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0화
사라진 요정들(3)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규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란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다.
지금 나의 영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딸기밭을 빼놓을 수 없다. 부지런한 수인들과 요정들의 능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넓은 딸기밭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거다.
나는 다시 한번 더 규리를 손바닥 위에 올리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정말 도와줄 거야, 뾰?」
“물론이지. 나도 규리와 친구들에게 많이 신세 졌으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지. 친구들을 꼭 딸기밭으로 데려와 줄게.”
작은 요정이 안심할 수 있도록 확신을 담아 약속했다. 조금은 울상이었던 규리의 표정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꺄아아아! 역시 시현이다, 뾰!」
규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뺨으로 달려들어 연속으로 뽀뽀를 해댔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음껏 기쁨을 표현한 뒤 다시 감정을 진정시킨 규리에게 물었다.
“규리야,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거야?”
「일단 여왕님이 계신 곳! ‘요정계’로 가야 한다, 뾰!」
요정계?
어리둥절한 나를 대신해 릴리아가 한발 빠르게 질문했다.
“나 들어본 적 있어. 모든 요정이 태어나는 고향 같은 곳이지?”
「그렇다, 뾰!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뾰!」
“근데 요정계는 요정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들었는데. 마족은 물론이고, 인간인 시현도 거긴 못 들어가잖아?”
「보통은 그렇지만, 시현은 가능하다, 뾰!」
“……?”
「시현은 우리들의 축복을 받았다, 뾰! 그럼 요정계에 들어갈 수 있다, 뾰!」
“오오! 그렇구나.”
나는 오래전 규리와 다른 요정들의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았었다. 그때 받은 축복이 지금 이렇게 사용될 줄이야.
“그럼 시현 오라버니는 바로 요정계에 갈 수 있는 거야?”
릴리아의 물음에 규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다, 뾰! 시현은 요정이 아니라 요정계로 곧바로 갈 수 없다, 뾰! 비밀스럽게 숨겨진 요정계의 입구를 찾아야 한다, 뾰!」
“그 입구는 어딨는데?”
「나도 모른다, 뾰!」
“으응?”
「나는 입구 없이도 요정계를 마음껏 드나들 수 있으니까, 한 번도 입구를 본 적 없다, 뾰!」
규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나는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릴리아 역시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게 뭐야? 그럼 아무 소용없잖아.”
「아니다, 뾰! 대신 입구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뾰!」
규리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침묵의 숲’에서 사는 마족들이 입구가 어딨는지 알고 있다, 뾰!」
* * *
늦은 밤.
돌아온 규리와 놀다가 먼저 잠든 은율이를 제외하고, 농장의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아슈미르와 우르키는 물론이고, 데이트를 끝마친 안드라스도 한 자리를 채웠다.
나는 시현계에서 규리와 나눴던 이야기를 농장 식구들에게 전했다.
그 사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고 생각한 리아네가 미리 차를 준비해 모두에게 나눠줬다.
그녀는 나에게도 차를 건네주며 물었다.
“규리는 이제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 여왕한테 또 끌려가지는 않나요?”
“제 근처에 있으면 괜찮대요. 아마 시현계의 영향 때문에 요정 여왕의 능력을 피할 수 있나 봐요.”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이제 막 돌아왔는데. 또 훌쩍 사라져 버리면 은율이가 정말 슬퍼할 거예요.”
“그럴 일은 없도록 해야죠.”
은율이를 걱정하는 리아네를 안심시키며. 그녀에게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모두의 자리 앞에 따뜻한 차가 준비되자.
가장 먼저 카네프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이유는 몰라도 요정 여왕이 딸기밭의 요정들을 잡아갔고. 그 요정들을 구하려면 ‘침묵의 숲’에 있는 입구로 향해야 한다는 거지?”
완벽한 요약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카네프는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 요정들 꼭 구해야 하는 거냐? ‘침묵의 숲’에서 어떻게 입구를 찾아 요정계에 도착해도 요정 여왕이 잡혀간 요정들을 순순히 풀어준다는 보장도 없잖아?”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
그의 말에 아슈미르와 우르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반면에 안드라스는 곧바로 요정들의 중요함을 호소했다.
“요정들은 이곳에 딸기밭을 만들 수 있게 도움을 줬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딸기밭을 키울 수 없었을 겁니다.”
“딸기밭도 꼭 있어야 해? 괜히 그것 때문에 너랑 시현도 이리저리 고생하잖아.”
“저희가 고생한 만큼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카디스 영지의 주요 수입원일 뿐만 아니라, 엘든 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일터이기도 합니다. 당장 딸기밭이 사라진다면 그 타격은 쉽게 메꿀 수 없을 겁니다.”
“흐음…….”
카디스 영지는 기형적일 정도로 딸기밭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벌꿀 맥주도 그 수입이 계속 상승하는 중이긴 하지만, 아직은 딸기밭에서 생산되는 딸기와 딸기잼이 주된 수입원이었다.
