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23화
마족의 고백(1)
정식으로 교제를 요청?
조금 생소한 표현에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발레리안이 살포시 웃으며 설명을 덧붙여줬다.
“쉽게 말해서 고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오…….”
나는 신기함, 부러움 그리고 약간의 놀람이 뒤섞인 얼굴로 안드라스를 바라봤다.
그는 무척이나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함을 숨기지 못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런데 이미 두 분은 교제 중이신 거 아니었나요? 저는 당연히 사귀고 계시는 건 줄 알았는데.”
“시현 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미 양과 저는 최근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희의 관계는 공식적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비밀연애라서요?”
“물론 그런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정확히는 가문에 인정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시현 님도 저희 두 사람의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슈나르페, 바르바토스!
두 가문은 마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흐음…… 지금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단계고. 안드라스 씨는 다음 단계, 그러니까 가문에 허락까지 받는 단계로 나아가시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저쪽 세계에서 하는 연애와 별반 다르지 않네요?”
이번에도 발레리안이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을 보충했다.
“과정은 비슷할지 몰라도 느껴지는 무게감은 조금 다를 겁니다. 이곳의 귀족 사회에서 공개적인 연애는 곧 결혼이나 다름없거든요.”
“헉! 그 정도예요?”
“특히 규율이 엄격한 가문일수록 더 심합니다. 그래서 젊은 귀족 간의 연애는 대부분 은밀하게 이뤄지죠. 뭐…… 공공연한 비밀일 때가 더 많지만요.”
그리고 발레리안은 안드라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사교계에 발이 정말 넓은 편인데, 이 친구의 연애 소식은 정말 듣기 힘들었거든요. 너무 연애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크흠, 큼! 왜 쓸데없는 소리를.”
안드라스는 다시 헛기침하며 말을 막았다. 발레리안은 그저 이 상황이 재밌는지 킥킥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도 민망함에 어쩔 줄 모르는 안드라스가 재밌어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어이구! 지금 너희들 내 방에서 일부러 이러는 거냐?”
카네프가 책상에 턱을 괸 자세로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뒤늦게 살벌한 기세를 눈치채고 책상 쪽에서 한발 물러섰다.
“에이, 사장님 왜 그러세요. 좋은 일에는 다 같이 축하해 줘야죠.”
“저 뺀질뺀질한 놈 좋은 일을 왜 내가 축하해? 지금이라도 단장으로 복귀해서 저놈을 지옥으로 끌고 가야 할지 고민하는 중인데.”
“흐억!”
안드라스는 크게 숨을 집어삼키며 내 등 뒤로 숨었다. 덜덜 떠는 모습이 카네프라면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카네프와 안드라스 사이에 끼어서 곤란해하고 있을 때, 발레리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꼭 좋은 일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
“예?”
“그게 무슨 소리야?”
“모든 걸 원한다고 다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귀족들 간의 연애에서 공인된 관계로 나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거든요.”
안드라스의 얼굴이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반면에 카네프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동시에 찌푸렸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흐흐, 그렇네. 아직 모르는 일이지. 저놈이 보기 좋게 차여서 돌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사장님, 차라리 욕을 하시죠.
이건 뭐 저주도 아니고…….
카네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이야기에 안드라스의 몸이 다른 의미로 떨려왔다. 나는 커다란 덩치의 마족을 토닥토닥해 주며 진정시켰다.
“안드라스 씨, 진정하세요.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남자는 무조건 자신감! 자신감이 중요하다고요.”
다행히 위로가 통했는지 떨림이 줄어들고 흔들리던 눈빛이 진정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미리 생각해 두셨죠?”
“그렇습니다. 그녀가 고백을 받아준다면. 얼마 뒤에 있을 바르바토스 가문의 행사에서 저희와 관계를 인정받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안드라스는 나와 발레리안을 차례로 바라봤다.
“만약에 제가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풀렸을 때는 리안, 그리고 시현 님께 증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증인?”
이번에도 발레리안이 대신 설명을 덧붙였다.
“약혼 또는 결혼에 증인이 되는 겁니다. 두 남녀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인이 대신해서 보장하는 거죠. 보통 친한 지인이나, 명망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증인이 되어줬던 사람이 대부나 대모가 되는 경우도 많죠.”
