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15)화 (315/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15화

천족과 신수(2)

“그게 뭔 헛소리야?!”

편지 뒤쪽의 내용을 듣고 카네프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안드라스도 이런 내용일 줄 전혀 예상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편지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신수를 나에게 맡기는 대신, 그만큼 아슈미르와 우르키를 부려먹으라는 건데…….

단순히 생각해 보면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내가 신수를 신경 써주는 만큼, 저쪽에서는 두 명의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건데.

문제는 그 두 명이 천족이라는 데 있었다.

일단 천족과 일을 같이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애초에 농장 일을 잘할 수 있을지부터 걱정이었다.

“편지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두 분 정말로 여기에서 일하실 생각이세요?”

“그렇습니다. 시현 씨에게 신세 진 일을 보상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요?”

“귀한 보석이나, 금전적인 보상도 고려해 보았지만, 시현 씨가 별로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으음…… 그건 그렇죠.”

그 말대로 그런 보상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보석 같은 걸 모으는 취미도 없었으니까.

아슈미르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계속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속마음을 털어놨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천족분들과 같이 일해본 적이 없어서 좀 그렇네요. 두 분이 농장 일에 잘 적응하실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고요.”

“천족이라고해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시현 씨는 마족과도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여기 계신 분들도 처음부터 농장 일에 능숙했던 건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익숙해질 시간만 조금 주어진다면 금방 제 몫을 할 수 있을 겁니다.”

“…….”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아슈미르의 말에 딱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실함과 책임감에 대해서라면 천족이 절대 마족에게 밀리지 않을 겁니다.”

워워!

그런 종족 차별적인 발언은 좀 위험…….

“마족이 천족보다 훨씬 책임감도 없고, 게으르다는 거야?”

“이건 저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겠군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카네프와 안드라스가 먼저 발끈하고 나섰다. 아슈미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마족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저 건방진 천족이…….”

아슈미르의 대답은 분위기를 더욱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가는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았다.

“모두 그만! 괜히 천족과 마족을 비교하는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시현, 설마 너 천족 편을 드는 건 아니겠지?”

“제가 언제 천족 편을 들었다고 그러세요.”

“그럼 네가 직접 저 녀석들에게 말해줘. 마족이 얼마나 책임감 넘치고 성실한지!”

“…….”

사장님…….

사장님이 책임감과 성실함을 언급하는 건 좀…….

내가 섣불리 마족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책임감과 성실함에 점수가 있다면, 카네프가 그 평균 점수를 크게 깎아 먹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마족과 천족 사이에서 더 감정적인 말들이 나오기 전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천족이 이렇게 마음대로 마계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그…… 위쪽 분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마왕성에 허락을 구했는데, 농장에 관한 일은 자기들이 관여할 수 없다더군요. 만약에 시현 씨가 허락한다면 마왕성에서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쩝…….”

우리를 배려해 준 건지 아니면 귀찮은 일을 떠넘긴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왕성 쪽에서는 우리의 결정을 따를 생각인 듯했다.

머리에 생각이 많아졌다.

농장의 일손이 부족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식구들이 조금씩 노력하며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지만, 계속 농장의 일이 많아지는 상황이니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농장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아무나 일꾼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또 지금의 식구들과 끈끈해진 관계 때문에 선뜻 낯선 사람을 데려오기 껄끄러운 것도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안드라스에게 슬쩍 눈빛을 보냈다. 내 눈빛을 읽어낸 그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현 님께서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네프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뭘 고민해? 답답한 천족을 굳이 농장에 일하게 할 정도로 급한 일이…….”

-벌컥!

“시현 선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거실로 들어왔다.

어깨와 머리에 눈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엘프리드였다.

“어? 엘린, 무슨 일이야?”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죄송한데. 지금 밖에 큰일 났거든요?”

“큰일?”

새하얗게 질린 엘프리드는 대답 대신 창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휘이이이잉!!

-텅, 텅!

“아…….”

“눈보라가 다시?!”

분명 농장에 도착할 때만 해도 눈은 그친 상태였는데 거실 창문 너머에는 어느새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뒤늦게 떠올리고 벌떡 일어섰다.

“잠깐, 아이들은?”

“아이들은 걱정 마세요. 눈보라가 거세지기 전에 리아네 선배가 다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휴우우…… 깜짝 놀랐네.”

