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91화
이상한 하루(1)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농장의 아침.
달라진 점이라면 추워진 새벽 날씨에 맞춰 작업복을 두껍게 껴입었다는 것뿐이었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입으로 하얀 김을 내뿜으며 축사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야쿰들이 일찍 일어나 풀을 뜯으러 나갈 시간인데, 축사 안에는 아직도 많은 야쿰들이 남아 있었다.
-부우우…….
-무우우…….
새로 설치한 마법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녀석들. 그 모습이 마치 은율이가 이불을 덮고 뭉그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녀석들. 난로가 그렇게 좋아?”
-무우우.
-무우우.
내 목소리를 들은 아기 야쿰들이 하나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금방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인간 난로’가 된 것 같았다.
잠에 취해 어리광부리는 아기 야쿰들을 잠시 상대해 준 뒤, 평소처럼 축사의 청소를 시작했다.
난로를 떠나지 않는 야쿰들 때문에 복도와 주변만 깔끔히 치우고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청소를 끝내고 축사 밖으로 나서는데, 농장 건물 앞에서 예상 밖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어? 안드라스 씨? 그리고 사장님까지?”
입구에서 걸어 나오던 안드라스와 카네프.
이렇게 이른 시각에 두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은 정말 드문 경우였다.
“두 분 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어…… 으음. 좋은 아침입니다. 시현 님.”
“벌써 출근했었냐?”
“저는 원래 이 시간에 출근하잖아요.”
내가 다가서며 말을 걸자 두 사람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금방 더 이상한 점을 찾아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보다 사장님?! 지금 설마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신 거예요?”
카네프는 잠옷 같은 차림에 부스스한 모습이 아니라, 새 옷을 꺼내입고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카네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게 뭐? 가끔은 일찍 일어나서 씻을 수도 있지.”
“마왕님이 찾아오신다고 해도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맞이하실 분이…….”
나는 카네프에게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하고 안드라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일어난 이상 현상을 설명해달라고 눈빛으로 요청했다.
“그게…… 오늘은 카네프 님을 모시고 다녀와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이요? 저는 그런 말 처음 듣는데.”
“당연히 지금 처음 말했으니까 그렇지. 별일 아니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카네프는 무심한 말투로 나의 관심을 끊어버렸다. 개개인의 사정을 내가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니, 굳이 더 캐묻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쯤 돌아오시는데요?”
“아마,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럼 우리 간다. 나중에 보자.”
“네, 다녀오세요.”
카네프는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안드라스도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카네프의 뒤를 따랐다.
농장 건물 앞에 선 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허전함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그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아침 식사 시간.
카네프와 안드라스, 두 사람만 자리에 빠졌을 뿐인데도 식탁은 허전한 기운이 맴돌았다.
“사장님이랑 안드라스 씨는 아침 일찍부터 볼일이 있으시다네요. 오늘 아침은 저희끼리 먹어야겠어요.”
“아, 그렇군요.”
“…….”
“…….”
엘프리드만 형식적인 대답을 했을 뿐, 자리에 앉은 리아네와 릴리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리아네 씨랑 릴리아는 전혀 놀라지 않네요? 저는 사장님이 아침 일찍 외출 준비하신 걸 보고 꽤 놀랐는데.”
“아아. 그게…….”
릴리아가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릴리아가 먼저 대답을 꺼냈다.
“며칠 전에 카네프 님이 지나가는 말투로 외출할 거라고 하셨거든요.”
“마, 맞아. 나도 그때 들어서 별로 안 놀란 거야.”
“으음. 그랬어요? 저는 못 들었는데.”
“아마 시현 님이 안 계실 때 제가 들었나 봐요.”
……이 반응은 뭐지?
별거 아닌 질문인데 두 사람은 변명하듯 어색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엘프리드도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뭐예요. 저한테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시현 오라버니에게 숨길 일이 뭐 있겠어.”
“맞아요, 시현 선배. 우리가 숨길 게 뭐가 있다고…….”
가볍게 던진 질문에 세 사람이 우르르 반응했다. 거짓말이 너무 티가 나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조금 더 캐물어 보려다가, 눈치를 살피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일단 그만뒀다. 계속했다가는 세 사람 모두 체하거나 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질문은 그만두고 조용히 음식에 집중했다. 그제야 세 사람도 안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조용히 식사하면서 속으로는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특별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자리에 앉은 여우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귀엽게 입을 오물거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지켜봤다.
아앗!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리고 은율이의 귀여움에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 식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나는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후다닥!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낸 릴리아가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빨리 움직였던지 붙잡을 겨를도 없이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천천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식사의 뒷정리를 도와주려는데…….
-삐리릭! 삐리릭!
주머니 속에서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엘든 마을과 연락을 주고받는 아티팩트가 내는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이른 시간부터 죄송합니다, 영주님.
“라구스 씨? 무슨 일이세요?”
