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6화
침묵의 숲(1)
테르잔과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는 함께 폐가를 빠져나왔다.
“테르잔 님은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나셔도 되나요?”
“응.”
“…….”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해 쓰면 돼.”
그녀는 보상으로 받은 상자를 빼면 아무것도 따로 챙기지 않았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다.
일행은 다시 루크의 안내를 받아 빈민가를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빈민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몇몇은 불안한 눈빛을 보냈지만, 처음에 불량배들을 제대로 혼내준 덕분인지 직접 나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히 빈민가를 빠져나와 그대로 그대로 황금시계 상회로 향했다. 이번에도 에르긴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벌써 돌아오셨군요!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루크가 잘 안내해 준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그건 참 다행이군요.”
에르긴의 시선이 새로 합류한 테르잔 쪽으로 향했다. 잠시 흥미를 보이는 듯하다가, 몸을 흠칫 떨면서 금방 표정을 감췄다.
아마 노련한 상인의 직감이 그녀가 위험인물이라 판단한 듯했다.
“고생했다, 루크. 아까 약속한 보상이다.”
“감사합니다!”
안드라스는 루크에게 약속했던 금화 한 닢을 건넸다.
이로써 루크의 수중에는 금화가 총 두 닢!
빈민가에서 자란 수인 소년이 평생 만져보기 힘든 액수였다.
루크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금화를 바라보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반짝였다. 수인 소년은 후다닥 에르긴에게 달려가 두 손을 내밀었다.
“에르긴 님, 이걸 받아주세요.”
“네가 맡은 일을 열심히 수행해서 얻은 돈이니, 굳이 나에게 줄 필요 없다. 가져가서 네 마음대로 사용하거라.”
“아뇨, 저는 거래를 하고 싶어요.”
“……?”
“이 돈으로 저를 상회의 정식 직원으로 고용해 주세요!”
자신을 정식 직원으로 고용해 달라는 루크.
우리는 의외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고, 제안을 받은 에르긴은 차분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금화 세 닢이면 네가 정식이 되어도 얻기 힘든 큰 금액인데.”
“제 능력으론 아직 이 돈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없어요. 지킬 힘도 없고요. 어차피 제대로 쓰지 못할 돈이라면 미래에 투자하는 게 현명하잖아요?”
루크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분명 기회를 용기 있게 잘 잡아서 큰돈을 벌긴 했지만, 확실히 금화 두 닢은 수인 소년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돈이었다.
나도 그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에르긴에게 루크의 안전을 몰래 부탁을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루크가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로커스와 안드라스도 루크의 행동에 감탄을 터뜨렸다.
“진짜 똘똘한 녀석이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군요. 저 정도의 금액이면 욕심이 날 법도 한데.”
하지만 에르긴도 만만하지 않았다.
“이건 좀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너는 아직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상회의 일도 익숙지 않은데. 그것들을 다 고려하면 내가 손해이지 않으냐?”
“그런가요? 이 금화 두 닢은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되는 건가요?”
“황금시계 상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냉정한 대답에 루크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괜히 농장에 있을 은율이가 생각나 마음이 안쓰러웠다.
시무룩해진 루크는 터덜터덜 우리 쪽으로 걸어와 말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여러분들이 엄청 중요한 손님들인 줄 알았거든요.”
“응?”
생뚱맞은 발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에르긴은 살짝 당황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저분들이 우리 상회에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신데!”
“그렇지만 에르긴 님은 이 금화 두 닢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저는 이 금화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저분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생각했거든요.”
“…….”
“만약에 에르긴 님이 이분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면. 제 손에 있는 금화를 하찮게 대할 리 없잖아요.”
호오?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확실히 루크의 말은 궤변이었다.
우리가 건넨 금화는 단순히 보답의 의미였지, 딱히 누군가를 인정하겠다는 거창한 의미가 아녔다. 하지만 에르긴의 입장에서는 루크의 궤변을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이곳은 명예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회.
아무리 루크의 말이 궤변이라고 해도, 그것을 중요한 손님 앞에서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으음…….”
에르긴이 슬쩍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결국…….
“크흠! 아무리 이분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곧바로 상회의 정식 직원은 될 수 없다. 대신 지금처럼 잡일을 도와주면서 필요한 지식을 배우도록 해라. 나중에 성과를 보인다면 정식으로 고용하는 것도 고려해 보마.”
“저, 정말요?”
