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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317화 (317/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17화

천족과 신수(4)

따뜻한 물로 추위와 피로를 어느 정도 지워낸 뒤.

나는 급하게 몸을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욕조에서 늘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유혹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얼른 밖으로 나섰다.

미리 준비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우연히 문 앞에 있던 리아네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벌써 나오셨어요?”

“예. 조금 있으면 식사시간이니까 빨리 준비해야죠.”

“시현 님도 피곤하실 텐데 조금만 더 쉬시지…….”

리아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밝은 미소로 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촉박해서 어차피 거창한 음식은 준비 못 해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보다는 천족분들 좀 챙겨주실래요?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힘들게 일해서 정신이 없을 거예요.”

“알았어요. 시현 님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네.”

나는 리아네와 헤어져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살펴보니 오늘 가져온 반찬, 음식 재료들은 리아네가 미리 정리를 다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걸로 맛있는 식사를 차려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남은 시간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내 체력 상태가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간단하게 하려면…….”

-부스럭.

부엌의 수납장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한국의 평범한 가정집이라면, 그 브랜드는 달라도 무조건 한 묶음 정도는 있다는 그것.

“역시 라면만 한 게 없지!”

수납장에서 꺼낸 라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가 놀라울 정도로 편한 조리법, 그에 반해 압도적으로 안정적인 맛.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서는 가끔 이 녀석들이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

농장 식구들도 모두 라면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컵라면 같은 경우에는 사놓으면 모두가 몰래 하나씩 빼먹어서 금방 동이 날 정도였다.

한국 사람도 라면 취향이 다 다른 것처럼, 마족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매운 라면을 먹는 쪽과 별로 안 매운 라면을 먹는 쪽.

나는 각자의 매운맛 취향을 고려해 항상 두 종류의 라면을 각자 준비했다. 다행히 나뉘는 비율이 거의 5대 5라서 그렇게 번거로운 일도 아니었다.

흐음.

오늘은 모두 힘들게 일한 데다가 아슈미르 씨와 우르키 씨도 포함됐으니. 라면을 조금 넉넉하게 끓여야겠다.

재빨리 라면 묶음을 뜯고, 물을 받으며 머릿속으로 물의 양을 계산했다. 두 개의 냄비에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물을 담고 불을 올렸다.

“크흠, 큼. 라면 끓여?”

“어? 사장님, 벌써 나오셨어요? 이제 준비하고 있는데.”

“식사하러 온 건 아니고.”

카네프는 내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부엌으로 들어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뭐…… 도와줄 거 있나 해서…….”

“사장님이요?”

나도 모르게 높아진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평소에 식사하러 나오는 것도 귀찮아하는 걸 생각하면, 내가 보인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의 표정을 보고 속마음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아∼! 혹시 모두 힘들게 일하는데. 혼자서 집에 계셨던 게 신경 쓰이시는 거예요?”

“…….”

말없이 눈을 피하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카네프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냥 눈 그칠 때까지 기다리지. 뭘 그렇게 위험하게 일해.”

“어쩔 수 없었어요. 저희가 안 갔으면 어렵게 가꾼 딸기밭이 전부 눈에 파묻혔을 거예요.”

“쯧! 안드라스 그 녀석 온실을 만들 때 좀 튼튼하게 만들지. 왜 대충 만들어서…….”

카네프는 괜히 안드라스를 언급하며 민망함을 숨기려 했다.

딸기 밭이 이렇게 엄청난 눈 폭탄을 견디게 하려면 아마 상상도 못 하게 예산이 늘어났을 거다. 안드라스가 억울하게 욕먹는다는 걸 알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싱긋 웃기만 했다.

카네프는 내 옆으로 와서 꺼내놓은 라면을 집어 들었다.

“이거 뜯으면 되지?”

“네. 매운 라면이랑 안 섞이게 해주세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뜯으면서 물 끓는지 좀 봐주세요. 저는 라면에 채소랑 계란 준비하고 있을게요.”

나는 곧바로 냉장고 재료 칸에서 파와 마늘, 그리고 계란을 숫자에 맞춰 꺼냈다.

라면에는 뭘 넣어도 맛있지만, 개인적으로 기본적인 맛을 살리는 재료만 넣는 걸 선호했다. 계란도 딱 국물의 맛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기분에 따라 가끔 맵싸한 청양고추도 넣는데. 오늘은 농장에 처음 온 분들도 있으니 최대한 보통 맛에 맞춰 준비하기로 했다.

물이 끓는 순간에 맞춰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넣고 차례로 면을 집어넣었다.

냄비에서 흘러나온 라면 냄새가 부엌을 넘어 밖으로 흘러나갔다.

-쏙!

“시현 선배, 오늘은 라면이에요?”

엘프리드가 부엌으로 얼굴만 쏙 내밀며 물었다.

“응! 맞아.”

“으음! 냄새 너무 좋네요.”

라면 냄새에 이끌려 온 듯 눈을 반짝이다가 카네프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카네프 님도 계시네요.”

“왜? 내가 끓인 라면은 싫어?”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걱정하지 마. 농장에서 시현을 제외하면 내가 라면을 제일 잘 끓이니까.”

