만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유일한 희망일세.
차원의 비틀림, 창조의 영역, 시현계…….
분명히 며칠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도 그때의 기억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농장 식구들이 모두 같은 꿈을 동시에 꿨을 리는 없으니, 천족이 나를 찾아왔던 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내가 차원의 비틀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면,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야쿰이나 구경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잠깐 이런 의문과 함께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바삭!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쿠키 하나를 베어 물며 의문과 찝찝함을 동시에 흘려 버렸다.
아크 심판관도 일단은 평소처럼 지내라고 말했고, 이런 문제는 내가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쿠키나 먹으면서 편안히 지내는 게…….
접시가 있던 곳에 헛손질하던 나는 깜짝 놀라 접시를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하나씩 집어먹다 보니 접시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거다.
정말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를 다 비웠는데 뭔가 아쉬운 그 느낌. 여기서 그만두자니 아쉽고, 그렇다고 한 봉지 더 뜯으려니 어른으로서 죄책감이…….
온 세상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충 넘기다가, 비워진 쿠기 접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황.
아마 은율이가 옆에 있었다면 아빠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나랑 리아네 씨 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금은.
“리아네 씨, 죄송한데 혹시 쿠키 좀 더…… 으음, 리아네 씨?”
“네?”
리아네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혹시 저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세요? 표정이 꼭 그런 것 같아서요.”
“아…… 그게…….”
그녀는 내 물음에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정말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쿠키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그녀의 대답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페스투나 마을에서 저한테 하셨던 말…… 혹시 기억하세요?”
“어…….”
뭐, 뭐지?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예상치 못한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용마족 마을에서 돌아온 지 시간이 좀 지나기도 했고, 그 당시에 워낙 많은 일이 있었다.
급히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리아네 씨, 죄송한데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제가 무슨 말을 했었나요?”
“그때 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긴 했는데. 분명히 시현 님의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
“농장으로 돌아가면 더 추워지기 전에 다시 야유회를 가자고…….”
“아아!”
리아네의 부연설명에 나는 금방 기억을 해냈다. 그녀가 광기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예전 야유회를 추억하며 다시 야유회를 가자고 말했었다.
“시현 님, 어떠세요?”
그녀는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의중을 물었다.
“흐음. 야유회라…….”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최근에 활동하기 좋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고,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최근에 대충 마무리되면서 시기적으로도 조금 여유로워지는 타이밍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제 추운 겨울이 찾아온다. 지금을 놓치며 다음 봄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러 가지를 따져봤을 때, 지금이 딱 절절한 시기인 것 같았다.
“야유회……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요?”
“네! 농장 식구들에게 한번 의견을 물어보죠.”
나의 긍정적인 반응에 리아네는 크게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스윽.
“저도 야유회를 가기에는 지금이 좋을 것 같아요. 시현 선배.”
“엘린?”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엘프리드가 야유회의 찬성 의견을 표했다.
“너도 찬성이라고? 아니, 그보다 언제 온 거야?”
“아까 리아네 선배가 뭔가를 챙겨 들고 이쪽으로 가는 걸 봤거든요.”
엘프리드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나게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고. 시현 선배한테 가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죠.”
“제, 제가 언제 그렇게 싱글벙글했다고?!”
“모르셨어요? 요즘에 시현 선배랑 관련된 일이면 표정부터 달라진다고요. 제 말 맞죠, 시현 선배?”
“크흠, 큼.”
엘프리드의 물음에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모른 척을 했다.
“으으…….”
리아네는 최근에 자신의 변한 모습에 대해 전혀 자각이 없었는지, 굉장히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스윽.
“엘린 군의 말이 맞습니다.”
“끄응…… 안드라스 씨도 오셨어요?”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안드라스가 내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리아네의 변화를 꼬집었다.
“원래부터 리아네 양이 시현 님을 많이 따르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아주 많이 심해졌습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간식을 챙겨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아, 안드라스 님도 나중에 챙겨드리려고 했어요…….”
“정말입니까?”
“…….”
안드라스가 메마른 눈동자로 묻자 리아네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타깝게도 챙겨줄 생각이 정말 없었나 보다.
-스윽.
“우물우물, 맞아! 리아네 언니는 너무 시현 오라버니만 챙긴다니까? 우물, 근데 이 쿠키 진짜 맛있다.”
릴리아는 어느새 바구니에서 쿠키까지 꺼내물고 불만을 털어놨다. 이번에도 리아네는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조금 난감했다. 귀까지 새빨갛게 변한 리아네가 안타까워 급하게 주제를 꺼내 들었다.
“마침 잘됐네요. 방금 야유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야유회 말씀입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지난번 야유회를 가고 나서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군요.”
안드라스는 과거의 야유회를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야유회? 그게 뭐야?”
“야유회가 뭐냐면…….”
릴리아에게 ‘야유회’가 뭔지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설명을 들을수록 그녀의 두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야유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벌써부터 몸을 들썩거렸다.
“야유회! 나도 갈래.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
“안드라스 씨도 괜찮으세요?”
“저도 좋습니다. 최근에 ‘차원문 장치’ 연구로 계속 작업실에 틀어박혔는데. 가끔은 기분전환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큰 고민 없이 야유회에 찬성했다. 그리고 각가지 야유회에 대한 의견으로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나도 모두와 함께 야유회를 떠날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설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