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25화
마족의 고백(3)
“모두 준비되셨죠?”
“네.”
“네.”
뒷좌석에 앉은 안드라스와 아미가 살짝 굳은 자세로 대답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저도 꼭 함께 가야 하는 겁니까?”
조수석에 앉은 발레리안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리안 씨도 같이 가셔야죠.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제 생각에는 별일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그냥 같이 가주세요. 소중한 친구의 일이니까 리안 씨에게도 중요한 일이잖아요.”
“으음…… 알겠습니다.”
발레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 오전.
혼잡한 러시아워가 끝난 도로를 여유롭게 운전해나갔다.
“와아…… 들었던 대로 건물들이 엄청 높네요.”
처음 지구의 도시를 구경하는 아미가 감탄을 터뜨렸다.
“이 세상에는 지금 보이는 건물보다 훨씬 높은 건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구름을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라고 하더군요.”
“정말요?”
두 사람은 함께 창문 밖 풍경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경직된 자세와 표정도 느슨해졌다.
나는 백미러로 뒷좌석의 분위기를 살피며 여유롭게 운전했다. 오늘 데이트의 시작은 처음 방문한 관광객 느낌으로 할 생각이었다.
천천히 도시를 둘러보면서 신기한 구경도 하고, 첫 지구 방문의 긴장감도 풀어줄 생각이었다.
나도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생활을 전혀 모르는 두 마족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정의 앞부분은 나와 발레리안이 가이드 역할을 맡아 이곳저곳 구경시켜주고.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도록, 조용히 빠져나올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두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집중해야 할 때.
“아미 양, 궁금한 점이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오전부터 점심때까지는 일정이 여유롭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카디스…… 아니, 시현 님!”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창문 밖의 한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보이는 큰 건물은 뭐 하는 곳인가요?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네요.”
“백화점이라고. 여러 종류의 상품을 한데 모아놓고 파는 곳이에요. 한 번 들어가 구경해보실래요?”
* * *
평일 오전 임에도 백화점 안은 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안드라스와 아미.
두 마족은 뿔도 숨기고, 옷도 평범하게 입은 덕분에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세 마족 모두 ‘선남선녀’라 자연스럽게 이목을 끌었다.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는 순진한 두 마족이 불편하지 않도록, 시선이 너무 모여들기 전에 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와아……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상품인 건가요?”
“네. 층별로 상품의 종류를 나눠서 팔고 있어요.”
“마계의 큰 상회가 운영하는 상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네요.”
아미에 이어서 안드라스도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입구를 지키는 병력도 없는 것 같은데. 아무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겁니까?”
“너무 수상한 사람만 아니면 보통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어요.”
“귀족이 없는 세상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곳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니…… 시현 님이 살고 계신 곳은 보면 볼수록 놀랍군요.”
계속해서 감탄하는 두 마족을 이끌고 백화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저기, 저곳은 혹시…….”
그중에서 가장 먼저 아미의 눈길을 끈 것은 화장품 가게였다.
“들어가 보실래요?”
-끄덕끄덕.
기대감 가득한 아미를 발레리안이 화장품 가게 입구로 안내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은 온통 샤방샤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의 안드라스가 들어서자 가게 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시, 시현 님. 여기는…….”
“괜찮아요. 그냥 화장품을 파는 곳이에요.”
원래 화장품 가게에 남자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남자가 들어가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안드라스를 진정시키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이쪽에 계신 분이 해외에서 오셨는데. 화장품에 관심을 보여서요. 혹시 추천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어색해하는 나와 안드라스와는 달리. 발레리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점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 관광객이셨구나. 이쪽으로 와 주실래요.”
점원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미를 신상품이 가득한 코너로 이끌었다. 발레리안도 함께 붙어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안드라스 씨도 좀 구경해 보실래요?”
“네? 이곳에 있는 건 모두 여성분들을 위한 상품 아닙니까?”
“요즘은 남성용 제품도 많이 팔아요.”
나는 안드라스와 함께 가게 한 쪽에 있는 남섬용 화장품들을 둘러봤다. 여자 화장품에 비하면 가짓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제품이 나와 있었다.
으음…….
온 김에 농장 식구들에게 줄 것도 살까?