-며칠 뒤에 도착하는 상인들이 도착하는데. 그 거래와 관련해서 확인해주셨으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인내심을 발휘해 애써 다시 집어삼켰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라구스에게 되물었다.
“급한 일인 거죠?”
-중요한 일이라 영주님께서 직접 확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끄응……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라구스 씨가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금방 준비해서 내려갈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금방 내려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종료했다.
겨울 준비로 이것저것 일을 벌인 후폭풍인지, 라구스가 나를 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요 며칠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불러들였다.
그렇다고 라구스에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일을 벌인 사람은 나였고, 그 때문에 가장 고생하고 있는 사람도 라구스였다.
“시현 선배, 또 엘든 마을로 내려오래요?”
“내가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얼른 내려가 보세요.”
“그렇게 하세요. 뒷정리는 저랑 엘린 님, 둘이서 할게요.”
엘프리드와 리아네는 식사 정리는 자신들이 하겠다며 나의 등을 떠밀었다.
“엘린, 오늘 할 일 없으면 같이 엘든 마을에 갈래?”
“저, 저요? 저는 오늘 딸기밭에 일을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요.”
“딸기밭 도와주는 건 어제 끝난 거 아니었어?”
“아직 좀 남아 있어서요.”
오늘 일이 있다는 엘프리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아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리아네 씨는 어때요?”
“죄송해요, 시현 님. 카네프 님과 안드라스 님이 자리를 비웠으니, 오늘은 대청소하려고 했거든요.”
“아……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나는 한쪽 볼을 긁적이며 살짝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율아, 아빠랑 같이 엘든 마을 갈래? 미루가 너랑 놀고 싶다고 계속 그랬거든.”
“미루 언니가?”
“응. 미루 못 본 지 좀 됐지? 아빠랑 같이 갈래?”
미루 이야기에 은율이는 두 눈동자를 반짝였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던 여우 소녀는 돌연 표정을 바꿨다.
“……다음에 갈래.”
“어?”
“오늘은 집에서 그리핀들이랑 치즈랑 놀래.”
“그, 그럴래?”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충격을 받은 나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은율이는 당연히 나를 따라올 거라 생각했는데…….
“시현 님, 내려갈 준비 도와드릴게요.”
“다녀오세요, 시현 선배.”
“아빠, 빠이빠이!”
“…….”
나는 세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떨떠름하게 내려갈 준비를 했다.
* * *
“아저씨, 이것 봐요.”
고양이 소녀가 내 앞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겨울을 맞아 새롭게 장만한 듯 예쁘고 따뜻해 보이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래, 너무 잘 어울리네.”
“히힛! 엄마가 직접 만들어 준 거예요. 예쁘죠?”
새 옷을 자랑하는 미루의 모습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뻐하는 미루 옆으로 조그만 아기 토끼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도, 나도!”
“캐시도 새 옷 입은 거야?”
“응!”
아기 토끼 캐시는 털모자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털모자 때문에 매력 포인트 토끼 귀가 안 보이는 건 아쉬웠지만, 전체적으로 폭신한 느낌이 더해져 인형 같은 귀여움이 늘어났다.
나는 캐시를 무릎 위에 앉히며 부드럽게 웃었다.
“캐시도 새 옷 잘 어울리네. 너무 귀여워.”
내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캐시는 내 품속으로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미루가 내 앞까지 다가와 두 팔을 들어 보였다. 나는 허허 웃음을 터뜨리며 미루도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어이쿠! 미루도 완전 어리광쟁이네.”
“헤헤!”
두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사이, 부엌 쪽에서 쟁반을 든 아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너희들! 일하고 계시는 영주님을 귀찮게 하면 안 돼.”
그녀는 내 무릎 위에 두 아이를 발견하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캐시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고, 미루는 몸을 움찔 떨며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이들을 대신해 아델라에게 변명했다.
“괜찮아요. 제가 쉬고 싶어서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거예요.”
“어휴, 영주님은 아이들에게 너무 약하셔서 탈이에요.”
“하하하.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네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도 나를 따라 웃으며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놨다.
“차랑 간식을 좀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쟁반 위에는 구수한 향을 풍기는 차와 딸기잼을 넣어 만든 쿠키가 올려져 있었다.
간식을 보고 눈을 빛내는 아이들에게 먼저 쿠키를 나눠주었다.
차에 곁들일 쿠키가 전부 아이들의 입으로 사라지자 아델라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며 나머지 쿠키도 아이들의 손에 쥐여줬다.
나는 쿠키 대신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쌉싸래한 맛이 느껴지며 몸 안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델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는 입맛에 좀 맞으세요?”
“네, 아주 좋아요.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아서 일할 때 가끔 마시면 좋겠네요.”
그녀는 살포시 웃더니 다시 한번 더 질문을 던졌다.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네?”
“아까 처음 마을에 오셨을 때, 왠지 영주님의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있었던 것 같아서요.”
“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감정을 그대로 내비친 것 같아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거든요.”
아델라는 모성애가 느껴지는 푸근한 말투로 나를 설득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하나씩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