만약에 딸기밭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엘든 마을 주민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먹고살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거대 상단의 방문도 자연스럽게 끊기게 될 테니, 지금처럼 값싸고 좋은 물건을 구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아직 자급자족이 힘든 영지의 사정상 엄청난 타격이라 할 수 있었다.
안드라스는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네프의 말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이었다.
“안드라스 선배 말이 맞아요. 모두가 고생해서 만들고 가꿔온 딸기밭이에요.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카네프 님도 딸기 수확할 때마다 매번 챙겨 드실 정도로 좋아하시잖아요.”
엘프리드와 리아네도 안드라스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을 보탰다. 은율이도 여기에 있었다면 아마 애교를 부리며 카네프를 설득했을 거다.
나뿐만 아니라 농장 식구들 대부분이 딸기밭에 자부심이 있었다. 맛과 인기 모두 마계에서 최고라고 불릴 정도니까.
우리들의 반응에 카네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딸기밭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알아. 내가 딸기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근데 너희들 ‘침묵의 숲’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의 물음에 사람들의 반응이 갈렸다.
몇 명은 표정이 굳어졌고, 나머지 몇 명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죽어서 침묵을 지키게 되는 곳. 내가 거칠 것 없던 시절에도 굉장히 긴장했던 곳이라면 감이 좀 잡히려나?”
사장님을 긴장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사람들 얼굴의 의문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마계에서도 위험하기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침묵의 숲’이야. 거기다 그곳에 사는 마족이라면 ‘그림자 일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도 만만치 않게 위험해.”
“…….”
“일족 전체가 폐쇄적인 분위기라 숲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침입하면 무조건 죽이려 들거든. 또 암살 실력은 어찌나 뛰어난지, 숲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숲의 암살귀’라고 부르더라.”
끔찍한 설명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안드라스 쪽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의 그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네프 님의 설명대로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저도 직접 방문해 본 적은 없지만. 검은수리 단원 선배님들께 듣기로는,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위험한 곳일 줄이야…….
‘침묵의 숲’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한참 더 위험한 곳인 듯했다.
카네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도 ‘침묵의 숲’에 갈 거야?”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처음의 생각을 굽히지는 않았다.
“……가야죠.”
“…….”
“꼭 딸기밭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요정들에게 받은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요. 그들이 제 발로 떠난 게 아니라면 꼭 다시 데려오고 싶어요.”
가끔은 귀찮을 정도로 장난도 많이 치고,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지만…… 요정들도 이곳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려울 때 모르는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거기다 규리랑 벌써 약속해 버렸거든요. 반드시 친구들을 데려오기로.”
내 결정에 카네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오지랖만 넓어서는…… 잔뜩 겁주면 혹시 조용히 넘어갈까 싶었는데. 역시 어림도 없었네.”
“역시 침묵의 숲에 관한 이야기는 겁주려고 거짓말하신 거죠?”
“아니. 숲이 위험하다는 건 진짜야. 안드라스 표정 못 봤어?”
“…….”
잠시 가졌던 희망은 금방 산산조각이 났다.
카네프는 한숨을 내쉬며 안드라스 쪽을 바라봤다.
“야, 안드라스.”
“네, 카네프 님.”
“시현을 ‘침묵의 숲’으로 데려갈 준비 네가 직접 맡아서 제대로 해놔.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그 지독한 놈들이 나만 보면 더 난리 피울 테니까 어쩔 수 없네.”
안드라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안드라스 씨, 괜찮으시겠어요? 요즘에 아미 양이랑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괜찮습니다. 시현 님을 돕는 일이라면 그녀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겁니다.”
“고마워요, 안드라스 씨.”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인사에 안드라스는 잔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네프는 추가로 안드라스에게 지시했다.
“그림자 일족을 만나러 갈 거면 ‘그 녀석’에게 부탁해 봐. 고향에서 떠난 지 오래됐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워낙 신출귀몰한 녀석이라 찾기 힘들겠지만, 발레리안의 도움을 받으면 최근 소식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 녀석’이라는 모호한 지칭에도 안드라스는 곧잘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 로커스랑 크록도 데려가. 녀석들도 침묵의 숲을 경험해 봤으니 도움이 될 거야.”
“으음…… 만약에 ‘그분’이 오시는 걸 알면 로커스 선배는 절대 합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 녀석 영지 재정관 자리에서 편하게 놀고먹는 중이라면서? 그만큼 놀았으면 이제 빡세게 일해야지. 이번 일에 빠지면 내가 직접 영지에서 내쫓을 테니까 알아서 합류하라고 전해.”
안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흐음. 불쌍한 로커스 선배…….”
‘그분’이 누구길래 저런 반응이야?
카네프와 안드라스가 언급한 의문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며 눈을 반짝였다.
그 날 시간이 늦어져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농장 식구들은 침묵의 숲으로 가기 대책과 필요한 것들을 의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