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1화
사라진 요정들(4)
“절대 안 해!!”
찰랑찰랑한 금발, 곱상한 외모의 영지 재정관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평소의 능글능글한 표정은 금방 굳어지고, 잘생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안드라스가 ‘침묵의 숲’, ‘그림자 일족’을 언급하자마자 로커스가 보인 반응이었다.
“로커스 씨,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카디스 영지에 딸기밭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로커스 선배도 아시지 않습니까? 영지의 재정관이라면 더더욱!”
나와 안드라스의 달래기가 통했는지 로커스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살 떨리는 ‘침묵의 숲’에 또 들어가자고? 그것도 ‘미친년’이랑?”
“딸기밭의 요정들을 다시 데려오려면 꼭 그곳에 가야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로커스 씨.”
“시현, 오히려 내가 부탁할게……. 나는 그냥 영지 재정관이잖아. 여기서 영지 업무나 열심히 하고 있을게. 대신 크록, 저 녀석 데리고 가. 나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걸?”
로커스는 커다란 덩치의 용혈족을 손가락질하며 어떻게든 시선을 돌리려 했다.
“로커스 선배…… 크록 선배는 이미 저희와 같이 침묵의 숲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냥 포기하시고 합류하세요.”
“저, 저 배신자…….”
로커스는 크록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이에 크록은 ‘내가 뭘?’이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크록은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면서 수화로…….
-요정들이 없으면 엘든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어떻게든 그들을 돕고 싶다.
……라고 말해 나와 안드라스에게 감동을 줬다.
한편.
로커스는 점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깨닫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미친년은 어떻게 찾을 건데? 걔 없이 침묵의 숲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거 알지?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찾기 쉽지 않을걸?”
“발레리안을 통해 최근에 머물렀던 곳을 이미 찾아놨습니다.”
겨우 찾아낸 변명거리가 쉽게 막혀 버리자 로커스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짜증을 터뜨렸다.
“아니, 그놈은 저번에도 그러더니. 왜 우리 위치를 다 알고 있는 거야?!”
“일종의 통제 장치 같은 거죠. 여러 의미로 개성 넘치는 분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으니까요. 누구든 ‘검은수리’의 이름에 먹칠하면 카네프 님이 직접…….”
안드라스는 뒷말을 생략했지만, 로커스를 포함한 모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서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사장님이 직접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쳤다.
“로커스 씨.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시면 안 될까요?”
“끄응…….”
나의 간절한 부탁에도 로커스의 허락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모습에서 정말 가기 싫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쩔 수 없나?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는 일이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념하려던 그때!
-덜컥!
-우르르르르!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라구스, 레빌, 미루. 거기다 수많은 마을 주민들까지 모여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로커스!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이야. 내가 지금까지 자네에 대해 오해를 했었나보구만.”
“로커스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
“뭐, 뭐야? 뭐가 대단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로커스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사람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민들을 대표해 라구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크게 감동한 얼굴로 로커스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로커스. 정말 고맙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딸기밭의 요정들을 되찾기 위해 자네가 침묵의 숲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네.”
“뭐?! 내가 언제…….”
“마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 들었는데. 우리를 위해 이렇게 선뜻 나서주다니…… 마을 주민들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표하겠네.”
“아니…….”
라구스는 촉촉해진 눈으로 로커스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당황한 로커스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레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놀고먹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하잖아? 정말 다시 봤어.”
레빌은 코밑을 쓱쓱 문지르며, 조금은 머쓱한 감정을 담아 로커스를 치켜세웠다.
마을 주민들의 칭찬이 이어질수록 로커스의 얼굴은 점점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그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정관 아저씨, 너무 멋져요!”
“엄마가 로커스 아저씨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래요.”
“나도 나중에 크면 아저씨처럼 될래요!”
아이들은 영웅을 바라보듯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로커스를 바라봤다.
“얘들아…… 그게…….”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는지, 로커스는 아니라는 말을 끝끝내 하지 못했다.
“로커스! 재정관 일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자네 몫까지 처리해놓겠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내가 가장 아끼는 무기와 장비도 아낌없이 꺼내줄 테니.”
“여러분! 자랑스러운 영지 재정관, 로커스를 위해 성대한 식사와 귀한 술을 준비합시다!”
“와아아아아!!”
“로커스! 로커스!”
“로커스! 로커스!”
“…….”
마을 주민들은 열광적으로 로커스의 이름을 외쳤다.