“헉! 그럼 굉장히 중요한 역할 아닌가요? 리안 씨라면 몰라도 제가 그런 역할을 맡아도 될지…….”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먼저 말씀드린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습니다. 아직 제대로 결정된 것은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라스의 진지한 부탁에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증인이 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바르바토스 아가씨의 허락을 받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고백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련해서 시현 님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저, 저요?”
나는 덩달아 긴장한 표정을 하며 안드라스의 말을 기다렸다.
“아시다시피 마족들은 시현 님이 사는 세계에 관심이 높지 않습니까? 아미 양도 관심이 많아서 그걸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가 많았습니다. 시현 님께 들은 내용을 전해주기도 하고, 제가 직접 방문했을 때, 본 것들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미 양은 직접 가보지 못하는 점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호오…….”
이야기에 앞부분만 듣고 나서도 안드라스가 어떤 부탁을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아미 양에게 저쪽 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싶습니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그녀에게는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그리고 좋은 분위기를 이용해서 고백도 성공하고요?”
“크흠……. 꼭 고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매번 아쉬워하는 아미 양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좋은 경험이…….”
안드라스는 평소에 논리정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한마디에도 너무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더 장난치고 싶다는 짓궂은 생각이 들면서도, 새어 나오는 행복한 표정이 부럽기도 했다.
“근데 저는 한 분만 자유롭게 데려갈 수 있는데 어떻게 하죠?”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슈나르페 가문을 대표해서 기술 지원 명목으로 방문이 예정돼 있습니다. 시현 님은 아미 양만 데려가 주시면 됩니다.”
“오? 벌써 거기까지 준비해 두신 거예요?”
“큭큭. 시현 씨는 모르셨겠지만. 저 친구 이 기술 지원 일정을 잡으려고. 몇 주 전부터 마왕성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들락거렸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이 고백을 준비하는 거구나.
나는 순수한 감탄을 담아 안드라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현 님께는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최대한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릴리아에게 전해 들었는데. 저쪽 세계에는 ‘데이트 코스’라는 문화가 있다고…….”
데이트 코스.
간단하게 말해 미리 정해둔 데이트의 일정을 말하는 표현.
“제가 지구 쪽의 물정이 어둡다 보니 계획을 짜기 쉽지 않더군요. 혹시 시현 님께서 데이트 코스를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 음…….”
만약에 단순한 데이트였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추천해 줬겠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데이트와 차원이 달랐다.
이 데이트 마지막에는 아주 중요한 이벤트, 안드라스의 고백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그 마지막 이벤트를 위한 일정을 짜야 하는 것.
좀 부담스러운데…….
괜히 돕겠다고 나섰다가 훼방만 놓는 거 아냐?
이제 지구 쪽보다 마계에 체류하는 시간이 더 많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선뜩 대답하지 못했다. 안드라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도움을 주기 어려우십니까?”
“아뇨. 어렵다기보다는.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서…… 안드라스 씨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잖아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최고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현 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겁니다.”
그,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안드라스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두터운 신뢰가 전해졌다. 누군가에게 신뢰받는 일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더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졌다.
쩝… 어쩔 수 없나.
저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도저히 거절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조금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데이트 코스는 제가 준비해 볼게요.”
와락!
“하핫! 정말 감사합니다, 시현 님!”
안드라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평소에 보지 못한 격한 감정 표현에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전해졌다.
“컥, 컥! 안드라스 씨! 숨 막혀요.”
“아앗! 죄송합니다.”
나는 거대한 마족의 품에서 벗어나 숨을 골랐다.
“휴우우. 일단 자세한 일정 좀 알려주세요. 어떤 날에 얼마나 시간 여유가 있는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미 양의 취향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세요. 가보고 싶은 곳이라던가, 먹고 싶은 음식, 관심 가질 만한 것들 같은 거요.”
안드라스는 어느새 수첩과 펜을 꺼내 내가 한 말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한테도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당연히 도와주셔야죠. 리안 씨는 저보다 더 지구 쪽에 오래 계시는 분이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네요.”
발레리안은 이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안드라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정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의지를 다졌다.
걱정 마세요, 안드라스 씨!
고백이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