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03화
휴가 중에(2)
가게 밖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게 안쪽까지 느껴졌다. 당연히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구 쪽을 응시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네요.”
“왜 저러지? 연예인이라도 왔나.”
“…….”
이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짐작한 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 전에 나눴던 일방적인 대화.
그리고 천족 특유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게 입구 쪽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무표정,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제복, 그리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분위기.
역시…….
가게에 들어선 사람은 내가 예상대로 천족 아슈미르였다.
“저, 저 사람 천족 맞죠?”
“갑자기 천족이 이런 곳을 왜…….”
윤세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드러냈고, 남진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슈미르는 가게 내부를 한번 쓱 둘러보더니, 내가 앉아 있는 쪽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성큼성큼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정태호가 다급하게 반응했다.
“어어?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데?”
“혹시 우리 뭔가 잘못한 건가요? 천족을 실제로 만나보면 엄청 무섭다던데.”
“으음…….”
당황하는 일행들을 내가 나서서 안심시켰다.
“모두 다 너무 당황하지마. 저 천족은 아마 나한테 볼일이 있는걸 테니까.”
“엥?”
“아저씨한테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형.”
세 사람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아슈미르가 먼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역시나 그녀는 세 사람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시현 씨.”
“오랜만이네요, 아슈미르 씨. 으음…… 저번에 리안 씨 사무실에서 한번 뵀었으니까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네요.”
“그렇군요. 최근에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지금의 당황스러운 상황은 제쳐놓고 일단 아슈미르와 인사를 나눴다.
그녀와 첫 만남은 별로 좋지 못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는 여유로웠다.
“오…….”
내가 아슈미르와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자.
나와 함께 앉아 있는 세 사람은 물론이고, 가게 안의 다른 사람들까지 놀라움을 드러냈다. 보통의 사람들은 천족을 만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까.
주변의 반응은 애써 못 본 척하며 아슈미르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시현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같이 가주시죠.”
“윽! 지금 당장이요?”
“네.”
다짜고짜 같이 가달라는 아슈미르.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내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빨리 일어나라는 눈빛으로 나를 재촉했다.
이게 천족 특유의 성격이라는 건 잘 알지만,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나는 처음보다 퉁명스러워진 말투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지금은 도움을 드리기 힘들 것 같은데요.”
“시현 씨,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약속은 잠시 미루는 게…….”
“이것도 저에게는 중요한 약속이에요.”
“…….”
기분이 안 좋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 강경한 태도에 아슈미르는 흠칫 몸을 떨더니, 나와 함께 있는 세 사람을 둘러봤다.
“선약이라는 게 여기 함께 계시는 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오랜만에 만난 제 지인들이에요.”
“시현 씨뿐만 아니라 저분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마련해드릴 테니 선약은 미뤄주십시오.”
정말 이 천족이…….
막무가내인 아슈미르의 태도에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일행도 무시를 받는 것 같아 굉장히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훨씬 감정이 격해진 목소리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됐습니다. 이렇게 계속 무례하게 나오신다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돌아가 주시죠.”
“……!”
아슈미르는 당황한 듯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세 사람이 내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 아저씨 괜찮아요?”
“우리는 신경 안 써도 돼.”
“형, 일단 천족분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는 게…….”
“괜찮아.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
나는 걱정이 담긴 말들을 단번에 일축하며 계속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천족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걸 지금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억지로 끌려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 무례한 태도라면 더더욱!
“아슈미르 씨. 지난번에 농장으로 찾아오셨을 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리겠다고 했었죠?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이고, 막무가내인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어요.”
“…….”
“저도 천족이 행동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아슈미르 씨도 저에게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을 보여주세요.”
아슈미르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다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내가 했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뜬 아슈미르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시현 씨. 너무 급한 나머지 시현 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겉으로 담담한 척했지만, 내심 꽤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크흠, 큼! 그 사과 받아들일게요.”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기분 탓인지 아슈미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그럼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잠깐……?”
-화아아악!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슈미르의 주변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게에 있던 모두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부심에 적응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환한 빛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건…….”
아슈미르의 등에서 뻗어 나온 한 쌍의 커다란 날개.
그 날개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게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란 감정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아슈미르는 더 파격적인 행동을 이어나갔다.
-스으윽.
“어……? 어어?!”
아슈미르는 커다란 날개를 곱게 접고,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내가 어떻게 반응도 하기 전에 그녀는 완전히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모두의 놀람이 경악으로 바뀌고 있을 때.
무릎 꿇은 천족의 입에서 경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라크단의 수호자에게 인정받은 에스테르이며, 카디스의 지배자인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이시여. 페이슈타의 감시관 아슈미르가 이렇게 간절히 청합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해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중이 가득 담긴 그녀의 행동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천족이 저 남자에게 무릎 꿇은 것 맞지?”
“바,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에스테르? 카디스?”
주변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일단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무릎 꿇은 아슈미르를 손수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말고 일단 일어나세요.”
“……?”
아슈미르는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나를 쳐다봤다. 마치 ‘네가 해달라는 게 이거 아냐?’라고 묻는 듯했다.
“끄응…… 존중과 배려를 말하기는 했지만, 저는 이런 걸 해달라고 한 게 아니거든요?”
“죄송합니다. 제 방식이 또 틀렸나 보군요. 다시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무릎을 꿇으려 몸을 숙이자 나는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아아! 알겠으니까 무릎 꿇는 건 그만 하세요.”
“그럼……?”
“무슨 부탁인지는 몰라도 일단 자세한 이야기부터 들어볼게요.”
주변을 둘러보니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곳에서는 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슈미르를 이끌고 가게 밖으로 향했다.
“아앗! 아저씨!”
“같이 가.”
“이것 참…….”
함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세 사람도 황급해 내 뒤를 뒤쫓았다.
어찌어찌 밖으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게 앞에도 이미 수많은 구경꾼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 것 같고.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근처에 조용한 곳을 찾던 중.
머릿속에서 빠르게 한 장소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슈미르를 포함한 일행을 빠르게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