실제로 카네프는 라면을 좋아해서 내가 없을 때도 종종 라면을 끓여 먹는 편이었다. 귀찮아서 대부분 컵라면으로 대체하지만, 봉지 라면을 끓이는 실력도 꽤 좋았다.

“엘린, 라면 금방 되니까 접시 좀 미리 준비해 줄래? 아직 식당에 안 나오신 분들 있으면 미리 말 좀 해주고.”

엘프리드는 배가 아주 고팠는지 아주 빠르게 그릇과 수저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른 농장 식구들도 차례로 식당에 도착했다.

안드라스, 릴리아, 은율이.

엘프리드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한 번씩 부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연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완성된 라면을 냄비째 옮기던 중.

리아네와 두 명의 천족이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평소에 입던 하얀색 제복이 아니라, 약간 헐렁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세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부르러 갈 생각이었는데.”

“네…….”

“…….”

“리아네 씨도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요.”

자연스러운 리아네와는 달리, 아슈미르와 우르키는 굉장히 어색한 모습이었다. 각 잡힌 제복을 벗어서 그런지 딱딱하던 얼굴도 훨씬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배고프시죠? 두 분은 이쪽에 앉으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시현 씨에게 빚을 갚기 위해 일을 도왔을 뿐.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아슈미르는 또 천족 특유의 딱딱한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식사를 거절하려 했다.

어휴!

이 답답한 사람들을 또 어떻게 설득해야지? 이렇게 시간 끌면 라면 다 부는데…….

때마침 두 번째 라면 냄비를 옮기던 카네프가 이 모습을 보고 매섭게 눈을 떴다.

“어이! 거기 두 녀석.”

“…….”

“…….”

“아까 농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랬지? 여기서 일하고 싶으면 사장인 내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해. 당연히 내가 만든 음식도 무조건 먹어야 하고.”

“……!”

“……!”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빨리 앉아서 주는 대로 먹어. 라면 국물 한 방물이라도 남기면 바로 쫓아낼 테니까.”

카네프는 반쯤 협박하는 말투로 으르렁거렸다. 두 천족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듯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정정해 줬겠지만, 두 사람을 설득시키기에는 이쪽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사장님이 이 농장의 책임자이신 건 사실이니까요. 두 분이 저를 돕고 싶으시다면 어느 정도 따라주셔야 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아슈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르키 견습 감시관.”

“네. 아슈미르 님.”

다행히 별다른 설득 과정 없이 두 사람은 식탁의 정해진 자리로 향했다.

모두 자리 잡은 걸 확인한 뒤, 나는 각자의 그릇에 라면을 나눠줬다. 라면을 받은 모든 이의 표정에서 빨리 먹고 싶다는 초조함이 생겨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카네프에게로 향했다.

“오늘 모두 수고했어. 식기 전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식사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식탁에는 수저를 움직이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응.”

나는 언제나처럼 옆자리에 은율이를 먼저 챙겼다. 충분히 혼자서 먹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내 라면 그릇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라면 그릇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코끝까지 얼큰한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 뒤,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접시에서 면발을 들어 올려 후후 불어 입 앞으로 가져갔다. 들숨을 삼키듯 면발을 후루룩 집어삼켰다. 입안에 적당히 라면 맛이 퍼지는 와중에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김치.

새빨간 양념과 새하얀 배추 속살. 무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담가준 새 김치였다.

입안에 넣자마자 ‘아삭!’하는 식감과 함께 시원하고 매콤한 느낌이 가득 느껴졌다.

입안에 라면과 김치의 맛있는 조화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숟가락 가득 라면 국물을 입안으로 가져가면…….

으어어어!

몇 시간 동안 눈보라 속에서 고생했던 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나는 이 맛있는 라면을 위해 그 지독한 눈보라와 싸운 게 아닐까?

잘 끓여도 라면 맛, 못 끓여도 라면 맛이지만.

조금 전까지 추위 속에서 고생한 덕분인지, 오늘은 라면이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빠르게 젓가락질을 이어나갔다. 은율이가 있다는 것도 잠시 까먹을 정도로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릇을 반쯤 넘게 비웠을 때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서로의 시선을 의식한 나와 아슈미르.

나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은 무표정해도 이건 뭔가…… 뭔가 애절한 느낌.

가끔 아기 야쿰들이나, 새끼 그리핀들에게 자주 느꼈던 이 느낌.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를 눈치채며 물었다.

“아슈미르 씨?”

“…….”

“라면 더 드릴까요?”

순간 아슈미르의 주변에서 꽃이 피어나듯 분위기가 샤방샤방하게 변했다. 너무 그 효과가 극적이라 영화의 CG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릇에 면과 국물을 가득 담아 아슈미르에게 건넸다.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농장 식구들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시현 오라버니! 나도 더 먹을래.”

“저, 저도…….”

“아빠! 아빠!”

“잠깐만요. 저도 더 먹을래요.”

내 주변을 빠르게 포위하는 빈 그릇들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넉넉하게 끓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라면 식사는.

어머니의 김치를 한 통 더 꺼내고, 냉장고에 찬밥과 즉석밥을 모두 말아먹고 나서야 모두 만족하며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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