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16화
천족과 신수(3)
포근한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이 덜해졌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인 건 아슈미르의 얼굴이었다.
“어…… 아슈미르 씨?”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바람에 휘말렸던 나는 어느새 아슈미르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바람이 거세니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 있던 상황이라 굉장히 어색하고 민망했다.
“별말씀을.”
아슈미르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아래로 나를 바닥에 내려다 주었다. 릴리아와 엘프리드가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현 오라버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 아슈미르 씨 덕분에 살았어.”
릴리아와 엘프리드 역시 미묘한 눈으로 아슈미르를 바라봤다. 그들도 아직 천족을 대하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시현 님! 이거 이렇게 하면 되나요?”
지붕 위에 올라간 우르키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덜렁거리던 지붕이 어느새 밧줄로 잘 고정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이제 내려오세요.”
“알겠습니다!”
우르키는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기쁜지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슈미르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나와는 다르게 우르키가 너무 쉽게 일을 해결한 것 같아 살짝 허탈함이 밀려왔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부탁할 걸 그랬네.
조금 전에는 급한 마음에 막무가내로 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아찔한 행동이었다.
-휘이이이잉!!
다시 한번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 할 일을 맡아 일을 수행했다. 그래도 모두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급히 해야 할 일은 다 끝낸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축사에 물과 먹이도 넉넉하게 넣어주고 싶었지만, 움직이기도 버거운 상황에 그럴 여유는 전혀 없었다.
얘들아 조금만 참아.
눈보라가 수그러들면 바로 챙겨줄게.
“시현 씨. 이제 끝난 겁니까?”
“네. 이 정도면 괜찮…….”
“시현 오라버니!!”
괜찮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릴리아가 나를 불렀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딸기밭 쪽이 급하대.”
“딸기밭이? 안드라스 씨가 그랬어?”
“응! 지금 엘든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나섰나 봐.”
“알았어. 얼른 가보자!”
우리는 숨돌릴 새도 없이 곧장 딸기밭으로 향했다.
* * *
“뭐 해?! 제대로 잡아당겨!”
“여기 빨리 파내! 눈 때문에 벌써 구부러졌잖아!”
“모두 힘내! 무조건 여길 지키는 거다!”
눈보라에 맞서 싸우는 수인들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공성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처절하고 긴박했다.
“안드라스 씨! 라구스 씨!”
“오셨군요.”
“영주님!”
반가움을 드러내던 두 사람의 얼굴은 거센 눈보라에 금방 흐려졌다.
“딸기밭은 괜찮은 건가요?”
“지금 마을에서 힘쓸 수 있는 모두가 올라와 버티는 중입니다.”
“그럼 마을은 어떻게 하고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할 겁니다. 저희에게는 딸기밭이 훨씬 중요합니다.”
라구스는 성을 지키는 장군처럼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딸기밭이 수인들에게 어떻게 여겨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과거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죽기 살기로 딸기밭을 지키는 모습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눈보라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데…… 계속 버틸 수 있을까요?”
“제가 임시로 결계를 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결계는 얼마나 걸리는데요?”
“릴리아와 힘을 합친다면 2시간 정도는 필요합니다.”
2시간…… 2시간…….
어떻게 여기 있는 모두가 달려들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드라스 씨는 결계 설치에 집중해 주세요. 저희가 최대한 버텨볼게요.”
“여, 영주님?! 이곳은 위험하니 영주님은 올라가 기다리고 계시는 게…….”
“무슨 말이에요? 저도 한 손 보태야죠.”
라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말렸지만, 딸기밭의 위험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수인들이 만큼이나 나도 이곳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저는 결계 설치를 계속하러…….”
“나도 오라버니 따라서 결계 설치를 도울게.”
“시현 선배, 저희도 얼른 가죠.”
“저희도 돕겠습니다.”
안드라스와 릴리아는 결계 설치를 위해 떠났고. 나머지는 라구스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수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수인들은 각자 도구를 들고 눈을 퍼내거나, 온실 구조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대를 세우기 바빴다.
스스로 육체 노동에 꽤 단련됐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이 눈보라 속에서 작업은 정말 쉽지 않았다.
