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5화
위험한 그녀(4)
숨어 있던 작은 요정, 규리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시현을 괴롭히면 내가 혼내줄 거다, 뾰!」
규리는 테르잔을 향해 양팔을 붕붕 휘두르며 위협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위협이라기보다는 귀여운 앙탈처럼 느껴졌다.
“어어…… 엇? 요정?”
루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규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테르잔은 갑자기 나타난 요정을 보고도 반응을 크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역시 그랬구나.”
“예?”
“냄새가 났거든…… 요정 냄새.”
“테르잔 님은 요정을 만나신 적이 있군요?”
“예전에 많이 봤어…….”
그녀는 ‘그림자 일족’ 출신.
그림자 일족이 요정계 입구를 지키고 있다고 했으니. 테르잔이 요정을 익숙하게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규리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테르잔에게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테르잔 씨. 혹시 ‘요정계 입구’에 대해서 아세요?”
-흠칫!
내가 요정계 입구를 언급하자마자 그녀는 살짝 몸을 떨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묻는 거지?”
싸늘함이 담긴 목소리.
로커스를 제압할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위협적인 기세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으읏!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테르잔이 단호하게 반응하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그녀가 요정계 입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테르잔이 냉랭한 반응을 보이자. 곧바로 안드라스와 리아네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테르잔 님. 시현 님은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하러 이렇게 많은 검은수리 단원이 발 벗고 나섰겠습니까?”
“맞아요, 언니. 카네프 님도 인정하신 분이에요.”
“…….”
크록도 열심히 수화를 표현하며 나를 옹호했다. 덕분에 싸늘했던 기세는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대신 테르잔의 공허한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직접 설명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처음부터!”
“으음.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난 시간 많아.”
“…….”
그녀는 잔말 말고 빨리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처음 마계를 방문했던 이야기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테르잔은 금방 내 이야기에 매료되어 푹 빠져들었다.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던 로커스와 크록도 은근히 귀를 쫑긋 세웠다.
내 농장 이야기가 좀 스펙타클하긴 하지.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중간부터는 나도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쏟아냈다.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그땐 그랬지.’라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줄였지만, 뒷부분에 요정들이 갑자기 사라진 부분은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래서 딸기밭의 요정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요정계로 가야 해요. 부탁드릴게요, 테르잔 님. 혹시 요정계 입구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테르잔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어…… 요정 여왕을 만나고 싶다는 거지?”
“맞아요.”
“그런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네?”
“요정 여왕은 아주 오래전부터 요정들을 이끌었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런 여왕이 아무 이유 없이 데려갔을까?”
테르잔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여왕은 현명한 지도자…… 요정들을 이유 없이 억압할 리 없어.”
“하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요. 아무 설명도 없이 모두 끌고 가버리는 건…….”
“왜 해야 하지?”
“…….”
나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어…… 여왕은 원래 그런 존재니까.”
테르잔의 차분한 설명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요정 여왕이 횡포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잘 지내던 요정들을 데려가 딸기밭이 위기에 처했으니까.
그런데 만약…….
요정 여왕의 그런 행동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혹시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라면?
오랫동안 요정들을 이끈 여왕.
이세계에서 우연히 넘어와 요정들과 인연을 맺은 나.
제삼자의 관점에서 냉정히 생각해 봤을 때.
더욱 신뢰가 가는 쪽은 당연히 여왕일 수밖에 없었다. 테르잔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정계의 입구는 비밀스러운 곳…… 그 정도의 이유로 데려갈 수 없어. 포기해.”
테르잔은 더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 없다는 듯,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드라스가 다급하게 테르잔을 붙잡았다. 그녀는 우리를 등진 채로 고개만 슬쩍 돌렸다. 쓸데없는 이야기라 생각되면 곧바로 무시해 버릴 것 같은 자세였다.
“테르잔 님의 말대로 요정 여왕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
“시현 님은 그저 요정들의 인연을 맺은 정도가 아니라, 많은 요정에게 직접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슬쩍 규리 쪽을 바라봤다.
「맞다, 뾰! 나랑 친구들이 엄청 많이 뽀뽀해 줬다, 뾰!」
“이 정도로 요정의 인정을 받고, 축복을 받은 존재라면. 현명한 여왕이 시현 님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했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안드라스의 설명이 통했는지, 테르잔은 다시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설명을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건 순전히 추측일 뿐입니다만…… 요정 여왕이 급하게 요정들을 데려간 이유는 뭔가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큰 변화?”