정작 이름을 불리는 당사자는 반쯤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재미있게 흘러가는 상황에 나는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조용히 안드라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안드라스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던 그때.
이상한 움직임이 내 눈에 띄었다.
커다란 용혈족과 작은 고양이 소녀.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설마……?
내 시선을 느낀 수상한 두 사람.
크록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 옆에 미루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나와 안드라스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로커스를 밖으로 끌고 나가 헹가래를 해줬다. 반쯤 체념한 그의 표정이 안쓰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크록과 로커스가 ‘침묵의 숲 원정대’에 합류했다.
* * *
‘침묵의 숲’으로 향할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이미 요정들이 사라진 딸기밭이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기에, 모든 딸기밭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빨리 요정들을 데려와야 했다.
일행에 합류한 멤버는.
입구를 통해 요정계에 들어갈 나와 규리와 합류 의사를 표명한 안드라스, 리아네, 크록.
마지막으로 떠밀리듯 참여한 로커스까지. 이렇게 총 여섯 명이었다.
엘프리드, 아슈미르, 우르키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카네프가 나서서 세 사람의 합류를 막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녀석이 합류할 예정이라 너희들은 안 돼. 그리고 다 가버리면 농장일은 누가 해?”
과거 검은수리 단원 출신에, 로커스가 ‘미친년’이라 부르며 치를 떠는 의문의 인물.
낯을 많이 가리는 그녀를 합류시키는 게 우리들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녀의 최근 위치는 발레리안을 통해 미리 조사해둔 상황이었다.
이렇게 일행을 구성하다 보니 나와 규리를 제외하면, 모두 검은수리 단원 출신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리아네는 준비를 끝마친 일행들을 보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옛날 생각나는 것 같아 그립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카네프 님이 공식적으로 해산을 명령한 뒤, 이렇게 많은 단원이 모여서 임무를 떠나게 될 줄은…….”
안드라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크록도 열심히 수화를 표현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물론 세 사람의 아련한 분위기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립긴 뭐가 그리워! 그때 고생한 건 하나도 기억 안 나? 나는 벌써부터 지긋지긋해 죽겠…… 아악!”
불평하는 로커스의 뒤통수를 향해 카네프가 손을 휘둘렀다.
“아이씨! 왜 때려요?!”
“그만 구시렁거리고. 제대로 임무에나 집중해. 특히 저 녀석은 다치면 안 되는 거 알지? 만약에 시현이 다쳤는데 네가 멀쩡한 상태면, 옛날이 훨씬 그리워지게 만들어 줄 거야.”
무시무시한 협박에 로커스는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죽으라고 저주를 하세요. 저주를.”
“뭐? 이걸 콱!”
“으아아악!”
로커스는 카네프에게서 후다닥 도망쳐 내 등 뒤에 숨었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모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현 영주님. 이건 재정관 일이랑 별개인 거 알지? 고용비는 확실히 챙겨줘야 해?”
“알았어요. 로커스 씨, 크록 씨 모두 만족할 만큼 챙겨드릴게요.”
“저 괴물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니까. 나만 두둑하게 챙겨줘.”
“하하하…….”
이 와중에도 자신의 몫은 확실히 챙기는 로커스.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금방 다녀와야 해. 알았지?”
작은 여우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여우 소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꼭 금방 돌아 테니까. 은율이는 아빠 없는 동안 사장님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알았지?”
“응. 말 잘 듣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라, 뾰! 시현은 내가 꼭 지켜줄 거다, 뾰!」
규리도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은율이를 안심시켰다. 덕분에 여우 소녀는 불안감을 조금 떨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시현 님.”
“농장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행운을 빌겠습니다.”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돌아와. 괜히 또 무리한 짓 하지 말고.”
농장 식구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안드라스가 차원도약 마법을 준비하는 사이, 옆에 있던 로커스에게 살짝 물었다.
“지금 또 다른 검은수리 단원을 만나러 가는 거죠? 그…….”
“미친년?”
“아…… 네. 그분이요. 어떤 분이길래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거죠?”
“설명 안 했었나? 우리처럼 검은수리 단원이면서 ‘그림자 일족’ 출신이야.”
나는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림자 일족이라면 침묵의 숲에 산다는 마족?”
“맞아.”
로커스는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름은 ‘테르잔’.”
“테르잔…….”
“단장을 제외한 모든 검은수리 단원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