아이들 소식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다시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딱 봐도 눈보라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급한 이야기가 아니면 잠시 미뤄두셔야겠어요. 눈보라가 더 심해질 것 같거든요.”

바깥의 위급한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나와 안드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시현 님. 저는 딸기밭을 살펴보러 가야겠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이면 온실 구조물도 버티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주세요. 엘린! 너는 나랑 축사 쪽을 살펴보러 가자.”

“네.”

“잠깐만요!”

급하게 거실을 빠져나가려는 나를 아슈미르가 불러세웠다.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아슈미르와 우르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슬쩍 카네프 쪽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끄응…….”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너 알아서 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두 천족에게 말했다.

“그럼 두 분도 저를 따라오세요.”

* * *

-휘이이이잉!!

-휘이이이잉!!

“으어어어…….”

건물 밖으로 나와 처음 눈보라를 몸으로 체감했을 때, 입에서는 저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는 둘째치고, 눈을 뜨고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앗! 시현 오라버니!”

“릴리아?”

“잠깐만!”

멀리서 릴리아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양쪽 손목에 뭔가를 채워주었다.

-우우우웅.

양쪽 손목에서 작은 진동이 울리더니, 곧이어 뜨끈한 온기가 퍼져 나와 온몸을 감쌌다. 덕분에 굳어 있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추위를 막아주는 아티팩트야. 혹시 생길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도 막아주는 거니까 꼭 차고 있어야 해.”

“고마워!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벌써 착용하고 있어. 시현 오라버니가 마지막이야.”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하던 릴리아는 뒤쪽에 천족들을 발견하고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으앗? 저 두 사람에게 줄 아티팩트는 없는데?!”

“저희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천족 주변으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았고, 은은하게 빛을 내며 보호막을 이루었다.

“천족의 감시관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굉장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좋아요. 일단 축사로 향하는 길부터 정리해주세요. 저는 마구간에 다녀올게요.”

엘프리드와 릴리아.

그리고 두 명의 천족에게 일을 맡긴 뒤, 나는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히이잉!

-푸르르르!

“자, 착하지! 여기는 위험하니까 잠깐만 축사에 들어가 있자.”

불안해하는 말들을 달래며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나마 더 안전한 야쿰의 축사로 옮겨줄 생각이었다.

한 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축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네 사람이 달라붙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엘린! 축사 입구 여는 것 좀 도와줄래?”

“알았어요.”

나는 엘린의 도움을 받아 낑낑대며 입구를 열었다. 축사 안쪽에는 눈보라를 피해 야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부우우우!

-무우우! 무우우!

오랜만에 농장에 복귀한 날이라 많은 야쿰들이 반가운 울음소리를 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구석 빈자리에 말들을 데려다주고 다시 축사 밖으로 향했다. 그 짧은 사이에 눈보라는 더 거세진 것 같았다.

“릴리아! 마법이나 아티팩트로 어떻게 안 돼?”

“이걸 어떻게 막아? 마왕님이 직접 오시는 게 아니면 택도 없다고!”

으으…….

진짜 이러다가 농장이 통째로 눈에 뒤덮이겠네.

“시현 선배, 저기 보세요!”

엘프리드가 가리킨 곳은 축사의 지붕 쪽이었다.

축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연결된 지붕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지붕 일부분이 완전히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올라가서 고쳐야겠어.”

“너무 위험해 시현 오라버니!”

“괜찮아. 밧줄로 대충 고정만 시키고 내려올 거야. 지붕이 완전히 뜯겨나가면 더 골치 아파져.”

나는 재빨리 창고에서 밧줄과 사다리를 꺼내왔다. 엘프리드와 릴리아에게 사다리를 붙잡게 한 뒤, 거침없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겁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빠르게 지붕 위에 올라타 가져온 밧줄을 매려는데…….

-휘이이이이잉!!!

갑자기 엄청난 강풍이 몰아치며 덜렁거리던 지붕이 위로 솟구쳤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나도 덩달아 튕겨 나갔다.

“으아아악!”

“선배!!”

“시현 오라버니!!”

두 사람의 비명 같은 외침이 바람 소리에 묻혀 먹먹하게 들려왔다. 붕 떠오르는 느낌과 그 순간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지는 순간.

-덥석!

“괜찮으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