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45화
위기의 요정계(3)
“요정계를 새로 만들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규리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현실성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정계를 만들면 균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뾰!」
“그렇게 간단히 요정계를 새로 만들 수 있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여왕님이라면 가능하다, 뾰!」
규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도 자신만만 태도에 혹시?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완전히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에요.」
“정말 요정계를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며 되묻자 요정 여왕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시현 님이 사는 세계와는 다르게. 요정계는 이면세계의 형태로 존재해요.」
“이면세계?”
「네. 마치 거울의 허상처럼, 다른 세계의 일부분을 빌려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 거죠. 지금의 요정계는 침묵의 숲과 그 주변을 빌려 만들어낸 곳이에요.」
“아…… 그래서 요정계의 입구가 침묵의 숲에 있는 거군요?”
요정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맞아요. 이렇게 이면세계는 다른 세계의 일부분을 빌려오는 형태이기 때문에 쉽게 만들어낼 수 있어요. 특히 요정들은 그런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죠.」
옆에 있던 규리가 손을 들며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할 수 있다, 뾰!」
“너도 이면세계를 만들 수 있어?”
「응! 친구들이랑 딸기밭에 마을을 만들었다, 뾰!」
아!
평소 딸기밭의 요정들이 휙, 휙 사라졌던 건 단순히 모습을 숨긴 게 아니라, 이면세계에 몸을 숨긴 거였구나!
요정들의 신비한 능력을 깨닫고 살짝 감탄을 터뜨렸다.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요정계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새로운 요정계를 만들면 균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내 물음에 요정 여왕의 표정이 흐려졌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
「혹시 요정계 입구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보셨나요?」
나는 머릿속으로 금방 커다란 나무를 떠올렸다. 워낙 큰 나무라 요정계의 입구를 통과하려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봤죠.”
「지금의 요정계는 그 커다란 나무 정령의 힘을 빌려 탄생한 거예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지만. 이면세계를 형성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힘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 정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요.」
“으음…… 그럼 그 나무 정령에게 한 번 더 부탁하면 안 될까요?”
「지금 나무 정령은 긴 잠에 빠져들었어요. 다시 깨어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거예요.」
규리와 친구들이 딸기밭에 쉽게 이면세계를 만든 것과는 달리, 요정계를 새로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긴.
말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으면 요정들이 그렇게 고생할 필요도, 요정 여왕이 급하게 요정들을 불러모았을 일도 없었겠지…….
“쉽지 않네.”
암울한 상황에 분위기가 어두워지려던 그때.
「아니다, 뾰! 충분히 할 수 있다, 뾰!」
다시 한번 더 규리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방금 요정 여왕님이 말씀하셨잖아. 지금은 새로운 요정계를 만들만한 여력이 없다고.”
「시현이 도와주면 된다, 뾰!」
“내, 내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나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한테는 나무 정령 같은 힘이 없어.”
「규리, 시현 님에게 억지 부리면 안 돼요.」
억지 부리는 규리에게 나와 요정 여왕이 차례로 타이르듯 말했다.
「어휴! 답답해, 뾰!」
규리는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함을 표하더니,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덩치가 나와 비슷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당기는 힘이 만만찮았다.
“어…… 어엇?!”
나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넘어지려는 모습에 요정 여왕이 깜짝 놀라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탓!
「괜찮으세요?」
그녀가 어깨를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으으…… 규리야, 갑자기 그렇게 막무가내로 당기면 위험하잖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왕님.”
「…….」
인사를 하고 다시 물러서려는데 요정 여왕의 손이 계속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어색한 거리감에 약간 당황하며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여왕님?”
「이럴 수가…….」
“……?”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죠?」
요정 여왕의 두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계속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한동안 나는 그녀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했다.
잠시 후.
요정 여왕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시현 님! 규리의 말이 정말 사실일 줄이야.」
「에헴!」
감탄하는 그녀의 모습에 규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슬쩍 손을 들었다.
“저기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반짝이는 눈과 살짝 상기된 얼굴은 여전했다.
「아까 새로운 요정계를 만들려면 힘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정확히는 세상을 구성하는 힘이 필요해요.」
세상을 구성하는 힘?
낯설지 않은 설명에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이에요. 나무 정령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오랜 세월이 걸려서 얻은 힘이거든요. 그런데 시현 님에게는 그 나무 정령보다 더 많은 힘이 느껴져요.」
“저한테요?”
「네, 이렇게 많고 다양한 힘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요!」
“…….”
고개를 숙여 차분하게 양 손바닥을 바라봤다.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걸까?
요정 여왕의 설명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크 심판관 때도 그랬던 것처럼.
‘왜 이런 대단한 힘을 내가 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잠시 떠올랐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금방 털어냈다.
왜 이런 힘을 얻게 되었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요정 여왕이 내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비어 있는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시현 님. 정말 염치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제발 저희를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 저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시현 님뿐이에요.」
“으음…….”
규리도 내 팔을 붙잡으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나도 이렇게 부탁할게, 뾰! 새로운 요정계가 없으면 나랑 친구들도 전부 사라질 거다, 뾰! 앞으로 시현 말도 잘 듣고, 딸기밭도 더 열심히 돌볼 테니까. 제발 부탁이야, 뾰!」
「우웅…….」
「뾰…….」
거기다 작은 아기 요정들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처롭게 올려다봤다.
요정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기에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어요. 규리와 친구들이 이대로 사라지는 건 저도 상상하기 싫은 일이니까요.”
나의 긍정적인 반응에 요정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요정 여왕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일단 도움을 드리기 전에. 제가 힘을 빌려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나무 정령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면 좀 난감할 것 같은데…….”
내가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자, 요정 여왕이 화들짝 놀라며 설명했다.
「그,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시현 님의 힘을 빌려 쓰는 건 사실이지만, 워낙 많은 힘을 가지고 계셔서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잠에 빠지는 일 같은 것도 없을 거고요.」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설명이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속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마음속으로 약간의 부작용 정도는 견딜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큰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알았어요. 제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저, 정말인가요?」
되묻는 요정 여왕에게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
「와아아!」
「꺄아! 역시 시현이 우릴 도와줄 줄 알았다, 뾰!」
신난 아기 요정들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규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나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나를 붙잡고 방방 뛰는 탓에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으윽! 어지러우니까 그만 흔들어.”
「헤헷! 미안하다, 뾰!」
요정 여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눈빛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어두웠던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그건 제가…….」
-벌컥!
「여왕님, 큰일 났습니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 중 하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성 위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필 지금…….」
요정 여왕은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어디론가 향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방에서 외부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바깥의 상황을 직접 살필 수 있었다.
-쩌저적!
-끼이이이이익!!
아까 마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균열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균열의 불길한 기운이 성을 향해 쏟아질 것 같았다.
먼저 균열을 발견한 호위병들과 요정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균열의 크기에 모두가 완전히 압도되고 있었다.
「우으…….」
「우으…….」
아기 요정들이 떨면서 내 뒤에 숨어들었다. 나는 두 아기 요정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불안함을 달래줬다.
찡그린 얼굴로 균열을 바라보던 요정 여왕은 뭔가를 결심한 듯 눈동자에서 단호한 빛이 흘러나왔다.
「시현 님.」
“네?”
「지금 당장 힘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은…….”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저 균열이 완전히 요정계를 뒤덮기 전에 새로운 요정계를 만들어내야 해요!」
그녀의 비장한 말에 나도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