추위야 아티팩트가 어떻게 막아준다지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힘내라, 뾰!」
「딸기밭이 무사하면 나중에 뽀뽀해줄게, 뾰!」
딸기밭의 요정들이 온실 속에서 우리를 열심히 응원했다. 혹독한 날씨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렇게나마 힘을 보내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래도 요정들의 응원 덕분인지 딸기밭에 피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봐! 누가 저기 위쪽에 밧줄 좀 당겨…….”
-펄럭!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아슈미르와 우르키도 열심히 이곳저곳 날아다니며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거센 눈보라 속에 두 사람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
하도 찬바람을 맞아서 얼굴에는 감각이 사라지고 손과 발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어휴…….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이게 뭔 개고생이야.
눈치 없게 가혹한 날씨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시간이 지나고.
-부우웅!
-파아아앗!
딸기밭을 감싸는 투명한 기운이 넓게 펼쳐졌다. 그 기운은 매서운 눈보라를 밀어내며 딸기밭에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우와아! 결계다!”
“안드라스 님이 결계를 설치하셨다!”
“우리가 해냈어!”
수인들은 결계가 성공적으로 설치됐음을 깨닫고,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모두가 노력한 덕분에 딸기밭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눈보라가 이제 안 느껴진다, 뾰!」
「꺄하하! 나중에 모두 뽀뽀해 줄 거다, 뾰!」
-털썩!
“으아아…… 끝났네.”
나는 쥐고 있던 눈삽을 내팽개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팔팔한 수인들과는 다르게 진이 다 빠져버린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세요?”
아슈미르와 우르키가 내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냥 지친 것뿐이에요. 두 분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딸기밭을 안전하게 지켰네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크 심판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시현 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겁니다.”
고개를 들어 아슈미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열심히 일한 것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초췌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기계 같은 말을 내뱉지만,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상황을 함께 이겨낸 동료애? 전우애?
아무튼, 그런 비슷한 감정이 두 천족에게 느껴졌다. 물론 두 천족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영주님!”
“시현 님,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라구스와 농장 식구들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나는 아슈미르와 우르키의 도움을 받아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 * *
열심히 딸기밭을 지켜낸 수인들은 곧바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들에게는 딸기밭을 지키는 게 끝이 아니라, 마을에 쌓인 눈을 수습하는 일들이 남아 있었다.
나도 거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에서 돕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눈보라 속에서 헤매느라 기력이 다 빠진 상태였다.
내 마음을 눈치챈 라구스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독였다.
“마을의 일은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딸기밭 지키는 일을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왠지 미안하네요. 영주로서 더 도움을 줬어야 하는데…….”
“저는 오히려 영주님이 더 무리하셨다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뒷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마을 일이 정리되면 나중에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라구스 씨.”
“별말씀을요. 오랜만에 뵙게 되어 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나중에 더 이야기 나눠요. 일이 정리되면 바로 찾아갈 테니까.”
“하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구스와 수인들은 인사를 끝내고 빠르게 마을로 내려갔다. 우리도 짧은 배웅을 끝내고 농장으로 돌아갔다.
안드라스와 릴리아가 설치한 결계는 하루 정도는 끄떡없을 거라 했으니, 당분간은 딸기밭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여기 수건 받으세요.”
“아빠, 여기 수건!”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리아네와 은율이는 부산하게 움직이며 수건을 건넸다.
모두 수건으로 곳곳에 끼어 있는 눈을 털어내고 반쯤 젖어버린 외투를 벗었다.
손목에 착용하고 있던 아티팩트까지 벗어내자 뒤늦게 추위가 몰려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단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씻으세요. 두 분이 갈아입을 옷은 제가 미리 챙겨뒀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슈미르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얼른 이거 받으시고 욕실부터 들어가세요. 얼른요!”
리아네는 갈아입을 옷을 떠넘기고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리아네와 함께 사라졌다.
으음. 리아네 씨가 알아서 잘하겠지?
천족에 대한 건 일단 리아네에게 맡기기로 했다. 지금 머릿속에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입을 열 기력도 없던 우리는 대충 손짓으로 인사를 끝내고. 흐느적흐느적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벌레가 허물 벗듯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이미 김이 펄펄 나는 따뜻한 물이 잔뜩 받아져 있었다. 아마도 리아네가 미리 준비해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따뜻한 욕조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하아아아…….”
몸을 녹이는 따뜻한 기운에 기분 좋은 한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전신으로 퍼지는 나른함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쾌락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