“저기요.”
“네? 손님.”
“선물용으로 구매하려고 하는데.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세요? 어떤 종류로 추천해드릴까요?”
“으음…… 그냥 종류별로 하나씩 말해주세요.”
점원에게 추천받은 화장품을 사람 숫자에 맞춰 집어 들었다.
별로 화장품에 관심도 없어 보였던 내가 제품을 쓸어 담자, 어리둥절하던 점원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지더니. 처음보다 훨씬 더 친절해진 목소리로 이것저것 추천하기 시작했다.
“시현 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리고 모두 말은 안 해도 같이 놀러 나오고 싶었을 텐데. 이런 선물이라도 사 가야죠.”
선물을 받고 좋아할 농장 식구들을 상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한편, 아미는 편하게 앉아서 화장품 추천도 받고, 점원에게 직접 사용하는 방법도 안내받고 있었다. 발레리안도 옆에 서서 설명을 도와줬다.
“손님 피부가 너무 좋네요. 속눈썹도 정말 길고 예쁘시고요.”
점원은 옆에 있는 발레리안을 보며 물였다.
“혹시 옆에 계신 분이 남자친구?”
“아, 제가 아니라…….”
“……!”
남자친구를 묻는 말에 아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갔다.
-덥석!
그리고 재빨리 안드라스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어엇?!”
“…….”
안드라스는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지만, 아미는 꽉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설명을 해주던 점원에게 강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게 안에 있던 모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방 모두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남자친구를 자랑하고 아미의 행동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 * *
우리는 화장품 가게에서 나와 백화점을 더 둘러봤다.
이번에는 안드라스가 관심을 보이는 곳 위주로 돌아다녔는데. 그가 관심을 보이는 곳은 가전제품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오오! 이렇게 커다란 화면에 이 정도의 선명함이라니…… 4K? UHD? 이건 무슨 뜻입니까?”
안드라스는 수많은 TV 제품들에 감탄하며,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지나가는 매장 점원에게 상세 설명을 들으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가전제품들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은 좋은데. 옆에 연인이 있다는 사실까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느낌에 슬쩍 옆을 돌아봤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미는 미소를 지으며 안드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끼고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시현 님?”
“으음…… 그게…….”
“……?”
“서운하지 않으세요? 데이트 중인데 아미 양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렸잖아요. 제가 가서 끌고 올까요?”
내 물음에 아미는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제르무어 마법사단에서는 흔한 일이거든요. 흥미 있는 연구 거리나, 아티팩트를 발견하면 항상 저렇게 돼버리세요.”
“아…….”
슈나르페 가문의 특징이라고 해야하나.
안드라스, 릴리아 모두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끝장을 보는 타입이었다.
아마 제르무어 마법사 단원인 아미도 그의 이런 행동을 여러 번 보았겠지.
그래도 명색이 데이트인데…….
나와 발레리안의 염려가 무색하게. 아미는 오히려 따뜻한 표정으로 안드라스를 바라봤다.
“저는 안드라스 님의 저런 모습을 존경해요. 어렵고 힘든 연구에도 항상 열정을 잊지 않고 즐기는 모습은 저에게 많은 걸 깨닫게 해줬거든요.”
그녀의 눈동자에 반짝임이 커졌다.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
“…….”
“그래서 저는 지금 무척 행복해요.”
아미의 진실한 이야기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안드라스가 어떤 존재인지 잠시 엿본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천생연분이라는 건가?
약간 질투가 생겨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대단해 보였다.
“시현 님! 저쪽에 있는 신제품. 농장에 설치해 보는 게…… 으음, 시현 님?”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달려온 안드라스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아미는 계속 미소지을 뿐이었고, 발레리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안드라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드라스 씨.”
“……?”
“오늘 고백 무조건 성공하셔야 해요. 아미 양이 아니면 죽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세요. 아셨죠?”
“……??”
안드라스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내 강렬한 눈빛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인정해주고, 응원해 주는 짝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안드라스처럼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작업실에 틀려 박히는 경우라면 더욱더!
안드라스 씨!
아미 양은 무조건 잡아야 해요.
나는 고백을 꼭 성공시키겠다고. 다시 한번 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