“내가 뭣하러 거짓말을 하겠느냐? 중요한 손님들을 잘 수행한 대가로 특별히 인정해 주는 것이다. 저분들에게 감사히 생각하거라.”
에르긴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루크의 제안을 허락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루크는 온몸을 들썩이며 우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베푸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나는 감격에 찬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 에르긴에게 열심히 배워서 훌륭한 상인이 되렴.”
“꼭 그렇게 할게요!”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낸 수인 소년을 일행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고급스러운 외관의 마차.
마부석에는 로커스와 크록이 앉아 마차를 몰았고. 마차 안에는 나와 안드라스, 그리고 리아네와 테르잔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에르긴이 마차와 여행 준비를 완벽히 해준 덕분에 금방 도시 ‘베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르긴한테 좀 미안하네요. 이렇게 마차와 여행 준비도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상인이 귀족들을 대접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귀족을 맞이할수록, 그 영향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상인에게도 좋은 일이죠.”
“쩝. 그런가요?”
“상인이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시현 님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니 너무 부담가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드라스는 당연한 일이라 설명하며 나의 부담감을 덜어줬다.
-홀짝, 홀짝.
“테르잔 언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는 괜찮아.”
테르잔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유리병의 넓은 부분에는 카디스 영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드라스에게 속삭였다.
“테르잔 님이 벌꿀 맥주가 아주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예전부터 아주 좋아하셨죠. 술을 좋아하는 거로 따지면 카네프 님 못지않으실 겁니다.”
안드라스가 건넨 상자에는 바로 카디스 영지에서 만든 벌꿀 맥주가 들어있었다. 카네프가 인정한 물건이라는 말에 테르잔은 곧바로 의뢰를 수락한 것.
로커스를 완벽하게 제압해내는 실력도 아주 놀라웠지만, 맥주 몇 병에 의뢰를 덥석 수락하는 모습도 굉장히 신기했다.
“검은수리 단원분들은 전부 개성적이시네요.”
“하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곳이었죠.”
안드라스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맥주를 홀짝이던 테르잔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벌꿀 맥주요? 아뇨. 제가 직접 만든 건 아니고, 제 영지에서 만든 거예요. 너구리 영감님이라고 불리시는 분이 술 만드는 실력이 아주 좋으시거든요.”
“그렇구나.”
“…….”
“…….”
대화가 툭 끊기는 어색한 상황.
나는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질문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테르잔 님은 왜 그런 폐가에서 지내셨던 거예요?”
“……거기가 편해서.”
“……?”
“거기에 있으면 조용히 지낼 수 있거든…… 주변에 사람도 잘 안 돌아다니고.”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뭐가?”
테르잔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순간 할 말이 없어져 나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실패한 나를 대신해 안드라스가 입을 열었다.
“테르잔 님. 침묵의 숲에 있는 요정계 입구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요정계 입구?”
“네. 듣기로는 테르잔 님과 관계된 ‘그림자 일족’이 그곳을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그녀는 잠시 맥주를 홀짝인 뒤에 대답을 내놓았다.
“고향에 있을 때 어른들이 그랬어…… 우리는 요정 여왕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침묵의 숲을 지켜야 한다고.”
“침묵의 숲을 지킨다는 건 요정계 입구를 말하는 겁니까?”
“정확한 건 나도 몰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어.”
“으음…….”
요정계 입구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라도, 그림자 일족이 요정 여왕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안드라스의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졌지만, 쓸 만한 정보는 더 얻을 수 없었다.
* * *
베코를 떠난 지 5일.
일행을 태운 마차는 두 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 계속 길을 따라 나아갔다. 중간에 마을이 없는 경우에는 노숙으로 버텨야 했다.
그래도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 덕분에 노숙하면서도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직접 마부 역할을 맡은 로커스와 크록에 비하면 훨씬 편했지만, 며칠 내내 가만히 마차에 앉아 있는 것도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당연히 안드라스에게 차원도약 마법으로 곧장 ‘침묵의 숲’으로 가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침묵의 숲은 마력의 흐름이 매우 불안정한 곳이라 차원도약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번에 방문했던 용마족 마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안드라스는 지난번에 방문했던 용마족 마을을 예로 들면서 마력이 불안정하면 왜 차원도약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지에 대해 귀에 피가 나도록 설명을 해줬다.
며칠 동안 마차의 흔들거림과 머리가 어지러운 안드라스의 설명을 견뎌낸 끝에.
드디어 일행은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숲.
마계에서도 위험하기로 손꼽힌다는 ‘침묵의 숲’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