“안드라스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히 좀 설명해 봐.”
아리송한 결론에 주변 사람들이 다음 설명을 재촉했다. 테르잔 역시 다시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안드라스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흠, 큼! 요정들이 사라졌을 때. 저는 요정 여왕에 대한 기록과 관련 서적을 뒤져봤습니다. 워낙 신비로운 존재라 남겨진 기록이 많지는 않았지만요.”
그런 건 또 언제 살펴보신 거지?
안드라스의 철저한 준비성에 속으로 감탄했다.
“요정 여왕이 모든 요정에게 절대적인 존재임은 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배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평소에는 다른 요정들과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요.”
「덩치 큰 마족 말이 맞다, 뾰! 평소에는 우리랑 같이 잘 놀아준다, 뾰!」
규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설명에 힘을 더했다.
“그래서 요정 여왕은 오랫동안 요정들을 이끌었음에도, 그 권위를 드러낸 적이 몇 번 없다고 합니다. 요정 여왕이 직접 나섰을 때는 요정계가 위험에 처했을 때. 대표적인 예가 차원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죠.”
“잠깐만요! 그럼 안드라스 씨의 말대로라면. 지금 요정계에 위기가 생겼단 말인가요?”
「으앙! 그럼 어떻게 하냐, 뾰!」
전혀 생각지 못한 추측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규리도 불안한 듯 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스르륵!
테르잔은 다시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안드라스 앞에 다가섰다.
“그게 정말이야?”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봤을 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만약에 제 추측이 사실이라면, 위험에 처한 건 딸기밭이 아니라 요정계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으로 테르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에게서 약간의 불안함이 흘러나왔다.
안드라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힘을 줘서 말했다.
“테르잔 님. 어쩌면 요정 여왕은 시현 님께 도움을 요청한 걸지도 모릅니다. 여기 있는 규리가 그 증거지요.”
“……?”
“처음부터 전부 데려가려 했다면 얼마든지 데려갔을 겁니다. 그런데 규리만 일부러 시현 님 곁에 남겨놨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정계까지 안내하기 위해?”
“맞습니다. 테르잔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시현 님은 특별한 능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어쩌면 요정계의 위기에 그 능력이 꼭 필요한 걸지도 모르죠.”
“안드라스 님 말이 맞아요. 시현 님은 정말 특별한 분이세요. 저도 시현 님 덕분에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우리 영주님이 좀 특별하긴 하지. 안 그래, 크록?”
“…….”
안드라스와 리아네에 이어, 로커스와 크록도 나를 치켜세웠다. 테르잔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한참 동안 나를 살피던 테르잔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 뿔이 없는 걸 빼면 평범한데…….”
-스르르륵!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두 팔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에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허억?!”
“근데 이상하게 기분 좋은 냄새가 나…… 요정들이 좋아할 것 같은 냄새야.”
“저기 테르잔 님? 부끄러우니까 좀 내려주실래요?”
“응…… 미안.”
다행히 그녀는 바닥에 순순히 내려줬다. 대신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나를 살폈다.
“요정계로 향하는 입구에 가고 싶은 거지?”
“네.”
“입구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침묵의 숲으로 데려가 줄게.”
“정말이세요?”
“응.”
테르잔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든 일행은 작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뒤에서 쥐죽은 듯 숨어 있던 루크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윽.
기뻐하는 내 앞으로 테르잔이 두 손을 내밀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툭 내뱉듯 말했다.
“보수는?”
“아! 의뢰비랑 경비는 최대한…….”
“돈은 필요 없어.”
“예? 돈이 필요 없으시면 어떻게 보수를…….”
“괜찮습니다, 시현 님.”
당황하는 나를 대신해 안드라스가 앞으로 나섰다.
“테르잔 님의 보수는 제가 미리 챙겨왔습니다.”
그는 소매에서 꽤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꺼내 테르잔에게 건넸다.
“단장 님께서 인정하신 물건이니까 보수로는 확실할 겁니다.”
“카네프 단장이?”
테르잔은 곧바로 상자를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상자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이제까지 흐릿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