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8화
침묵의 숲(3)
-스스스슷!
-스스스슷!
그림자들은 옷깃이 스치는 정도의 작은 소리만 내며 순식간에 형체를 갖췄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거기에 옷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사람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접촉했군요.”
“안드라스 씨. 저 사람들은 누구죠?”
“저들이 바로 ‘그림자 일족’입니다. 아마 조금 전에 전투하면서 생긴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이 그림자 일족…….”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리게 등장한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접근을 멈췄다. 서로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들은 투명한 눈동자로 우리를 살폈다.
테르잔은 우리를 향해 움직이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천천히 그림자 일족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한 그림자 일족 남성과 가까이 마주했다.
“…….”
“…….”
으응? 뭐, 뭐지?
테르잔과 남성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볼 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옆에 있던 안드라스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시현 님, 저분들의 입술을 잘 보십시오.”
“입술?”
그의 말대로 눈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소리는 내지 않지만, 미세하게 입술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저, 저게 뭐죠?”
“그림자 일족의 특별한 대화법입니다. 저렇게 입술을 달싹이는 정도만으로도 소리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르잔과 그림자 일족 남성을 쳐다봤다.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작은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안드라스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끝까지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그림자 일족 남성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내 쪽을 향했다.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거운 시선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릴 뻔했다. 최대한 담담한 척 표정을 유지하며 시선을 받아넘겼다.
“…….”
한참 동안 나를 살피던 남자는 다시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테르잔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리 쪽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리아네가 가장 먼저 질문을 던졌다.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그림자 일족의 정찰대야. 싸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대.”
안드라스도 질문을 이어나갔다.
“혹시 ‘요정계 입구’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까?”
“아직…… 일단 마을에 들려도 되는지 물어봤어.”
“그럼 저희의 방문을 허락받은 겁니까?”
테르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이쪽 사정은 대충 설명했는데…… 외부인을 그냥 마을로 들여 보내줄 수는 없데.”
“으음…….”
아무리 테르잔이 그림자 일족 출신이라지만, 목적과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에게 마을의 방문을 쉽게 허락할 수 없는 듯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 한 가지만 확인해 주면 마을의 방문을 허락해 주겠다고 했어.”
“어떤 걸?”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 아직 요정 데리고 있지?”
“요정이요? 네. 규리는 아직 제가 데리고 있죠.”
“요정을 보여주는 게 조건이야.”
요정을 보여주는 게 조건?
나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르잔을 응시했다. 조건이 뜬금없기도 했고, 너무 간단해 허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뭐…… 일단 그게 조건이라고 하니까.
나는 품속에 숨어 있는 규리를 조심스럽게 불러냈다.
“규리야, 규리야! 잠시 일어나봐.”
상의 주머니 쪽을 툭툭 건드리며 규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주머니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귀여운 요정의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흐아암∼! 벌써 요정계 입구에 도착했어, 뾰?」
“아직 요정계 입구에는 도착 못 했어. 그것보다 잠시 밖에 나와볼래?”
「으음…… 그럼 식사시간이야, 뾰?」
규리는 날개를 흔들며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반짝이는 요정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림자 일족 측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몸을 들썩거렸다.
테르잔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성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놀라운 감정이 떠올랐다.
“…….”
“…….”
그는 다시 테르잔과 특별한 대화를 나누더니, 돌연 몸을 흐릿하게 만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그림자 일족들도 뒤따라 모습을 감췄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요정을 보여주면 마을의 방문을 허락해 준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내 물음에 테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마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호위하겠대.”
“호위요? 전부 여길 떠나간 거 아닌가요?”
“아냐. 지금 우리 근처에 머물면서 지켜보고 있어.”
“…….”
“가자.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거야.”
테르잔은 아무렇지 않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다시 숲길을 나섰다.
하지만 남은 일행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많은 그림자 일족들이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커스는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크록, 너는 뭐가 느껴지냐?”
-절레절레.
“쩝…….”
로커스의 물음에 크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드라스 역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그림자 일족의 은신술은 그 누구도 쉽게 눈치챌 수 없다더니…… 직접 경험해 보니 소름이 돋는군요.”
나도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숲속의 고요함만 전해질 뿐, 그림자 일족의 존재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만약에 숨어든 그림자 일족이 살의를 품고 우리를 공격해 온다면…….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생각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현 님, 얼른 가요. 이러다 테르잔 언니를 놓치겠어요.”
“으…… 응. 알았어요, 리아네 씨.”
리아네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테르잔의 뒤를 따랐다.
* * *
미로같이 구불구불한 숲길을 따라 한 시간.
정말 오랜만에 빽빽한 나무가 아닌, 확 트인 공간과 함께 마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가 그림자 일족이 사는 마을…….”
“이 마을이 언니 고향인 거죠?”
“응. 맞아.”
“저도 그림자 일족의 마을에 오는 건 처음이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데?”
“…….”
로커스의 말대로 그림자 일족이 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테르잔은 마을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 입구야. 얼른 들어가자.”
“그…… 저희를 호위해 주신 분들은 함께 안 가나요?”
“정찰대? 게네들은 다시 숲으로 돌아갔어.”
“예?”
“호위가 끝났으니 순찰 임무를 계속하러 간다고 그랬어.”
“감사 인사라도 전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아쉬워하는 나를 다독이며 마을로 안내했다.
입구에는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는데, 별다른 제재 없이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아마도 우리가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좀 더 자세히 마을을 살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잘 정비된 마을의 모습에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내부의 모습만 보고 생각한다면, 이곳이 ‘침묵의 숲’에 둘러싸인 마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스윽.
-힐끔힐끔.
우리가 마을의 큰길을 걷기 시작하자, 집 안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흔치 않은 외부인 방문에 마을 주민들은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흐음…… 마을 주민들은 평범하네? 그림자 일족은 아까 그 정찰대처럼 전부 유령 같을 줄 알았는데.”
로커스의 중얼거림에 테르잔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거에 비하면 마을 주민들은 굉장히 평범했다.
검은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특유의 무표정만 제외하면, 마을 주민들에게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을의 중심부라 생각되는 곳까지 왔을 때.
아까 정찰대와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과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남성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남자는 곧바로 테르잔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우리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오셨군요.”
“응. 의뢰가 있어서…….”
“정찰대를 통해 간단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얘네들이 요정계 입구로 가고 싶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남자는 우리 쪽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그림자 일족을 이끄는 ‘바르단’이라고 합니다.”
중후함과 절도가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
그는 자신을 ‘바르단’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도 최대한 정중하게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카디스 영지에서 온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저는 리아네라고 해요.”
“슈나르페 가문의 안드라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일행인 로커스 씨와 크록 씨입니다.”
“귀하신 분들을 맞이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이곳까지 찾아오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바로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바르단은 곧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방에는 뜨끈한 기운을 뿜어내는 난로, 그리고 바닥에는 푹신한 카페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행은 여행으로 쌓인 피로와 침묵의 숲에서 꽉 붙잡고 있던 긴장을 잠시 내려놓으며 편안함을 즐겼다.
-손님. 마실 것과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을 안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쪽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성인 여성과 작은 아이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쟁반에 담긴 음료와 간식을 일행들 앞에 내려놨다.
나에게도 작은 아이가 공손히 쟁반을 가져왔다. 다른 그림자 일족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의젓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해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잘 먹을게.”
“…….”
“응? 나한테 할 말 있니?”
여자아이는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대뜸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내 품에 안긴 여자아이는 킁킁 냄새를 맡고, 나를 이곳저곳 찔러보더니. 투명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는 요정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